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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트윅 공항은 비행공포증에 사로잡히기에 최적의 장소는 아니다. 하지만 지금 내가 느끼는 것은 비행공포증인 듯하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 높이 올라가면 오래오래 한참이나 떨어져야 하니까. 그러고 보니 나는 몇 개월 동안이나 떨어져 왔다. 몇 개월 동안 내 삶속으로 떨어져 왔다. 그리고 이제 바닥에 닿으려 한다."

 

300여 페이지에 이르는 장편소설 '개더링'의 마지막장 마지막 문단이다. 소설 초반에 던져진 리엄의 자살 소식을 빼고는 별다른 사건없이, 큰 변화도 곡절도 없이 흘러가는 물처럼 이어지던 소설의 이 끝문단에서 문득 숨이 턱 멎는다.

 

멍한 표정으로 다시, 마지막 문단을 읽노라니 아까부터 참고있던 숨이 훅 새나온다. 이런 거구나, 고개를 끄덕이다 종내 이마를 친다. 이런 게 바로 소설이 주는 감동이구나. 소설가란 바로 이런 이야기를 풀어가는, 들려주는 사람이구나.

 

열두 남매 가운데 쌍둥이처럼 지내던 바로 위의 오빠 리엄이 자살한 뒤, 베로니카는 리엄의 자살원인을 추적한다. 현장조사나 실제적인 사인을 조사하는 건 아니다. 알코올 중독자로 살다가 자살을 선택하기에 이르는 삶의 결정적인 계기를 집요하게 따라가는 베로니카의 회상은 어린 시절 아이들을 '번식'하느라 지친 어머니가 아이들을 맡겼던 에이다할머니의 집에서 목격한 성추행장면으로 거슬러올라간다.

 

베로니카의 기억과 상상과 고통과 후회와 자책감, 미묘한 죄의식으로 한겹 한겹 드러나는 헤가티 3세대의 가족사는 바닥을 알 수 없는, 이제는 사용하지 않고 버려둔 옛집의 우물처럼 깊고 어둡고 황량하며 우울하다. 리엄에 대한 사랑으로 우물 속으로 들어간 서른아홉의 베로니카는 '리엄의 자살'을 낳은 가족을 비난하고 원망하며 자신의 기억 자체를 불신하고 두려워도 하지만, 결국 받아들인다.

 

소설의 마지막 문단에서 보듯 리엄의 죽음과 함께 그때까지 살아온 삶을 되짚으며 통과의례를 거친 베로니카는 이제 스스로 우물바닥으로 떨어져야 하는 삶을 향한다. 불화하는 모순덩어리 가족의 비밀과 욕망과 어리석음 잔인한 연약함 속에서 자신의 운명을 붙잡는 아일랜드인처럼!

첨부파일
8925530198_1.jpg

덧붙이는 글 | <개더링> / 앤 엔라이트 / 민승남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10-16


개더링

앤 엔라이트 지음, 민승남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2008)


#개더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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