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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울로 코엘료와 김남희의 글을 촉진제 삼아 국내에 '산티아고 길'이 알려진 것 불과 몇 년 전이다. 그럼에도 산티아고 길은 놀라울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그곳은 순례길이건만, 도보 여행가들의 낭만적인 장소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런데 일본에도 그와 비슷한 길이 있다면 어떨까? 알려지지 않았을 뿐, 일본에도 있다고 한다. 김지영의 <남자한테 차여서 시코쿠라니>를 보고 있으면 그러한 순례길이 먼 유럽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일본에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길의 이름은 시코쿠 순례길이다. 일본 진언종의 창시자 코보대사가 걸은 길에서 유래됐으며 일반적으로 그 길에 있는 88개의 사찰을 걷는 것을 의미한다. 이 길은 일본의 네 개 섬 중 가장 작은 섬인 시코쿠에 있는데 그 길이가 약 1,200km다. 성인이 하루에 24km를 걷는다고 한다면 한 달하고도 보름 이상을 걸어야 하는 길이다.

 

저자가 그 길에 가게 된 건 '방황'이라는 걸 하고 있을 때였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그녀였지만, 세상은 그녀를 불러주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일본에 있던 그녀는 시코쿠 순례길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녀의 결정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는 그 길을 다큐멘터리로 촬영하겠다는 생각을 하며 여정에 오른다. 그것이 낯선 길을 알려주는 계기였다.

 

산티아고 길에는 노란색 화살표가 있어 길을 알려준다. 시코쿠 순례길도 마찬가지. 빨간 화살표가 있다. 저자는 그 길을 따라 걷는다. 요즘 '걷기'는 낭만적으로 여겨지는 감이 없지 않은데, 그것은 굉장히 힘든 일이다. 굳이 상상하지 않아도, 남의 나라에서 홀로 걷는다는 건 힘들고 또한 외로운 일이다.

 

그럼에도 저자는 잘 걸었다. 체력이 좋아서일까? 아니다. 그 길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단지 풍경이 아름답다는 의미가 아니다. 응원해주는 사람들과 그 길을 걷는 사람들의 마음이 모여 만든 아름다움이다.

 

일본에서 그 길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그렇기에 그들은 어느 나라 사람이든 간에 상관치 않고 친절하게 대해준다. 길 가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며 격려해주기도 하고 쉬었다 가라며 자리를 마련해주기도 한다. 한 두 번의 사례가 아니다. <남자한테 차여서 시코쿠라니>를 따라 순례길을 보고 있으면 그런 광경을 자주 볼 수 있다.

 

이것은 익숙한 풍경은 아니다. 그렇게까지 타지인들을 챙겨주는 경우는 드물다. 그런데 시코쿠 순례에서 그런 풍경이 자주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풍습이자 전통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당장 순례를 할 수 없는 나를 대신해 순례를 해달라"는 의미로 순례자들에게 친절하게 대한다. '오셋다이(お接待. 대접)'를 중히 여긴다. 자식들에게 그러한 오셋다이를 알려줄 정도라니 하니 가히 전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대접을 받으며, 그 길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누는 우정은 어떤가. 서로를 격려하는 그 모습은 오셋다이만큼이나 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힘을 준다.

 

그래서일까. 그 길은 그 어떤 길보다 아름답게 여겨진다. 아름다운 사람들과 아름다운 마음이 있기에, 길이 아름다워지는 게다. 도보 여행하려는 사람들이 걷기에 가장 좋은 조건을 지닌 셈이다.

 

길을 걸은 저자의 경험담을 듣다보면 가슴이 울컥해진다. 동경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저자가 부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저자가 그랬듯, 그 길로 떠나고픈 충동 같은 것이 생기는 것도 어쩔 수 없다. <남자한테 차여서 시코쿠라니>는 언젠가 떠나고픈 사람의 가슴을 단단히 흔드는 책인 셈이다.


남자한테 차여서 시코쿠라니 - 서른 살 오핸로 혼자 걷는 1,400km

김지영 지음, 책세상(2009)


태그:#시코쿠 순롓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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