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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다.

헌법재판소(헌재)의 언론관계법 권한쟁의 심판 결정문을 본 첫 느낌이다. 인터넷에서 반응을 살펴보니 나만 그런 것은 아닌 것 같아 다행이다. 짧은 법률 지식이긴 하나 10년 이상 법으로 밥을 먹고 살아온 온 나 스스로 정말로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어려운 건 그렇다치자. 문제는 정말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 헌재의 결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법률 지식만 필요한 게 아닌 것 같다. 국어와 논리학, 더 나아가 독심술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는 건 나뿐일까.

절차상 위법하지만 해결은 국회에서?

헌법재판소 판결문
 헌법재판소 판결문
ⓒ 오마이뉴스 그래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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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인내를 갖고 결정문을 해석해보기로 했다. 얽히고설킨 헌재의 결정을 읽고 또 읽어보았다. 물론 다소 무리인줄 알지만 헌법재판관 다수의 의견을 토대로 다음과 같이 결정문을 정리해보았다.

(기자주 : 9명의 헌법재판관은 각기 다른 논리로 결론을 내렸다. 이것은 각각의 헌법재판관이 독립된 의견을 내는 헌재의 심판 구조상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참고로 헌법소원이나 위헌제청 사건의 의결정족수가 6인인 것과는 달리 이 사건과 같은 권한쟁의심판은 다수결에 따르게 된다.)

"7월 22일 국회는 언론관계법을 통과시켰다. 국회의장은 법률안 심의·표결과정에서 절차상 하자를 범했고, 이 때문에 국회의원들의 고유권한인 입법권을 침해한 것은 맞다. 이것이 헌법재판관들의 다수 의견이다.

그러나, '이 법을 무효로 볼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재판관들 다수(신문법은 6인, 방송법은 7인)는 법안 통과를 무효로 볼 수 없다고 결론내렸다. 그 근거로 재판관들은 ▲법이 무효가 될 정도로 절차상 하자가 심각하지 않았다는 의견과 ▲헌재는 국회의원들의 권한이 침해되었는지만 판단하고 ▲후속 조치는 국회의 자율성에 맡기는 것이 권력의 분립 원칙상 바람직하다는 견해를 밝혔다.

따라서 언론관계법 통과 과정에서 절차상 위법은 인정되지만 이미 통과된 법이 무효는 아니다."  

거칠게 표현하자면 헌재는 국회에서 위법이 일어난 사실만 확인한 후 문제 해결은 다시 국회로 넘긴 셈이다.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니 헌재의 결정에 심각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한다.

[의문 1] 절차상 위법, 앞으로 해도 되는 것인가?

이강국 헌법재판소장과 재판관들이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에서 '언론관련법' 국회 표결의 정당성을 가리는 권한쟁의심판 청구 사건에 대한 선고를 하기 위해 대심판정에 앉아 있다.
 이강국 헌법재판소장과 재판관들이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에서 '언론관련법' 국회 표결의 정당성을 가리는 권한쟁의심판 청구 사건에 대한 선고를 하기 위해 대심판정에 앉아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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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재는 절차상 위법을 인정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국회에서 이러한 위법은 허용된다는 말인가, 안 된다는 말인가. 헌재가 이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다면 이번 결정은 공치사에 불과하다.

12년 전의 상황을 보자. 97년 헌재는 이와 유사한 결정을 내린 적이 있다. 96년 신한국당(한나라당의 전신)이 노동관계법 등 7개 법안을 이른바 '날치기' 처리하자 야당은 헌재를 찾았다. 헌재는 "야당 국회의원들의 법률안 심의·표결권이 침해당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그때도 법안통과가 무효라고 보지는 않았다. 헌재를 찾은 의원들은 심리적인 위안을 얻었을지 몰라도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물론 정치권은 헌재 결정이 나기 전에 노동법을 수정하는 쪽으로 정치적 합의를 보긴 했지만 이것은 헌재의 결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만일 헌재가 그 당시 절차상 위법을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했거나 법률안 통과 자체가 무효라고 판단했다면 이번 사건은 벌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헌재의 결정은 무난(?)하기 그지없었다.

이대로라면 앞으로 국회에서 대리투표, 날치기 통과가 문제가 된다 한들 그것을 법적으로 구제받을 수 있는 길은 없다. 이와 유사한 사건이 또다시 온들 "절차상 위법이나 무효는 아니"라는 똑같은 얘기만 하지 않을까. 헌재는 이번 결정을 통해 정치권과 국민들 사이에서 논란만 증폭시키지 않았는지 심각한 의문이 든다.

절차상 위법이 있었다면 이에 대한 해결책을 함께 제시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런데도 헌재는 이번에도 아무런 강제력이 없는 결정을 내놓았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국회의장의 절차상 위법 역시 문제삼지 않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가결선포 행위의 심의·표결권한 침해를 확인하면서 그 위헌성·위법성을 시정하는 문제는 국회 자율에 맡기는 것은 헌법재판소의 사명을 포기하는 것"이라는 소수의 의견(조대현, 송두환 재판관)이 더 설득력을 갖게 한다.   

[의문 2] 자율적으로 해결 못해 헌재 찾았더니 "자율적 해결"?

사법부(헌재도 넓은 의미의 사법기관이다)를 찾는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일까. 당사자 사이에 원만한 해결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뿐 아니라 국가기관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국회의원들이 헌재를 찾은 것도 언론관계법 통과와 관련한 국회의장의 일련의 행위가 정당한 것인지 사법적 판단을 받기 위해서다. 우리나라 국회가 대화와 타협으로 잘 운영된다면 헌재에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니, 이러한 날치기 통과 논란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헌재는 국회의 자율성을 들먹이며 공을 다시 국회로 넘겨버렸다. 자율성을 갖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는 기관에게 알아서 해결하라니. 이것은 아무런 결정을 하지 않은 것과 같다. 헌재는 스스로 법률의 무효를 선언할 권한도 없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런 예를 들어보면 어떨까. 남편이 아내를 때렸다. 재산도 마음대로 처분했다. 아내는 법의 도움을 요청했다. 그랬더니 사법부가 "가정폭력은 인정하지만 가정의 자율성을 존중해줄테니 이혼하지 말고 잘 살아보라"고 결론을 내린 격이다.

"일사부재의 위배 최초 결정" 자화자찬 

헌법재판소도 장문의 결정문에 대한 해설을 해놓기는 했다. 더구나 친절하게도 이번 결정에 대해 한 문장으로 다음과 같은 의미를 부여했다.

"이번 결정은 헌법재판소가 국회에서의 입법절차의 하자와 관련하여 질의·토론절차를 거치지 아니한 점, 표결절차에서의 공정성의 흠결, 일사부재의 원칙에 위배한 점 등을 이유로 그러한 하자 있는 심의·표결절차에 터잡아 이루어진 법률안 가결선포행위가 국회의원인 청구인들의 법률안 심의·표결권을 침해하였다는 점을 확인한 것이고, 특히 무권투표등과 관련한 표결절차상의 하자, 국회법상 일사부재의 원칙 위배여부에 대하여는 최초의 결정으로서 의미가 있다."

자화자찬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 부분을 읽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란 말인가." 헌재의 이번 결정은 여러 가지로 직무유기란 비판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태그:#미디어법, #헌재, #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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