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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인 10월 26일 민주주의를 향한 항쟁이 있었고, 대통령이 암살되었으며, 보수당이 선거에서 승리했다. 헝가리와 한국, 영국에서 있었던 일이다.

누가 역사를 재미없다고 하는가? 이 역사 속의 오늘을 지나는 여정의 한가운데에서 우리는 부다페스트의 시민들과 박정희와 처칠을 만난다. 인간이 사는 이야기보다 더 재미있는 것은 없다.

1956년 헝가리 10월 혁명, 반소 항쟁 시위

항쟁의 배경은?
헝가리는 그동안 과거 스탈린주의에서 벗어나 헝가리 고유의 사회주의의 길을 채택하려고 했는데, 1956년 7월에 강경파인 에르노 게로가 헝가리 노동당 총서기로 임명되자, 헝가리에는 긴장이 고조된다.

시위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시민들의 반소 항쟁 시위는 10월 23일 토요일에 시작되었고, 학생과 노동자 10만여명이
부다페스트 거리에 모여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경찰이 발포하고 시위대가 해산을 거부하자, 헝가리 노동당 강경파 에르노 게로 총서기는 소련 탱크의 진압을 명령한다. 이 반소 항쟁은 헝가리 10월 혁명으로 알려지게 된다.

임레 나기 헝가리 총리는 자유주의 정책으로 1년 전에 해임되었으나, 이틀 전 공산당 중앙 위원회는 그를 총리로 임명하여 시위를 잠재우고 폭동을 중단할 것을 모색하게 된다. 나기 총리는 10월 26일 오늘 시위대와 소련군의 충돌에 대해 평온을 요구하며, 경제 개혁과 소련군 철수를 약속했다.

시위 과정은 어떠했는가?
소련군 탱크는 시위 군중에게 무작위로 발포하여, 수천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사망자는 2000명에서 5000명 사이로 추정된다. 비무장 시위대는 물러나길 거부하여 결국 마지막에는 탱크가 물러나게 된다.

시위대와 소련군 탱크의 충돌은 부다페스트의 노동자 거주지역인 체펠과 소록사르 지역에서 계속 되고 있으며, 소련군 탱크는 주택을 향해 발포하고 있다. 정부와 당은 방송을 통해 평온과 질서를 되찾을 것을 요청하고 있으며, 시민들에게 아침 11시와 오후 4시 사이에 거리로 나올 경우 발포한다고 경고했다. 주류 금지 조치는 엄격히 지속되며 사람들은 빵을 얻기 위해 길게 줄을 서 있다.

소련 탱크는 철수했는가?
10월 30일에 소련군 병력은 부다페스트에서 철수하기 시작했고, 헝가리에서 완전 철수하기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나기 총리는 자유 선거를 실시하고 다당제로 돌아올 것을 약속했고, 또한 바르샤바 조약에서 탈퇴할 것을 발표했다.

그러나, 소련군 탱크가 11월 4일에 다시 부다페스트 거리에 들어왔고, 나기 총리의 정부는 전복되었으며, 1958년에 나기 총리는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그 뒤 헝가리는 어떻게 되었는가?
그뒤 나기 총리를 배신했던 야노스 카다르가 집권하여 30년 동안 통치했으며, 이른바 반혁명주의자들에 대한 전쟁을 선언하여, 그 결과 20만명에 달하는 헝가리 사람들이 헝가리를 떠나게 된다. 결국 산업은 쇠퇴하고, 반정부 운동이 일어나, 1989년에 카다르는 쫒겨나게 된다.

1979년 한국 대통령 암살

1979년 10월 26일 오늘 박정희 한국 대통령은 김재규 정보 부장이 "우발적으로" 쏜 총을 맞고 사망한다. 대통령의 경호원을 비롯한 다른 5명도 총을 맞고 사망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누구인가?
박정희는 1961년에 쿠데타로 대통령이 되었으며, 철권 통치를 했는데, 이것을 북한의 침략 위협이 상존한다는 이유로 정당화했다. 그는 이미 암살 시도에 한번 살아남은 적이 있는데, 1974년 8월에 연설 도중 그를 향해 총탄이 연속으로 발사되었는데, 그는 피했고 그 중 한 발에 영부인이 맞고 사망한다.

암살의 배경은?
대통령과 김재규 부장 사이에는 야당 정치인들에 대해 강경한 정책이냐 온건한 정책이냐를 놓고 오랫동안 갈등이 있었다. 이 사건은 김재규 부장이 쿠데타를 모의한 것으로, 정보부 요원들이 김재규의 계획을 듣고 대통령의 경호원들에게 총을 쏜 것으로 알려졌다.

암살은 어떻게 일어났는가?
사건은 한국 중앙 정보부의 본부에서 저녁 식사를 하던 도중 일어났다. 한국 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김재규 정보부장과 대통령의 경호원인 차지철 사이에 다툼이 있었고, 이를 말리려던 박정희 대통령에게 김재규 부장이 총을 쏜 것으로 알려졌다. 김재규는 먼저 대통령의 경호원에게 총을 쏘았고, 그 다음에 대통령에게 총을 두 발 쏘았다. 대통령은 근처의 군 병원으로 옮겨진 뒤 사망했다.

