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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꼭 지켜야 한다는 교사들의 성화는 늘 무색합니다. 꿈에도 그리던 학교에서 가는 소풍날이고, 육십들이 훌쩍 넘어서 가는 '학교소풍'인데 늦을 리 만무합니다. 10월 26일은 문해학교인 '마들여성학교' 어머니들의 가을 소풍날입니다. 장소는 충북 제천에 있는 청풍문화재단지입니다. 

 

8년만에 손녀딸을 얻어서 너무 좋다는 우리 반 어머니는 "학교소풍이라 엄청 신나요. 내가 어렸을 때, 오빠가 소풍을 간다고 달걀을 삶아 놓은 것을 심술 나서 다 먹어버렸다니까, 그런 소풍을 가니 얼매나 좋아, 지집아들 학교 보내서 뭔 정에 쓰냐고 우리 아버지가 오빠만 학교를 보냈거든"라고 말씀하십니다.

 

인원 확인을 하고, 각반끼리 모여 두 대의 관광버스에 나누어 탔습니다. 차 안에서 박윤경 교감이 소풍에 대한 전반적인 안내를 합니다. 소풍가는 장소인 충북제천문화재단지가 생기게 된 배경을 설명하는데, 원래 아이들에게는 교장, 교감선생님의 말은 대체로 귓등으로 흘러듣는 말이므로, 어머니들도 교감의 말은 귓등이고 소풍가서 놀 생각으로 마음은 풍선입니다.

 

나누어주는 유인물도 어느새 가방 깊숙이 어딘가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은 영락없는 가을입니다. 벼들은 베어져 논밭에 누워 제 몸의 물기를 말리고 있고, 콩 타작을 한 쭉정이는 이미 밭에 뿌려져 거름이 되려 하고 있습니다. 참깨는 단으로 묶인 채 서로 기대어 털릴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조금은 색깔이 어두워진 가을 들녘이다 싶어서 그 쓸쓸한 느낌을 무마하려고 눈을 들어 산을 보니 온통 울긋불긋이라, 우리 어머니들이 입고 오신 알록달록한 옷하고 내기를 하는 듯합니다. 단풍들은 모두가 붉은 것이 아니고 제 이름을 달고 물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울긋불긋한가 봅니다.

 

휴게소에 들러 잠시 휴식을 갖는 시간에도, 어머니들에게는 소풍에 대한 설렘이 목소리와 몸짓에 묻어납니다. 서로 다른 차를 타고 왔으니 오는 동안에 차 안에서 어떤 즐거움이 있었는지 자랑들을 하시느라 바쁩니다. "우리 차에서는 노래 부르고 왔는데, 거그 차는 어땠어?" "우리 차도 난리가 났지" 조용히 왔다는 것은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이 서로 얼마나 잘 놀고 왔는지를 확인합니다.

 

목적지인 청풍문화재단지에 도착해서 수몰 전 살았던 사람들의 집과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을 돌았습니다.

 

 

"이게 뭔지 알아?" "알지" "이것은?" "모르겠는데" 안다면 그것을 사용했던 시절로 돌아가  무용담을 얘기하고, 모른다면 그것이 어떤 때 쓰는 물건인지를 설명하고, 해설사가 필요 없습니다. "난 다 알아. 내가 어렸을 때부터 저런 것들로 농사를 지었거든" 하시는 어머니 목소리에는 고단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는지 목소리가 촉촉해지십니다.

 

문화재단지 안에는 단체로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우선 각 반별로 자리를 잡습니다. 뒤쪽은 약간 경사진 언덕이 바람막이를 해주고 앞 쪽에는 청풍호수가 푸른색으로 잔잔하게 펼쳐져 있고, 그 앞산에는 단풍이 색깔별로 그림을 만들고 있습니다.

 

소풍 때 즐거운 시간 중의 하나가 장기자랑과 더불어 도시락 먹는 시간입니다. 드디어 교사와 학생이 바뀌는 순간입니다. 교실에서의 주눅 든 모습에서 연륜 많은 어머니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습니다. 정성껏 준비해온 갖은 음식 앞에서, 열심히 노는 모습의 열정 앞에서, 교사가 아닌 딸 같은 마음이 됩니다.

 

소풍을 오기 며칠 전부터 교실은 이미 소풍이 시작되었습니다. 준비로 술렁술렁 했죠. 공부하는 중에도 틈틈이 소풍을 생각하면서 의논하던 모습들이 영락없는 중고등학교 교실 같았습니다.

