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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분위기가 좀 달라지고는 있지만, 직무 관련 '교육'은 흔히 머리 식히기나 단합대회로 인식되는 행사다. 2~3일 합숙하며 프로그램 몇 개 소화하면 나머지 시간은 공기 좋은 곳에서 논다. 긴장과 경쟁을 유도하는 장치가 있긴 하지만 식구들끼리 그게 무슨 대수인가?

 

저녁엔 소통을 강화하는 '중요한' 모임. 때로 술도 오고 가고 토론보다 강도 높은 격한 의견(?)이 난무하기도 한다. '동양화 감상회(?)'는 좀 줄었다고 하는데 동료의 코골이를 극복하고 잠드는 방법의 으뜸은 술에 취하는 것. 다음날 아침엔 등산 같은 운동이다. 오전 강의, 지역 특산 점심, 그리고 귀가.

 

풍요롭고 자못 질탕하기까지 한 이런 이벤트에도 나름의 의미가 없지 않겠다. 일상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에서의 대화, 또 취중의 '진심 교류'가 갖는 보람 따위를 말하는 것이다. 돈을 들일 만한 일일까? 더구나 이 돈이 세금이라면?

 

물건 파는 어려움 실감하며 이를 악물다

 

이천시가 올가을에 벌인 '공직자 역량강화교육'(9월 21일~10월 30일)은 발상부터 달랐다. 소속 공무원 모두가 서울시민을 상대로 자기 지역 대표 상품인 쌀을 길거리에서 파는 가두상인이 됐다. 말하자면 시 직원들이 서울서 노점상으로 나선 것이다.

 

"주민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에서 물건 파는 일의 어려움을 처음 실감했지요. 처음에는 주눅이 들어 말 붙이기도 어려웠지만 어떻게 합니까? 이겨내야지요. 전날 받은 강의 내용을 생각하며 이를 악물었지요. 세 시간 정도 악을 쓰니 고객의 마음을 끌 수 있겠다는 느낌이 오더라고요."

 

젊은 후배를 조장으로 '모시고' 잠실 우성아파트 상가 앞 텐트에서 호객에 여념 없던 정명교 신둔면장은 자신감을 보였다. 널리 알려진 브랜드 쌀인데다 특별히 싸게 파는 것인데도 일은 만만치 않아 처음에는 무척 당황했다고 했다.

 

"햅쌀은 수분이 많기 때문에 물을 좀 적게 잡아야 제대로 된 이천 쌀밥을 지을 수 있습니다. 무료로 드리는 이 선전용 봉지 쌀은 평소처럼 하시고요. 너무 박박 씻지 마세요."

 

인근 지하철 역 부근에 텐트를 친 재난안전관리과 강진수씨는 고참 주부들 앞에서 밥 짓기 강좌(?)를 벌이느라 진땀을 흘렸다. 더 어려운 질문이 나올까 봐서 마음을 졸였다면서 그는 "장사가 어렵다는 것을 새삼 실감했다"고 손사래를 쳤다.

 

'이천의 미래'를 함께 찾아보는 작업의 출발점으로 자유토론이나 유명인사 강연 등 '지정곡'이 아닌 '쌀장사 현장 체험'이 제시된 것은 기왕의 교육 형태와 비교될 만하다. 교육 첫날 이들은 서울 송파구의 숙소 강당에서 '잘 나가는 노점상'이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다.

 

이금룡 전 옥션 회장의 '문화시대 디지털 마케팅' 제목의 강의를 들었고, 판매 시뮬레이션 방안과 '이천시와 고객 간의 가상 인터뷰' 등의 궁리를 거쳐 각 노점상 팀별 판촉아이디어 회의를 벌었다. 도심의 깡패가 전원도시 관광도시 이천의 면모를 깎아내리는 점을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는 점도 논의됐다. 온천이 실속이 없지 않느냐는 얘기도 나왔다. 둘째 날 이들 모두는 판매 현장에 섰다.

 

"놀고먹는 행사에서 벗어나 구체적인 방법 연구할 때"

 

"우리 시민들이 잘 만들어준 쌀을 더 잘 팔리도록 하기 위해 공직자인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와 생각의 각도를 다듬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루 경험으로 그 어려운 장사를 배웠다 할 수는 없지요."(김웅제 설성면장)

 

"솔직히 많이 피곤하고, 처음 해보는 장사 역할이 힘들기는 했습니다. 얼마나 열없는 경우가 많았는지 몰라요. 그래도 하고 나니 기분이 좋습니다.(한 여직원)

 

이 행사를 지휘한 김진효 한국산업개발훈련원장은 "기업이나 공직사회의 교육이 이제는 놀고먹기 식의 '예산 써버리기 행사'에서 벗어나는 구체적인 방법을 연구해야 할 때"라고 말한다. 교육을 받는 이들이 행사에서 기쁨과 보람, 실천의지를 얻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1박2일이라는 길지 않은 시간에 새로운 역할을 해보고 이에 따른 자신감을 갖게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지요. 좀 어렵기는 하지만 역할 바꾸기가 줄 수 있는 다양한 효과를 겨냥한 것이지요. 30일로 9개 조의 '노점상 교육'이 잘 끝났는데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한 것으로 자부합니다."

 

860명이 교대로 참가한 이 행사에서 이천시는 모두 65톤 남짓의 쌀을 팔았다. 그러나 쌀 말고도, 김웅제 면장 말마따나 도시 고객들이 얼마나 야무지고 깐깐한 소비자인지, 말로만이 아닌 마음으로 섬기는 자세가 얼마나 필요한지를 공무원 개개인이 몸으로 배운 기회였다는 점이 더 큰 보람이었겠다. 시민의 세금이 제대로 쓰인 경우로도 평가될 수 있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시민사회신문(www.ingopress.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쌀, #브랜드, #교육, #이천시청, #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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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등에서 일했던 언론인으로 생명문화를 공부하고, 대학 등에서 언론과 어문 관련 강의를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얻은 생각을 여러 분들과 나누기 위해 신문 등에 글을 씁니다. (사)우리글진흥원 원장 직책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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