정부의 대책은 어떠했는가?
내각은 긴급 회의를 열어 최규하 총리를 대통령 직무 대행으로 임명하고, 전국에 계엄령이 내려졌다. 군 총 책임자인 정승화 장군은 계엄령 총 지휘자로 임명되어 야간 통행금지를 명령하고, 전국에 모든 시위를 금지한다.

그 뒤 어떻게 되었나?
대통령의 운구 행렬이 국립 묘지로 가는 동안 시민 2백만명 이상이 거리에 나와 추모했
다. 김재규와 다른 중앙정보부 요원 4명은 재판을 받고 대통령 및 경호원 살인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1951년 영국 총선에서 처칠 승리

1951년 오늘 영국의 총선에서 보수당이 근소한 다수로 승리하여 윈스턴 처칠이 두번째 임기로 총리직을 맡게 된다.

선거 결과는 어떠했는가?
전날 밤에 나온 첫번째 투표 결과에서는 노동당이 앞섰으나, 이날 이른 오후에는 보수당이 득표수에서 앞질렀다. 선거운동 5주간의 여론 조사에서는 보수당이 다수 표를 얻을 것으로 예측되었는데, 표차가 예상보다 크지 않아 보수당은 다소 실망한다.

이번 선거의 쟁점은 무엇이었는가?
선거의 주요 이슈는 생활 물가 상승, 주택 문제와 전후로 계속된 고비용의 재무장 계획이었다. 노동당은 처칠을 전쟁광이라고 몰아붙였으나, 대신 유권자들은 강하고 자유로운 영국을 창조하겠다는 보수당에 표를 던졌다.

선거 운동 내내 처칠은 정당 간의 차이를 넘어 넓게 아우르는 정부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내각에 최대한 넓은 정치적 성향을 범위로 하는 장관들을 임명하겠다고 약속했다.

처칠의 당선 소감은?
처칠은 런던 근교 에섹스의 우드퍼드 선거구에서 당선되었고, 소감을 이렇게 밝혔다. "우리는 모두, 제가 보기에, 공통점이 많습니다. 그리고 지금 정당 간의 투쟁에도 고요가 찾아들었으므로, 이제 우리는 상대 당의 장점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상대 당의 모든 단점을 찾아내는 데에만 골몰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최종 선거 결과는?
최종 결과는 보수당 321석, 노동당 295석, 자유당 6석, 기타 3석이었다. 보수당은 다른 당 의석을 전부 합친 수와 단지 17석 차이로 다수당이 되었다. 새로운 의회는 10월 31일 수요일에 출범하며, 의회의 공식 개회는 11월 6일에 있을 예정이다.

처칠의 정치 인생은 어떠했는가?
윈스턴 처칠은 1900년에 보수당 의원으로 정치 인생을 시작하고, 보수당에 실망하여 1906년에 자유당에 입당한다. 1차대전에 해군에서 활약하며, 바로 그 뒤에 당을 바꾸어 1924년에 보수당에 다시 입당한다.

처칠은 예전의 오토만 제국이었던 중동의 땅을 식민지로 삼아 1932년에 오늘날의 이라크를 만든 사람이다. 또한 1920년에 쿠르드족의 국가인 쿠르디스탄을 창설하겠다고 약속했다가 1923년에 이를 번복하여 쿠르드족 거주 지역에 겨자 가스 살포를 명령한다. 명연설가로 1940년 5월에 총리가 되었고 1945년 선거에서 노동당이 승리하면서 물러난 뒤, 1951년 선거에서 77세의 나이로 다시 총리가 된다.

그뒤 처칠은 무엇을 했는가?
1953년에 처칠은 나라에 대한 봉사로 여왕으로부터 작위를 수여받게 된다. 또한 같은 해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다. 그는 81세 되던 1955년에 건강 악화로 총리직에서 사임했으나 1964년까지 의원직은 유지한다. 1965년 1월 24일에 하잇팍코너에 있는 그의 집에서 90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1월 30일 그의 장례식은 20세기 들어 영국 정치인 최초의 국장으로 치루어졌다.

2002년에 윈스턴 처칠은 1백만명 이상이 참여한 BBC 전국 여론 조사에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영국인으로 뽑혔다.

어떤 맥락으로 봐야 하는가?

자유를 찾으려는 헝가리 사람들은 소련 탱크의 압제에도 굴하지 않고 거리에서 맞섰다. 인간에게는 자유를 찾으려는 본능이 있나보다. 살기 좋은 나라의 첫번째 조건은 자유로운 삶이다.

권력 내부 다툼으로 군부 대통령이 암살된 한국은 아직도 군부 독재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살기 좋은 나라의 첫번째 조건은 자유로운 삶이다.

윈스턴 처칠은 영국 총선에서 당선하여 두번째로 총리직을 맡는다. 정당간의 차이를 아우르는 정치를 역설하며 공통점을 강조한다. 모두 똑같은 인간의 자유를 향한 투쟁이 아니었는가?

덧붙이는 글 | 해외 뉴스를 국내 뉴스처럼, 국내 뉴스를 해외 뉴스처럼.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인류학에서 배운 것.



태그:#반소 항쟁, #박정희, #처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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