 

"자자, 우리 반은 이쪽으로 앉으면 되겠다" 해서 보니 그늘 없는 햇볕 속입니다. 그러나 "거기는 너무 뜨겁다"는 일부 성화에 그늘로 옮깁니다. "가을 햇볕이 보약이여, 우리처럼 나이든 사람들은 햇볕을 쬐야혀" "하모" "가을 햇볕이 얼마나 좋으면 봄 햇볕에는 며느리를 내보내고 가을 햇볕에는 딸을 내보낸다고 하잖여" "시엄씨들 나쁘네" 한마디씩들 합니다. 모두 누구의 시어머니가 되어 있으실 연세지만 잠시 현실을 잊고 소풍 온 학생이 되어 버립니다.

 

 

"어이, 자네, 오늘은 시어머니 생각은 잊고 열심히 먹고 노소." 우리 반에서 조금 젊은 축에 드는 어머니는 아직 시집살이를 합니다. 그것이 걱정이 되는 형님뻘 어머니들이 다독여 줍니다. "선상님 이 술 쫌만 맛봐 봐요" 색깔이 까맣습니다. "내가 무슨 열매로 담근 것인데, 무슨 열매인지 생각이 안 나네, 아무튼지 약술이니까, 자자, 한 잔씩 돌아가면서 받으라구"

무슨 열매로 담근 것인지도 모르는 까만색의 술이었지만, 소주 맛보다 좋았습니다.

 

"가만, 이것은 돼지 껍질인데, 쩌짝에 앉아 있는 선상님이 잘 먹어서 내가 올 해 또 해왔지." 지난번 소풍 때 어느 교사가 잘 먹었었나 봅니다. 잊지 않고 또 해왔습니다.

 

식사시간이 끝나고 자유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마음 맞는 친구끼리 삼삼오오 산책길에 나섰습니다. 다음은 소풍의 백미인 장기자랑에 들어갔습니다. 어느 반이 잘하고 못하고를 따지지 않습니다. 대표 어머니가 노래를 하면 그 반의 교사와 반 어머니들은 백댄서가 되어 함께 춤을 춥니다.

 

어머니들은 한껏 '끼'를 발산합니다. 어머니들은 그동안 한글을 모르고 사셨기에, 노래는 오로지 들어서 깨우치신 분들입니다. 그러니 노래방 기계가 없어도 잘 부릅니다. 노래방 기계 세대인 교사들이 따라 가지 못합니다. 음정, 박자도 훌륭합니다. 악보는 볼 줄 몰라도 노래만큼은 어느 가수들 못지 않습니다. 춤 또한 개성 있게 춥니다. 노래와 춤이 따로 놀아도 상관 없습니다. 교사들의 인도에 따라 질서를 지키면서, 어린 학생처럼 놀고 좋아합니다. 청풍호수 근처가 잠시 떠들썩합니다.

 

 

제천에도 서울의 어머니들처럼 늦깎이로 한글을 배우고 있는 학교가 있습니다. 제천 '솔뫼학교'지요. 공간은 달라도 같은 뜻으로 모인 사람들은 금방 친해집니다. 제천으로 소풍 나온 서울학교의 학생들을 위해 방문을 했습니다. 서로 소개도 오가고, '환영해 주어 고맙다고 떡을 받으시오', 하니 '우리고장에 와주어 고맙다는 답례로 수지침 볼펜을 받으시오' 하며 선물도 조촐히 마련을 해서 주고 받았습니다.

 

솔뫼학교에서 오신 분이 노래를 했습니다. '사랑은 장난이 아니야'를 개사해서 '한글은 장난이 아니야 한글은 장난이 아니야 노력인 거야~' 노래장단은 즐거운데 늦은 나이에 배우는 고충들이 서로 통해서 잠시 눈시울들을 적십니다.

 

이제 공식적인 소풍일정을 끝내고 모두 차에 올랐습니다. 막바지 놀이가 시작됩니다. 아쉬움을 차속에서 마저 풀어야지요. 비록 달리는 차속이지만, 기사분의 걱정도 듣지만, 일어나 춤을 추시려는 어머니들을 말리고 싶지 않습니다. 아니 교사들도 함께 춥니다.

 

"어머니들, 잘들 노셨죠?" "야" "한 분도 다치지 않으시고 이렇게 기분 좋게 서울로 올라갈 수 있어서 저도 좋아요. 그런데 차 안에서 잘못하다가 다치시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끝까지 조심하셔야 해요." 교감선생의 말에 모두들 "아, 우리들도 잘 알제, 걱정 마소" 합니다. 피곤하지도 않으신지 서너 시간을 달려오는 차 속에서도 노래가 끊이지 않습니다.

 

어머니들의 표정을 보니 모두가 즐거워 보입니다. 이렇게 다녀온 가을소풍이, 어머니들 마음 속에 흡족하게 남아 좋은 추억의 시간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태그:#마들여성학교 가을소풍, #청풍문화재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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