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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안강에 창녕 조씨 시조 묘가 있다"

창녕 조씨 시조 묘가 경남 창녕이 아닌 경주 안강에 있다는 말을 처음 들었다. 조씨 문중이 아닌 사람들은 본관이 '창녕'인 까닭에 당영히 조씨 시조 묘소가 창녕에 있을거라고 예단하기 십상일 게다.

그러나, 창녕 조씨 시조인 태사공(太師公) 조계룡(曺繼龍) 묘소가 경주시 안강에 있단 말을 듣었다. 깜짝 놀랐다. 다른사람도 아닌 20년동안 알고 지낸 가까운 형님으로부터 들었으니 더 놀라울 다름이다.

형님은 안강에서 생업을 하시면서 동시에 시조묘소를 관리하는 역할도 맡고 계셨다. 형님과는 20년전에 경주 안강에 있는 풍산금속의 노조결성을 계기로 만났으며, 지금껏 소중한 인연을 이어오고 있다. 왠지 형님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종덕재 정당. 경부시 안강읍 노당리에 있는 종덕재. 창녕 조씨 시조묘를 수호하기 위해 세운 재실
종덕재 정당.경부시 안강읍 노당리에 있는 종덕재. 창녕 조씨 시조묘를 수호하기 위해 세운 재실 ⓒ 추연만

일단, 묘소를 가보자고 형님을 재촉했다. 태사공(太師公) 조계룡(曺繼龍) 묘소 바로 앞에는 조선시대에 세운 재실인 '종덕재(種德齋)'가 있었다. '덕을 심는다'는 뜻으로 <논어>에 나오는 글귀란 설명을 해주셨다.

종덕재 정당 솟을대문 옆 안내판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설명으로 이곳의 역사를 알리고 있었다.

종덕재 솟을대문 종덕재 정당의 대문. 3칸 솟을대문
종덕재 솟을대문종덕재 정당의 대문. 3칸 솟을대문 ⓒ 추연만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1호로 지정된 종덕재 정당은 창녕 조씨 시조인 태사공(太師公) 조계룡(曺繼龍)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하여 1757년(영조 33)에 세운 재실이다. 1817년(순조 17)에 묘단비를 세우고 1832년(순조 32)에 묘각을 중건하여 종덕재(種德齋)라 명명하였다. 1929년 창녕조씨 대종회에서 중수하였고 6·25전쟁 때 일부 파손되었으나 다시 중수하였다. 매년 음력 10월 초정일 창녕조씨 문중에서 묘제를 거행하고 있다.

정당을 중심으로 좌우에 동·서재를 두고 정면에 솟을대문인 영은문을 배치하였으며 정당 옆에 3동의 부속사를 두어 二口자의 배치 구조이다. 정당은 정면 6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 겹처마집으로서 중앙에 2칸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 각각 방 2칸을 달았으며 전면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

종덕재 종덕은 <논어>에 나오는 글귀로써 '덕을 심는다'는 뜻이라 한다
종덕재종덕은 <논어>에 나오는 글귀로써 '덕을 심는다'는 뜻이라 한다 ⓒ 추연만

대문 오른쪽 담장을 돌아서, 옆문을 통해 종덕재 안을 들어갔다. 한눈에 봐도, 꽤 잘지은 건축물임을 알 수 있다. 기둥으로 사용된 소나무는 '참 생겼다'말 외는 달리 표현 할 수 없을 정도로 굵고 매끈한 게 너무 인상적이다. 대들보는 또 어떤가? 자연스레 휘어진 굵은 소나무가 종덕재를 떠받치고 있다. 놀라운 모습이다

종덕재 대들보 자연스레 휘어진 굵은 소나무로 대들보를 쓴 게 참 이채로운 모습
종덕재 대들보자연스레 휘어진 굵은 소나무로 대들보를 쓴 게 참 이채로운 모습 ⓒ 추연만

종적재 건물 종적재
종적재 건물종적재 ⓒ 추연만

안강은 6.25전쟁때, 형산강을 사이에 두고 치열한 전투를 치른 곳으로 유명하다. 전쟁에도 이런 건축물이 훼손되지 않았다니, 신기하고도 다행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형님은 북한군 지휘부가 종덕재에 상주했으며 미군 폭격에도 종덕재는 비껴갔다고 말했다. 창녕 조씨 문중을 비롯해 종덕재를 아끼는 여러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는 얘기.
 
창녕 조씨 시조묘소 창녕 조씨 시조묘소
창녕 조씨 시조묘소창녕 조씨 시조묘소 ⓒ 추연만

종덕재를 나와서, 조금만 걸어가니  창녕 조씨 시조인 태사공(太師公) 조계룡(曺繼龍) 묘소가 보였다. 안강의 명산이란 어래산의 남동쪽으로 뻗어내린 구릉의 완만한 경사면에 자리하고 있었다. 근처에 있는 신라흥덕왕릉 묘터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지리적으로 '명당'인 셈인 모양이다.

시조묘를 참배하는 조규수 형님 시조묘를 참배하는 조규수 형님
시조묘를 참배하는 조규수 형님시조묘를 참배하는 조규수 형님 ⓒ 추연만

태사공이 신라 진평왕의 사위였다 하니, '해상왕' 장보고 시대 왕인 흥덕왕릉보다 한참 일찍  묘소를 쓴 셈이다. 흥덕왕이 다른 왕들과 같이 경주에 묘를 쓰지 않고 이곳에 자리한 것도 지리적으로 명당터와 무관치 않은 것이란 짐작도 해본다. 

시조묘는 봉분이 예상보다 크진 않았다. 경주에서 흔히 보는 능과 비교하면 말이다. 둘레솔에 둘러싸인 한쌍의 봉분이 잘 어울리는 모양이다.  보통사람 묘소보다는 봉분이 크지만 그리 화려한 모습이 아닌게 더 정감이 간다. 2개의 봉분을 보며 "한 분은 누구시죠?" 질문을 했다. 형님은 "할머님이시지!". 당연한 듯 대답했다.

창녕조씨 시조묘 태사공(太師公) 조계룡(曺繼龍) 묘소
창녕조씨 시조묘태사공(太師公) 조계룡(曺繼龍) 묘소 ⓒ 추연만

창녕 조씨 시조묘를 내려오며, 조선의 '대쪽 선비' 남명 조식선생을 생각했다. 그리고 해방 후 농지개혁과 헌법을 기초해 최근 재조명을 받는 조봉암 선생도 떠올렸다. 여건이 허락되면, 연말에 있을 묘사에 한번 들르고 싶은 마음도 드는 것은 왜일까?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제 개인 블로그 '별빛촌 이야기'(http://blog.daum.net/staryc)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창녕조씨 시조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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