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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마감 때문에 한창 바쁜 월말, 언제나 그랬듯이 그날도 정신이 없었다. 전화 받으랴, 팩스 받으랴, 메신저 응대하랴. 다들 왜 그리 요구하는 것이 많은지 원.

 

그런데 갑자기 노박사님께서 메신저를 통해 말을 걸어 오셨다. 대학원 때 조교로 일했던 연구소에서 연을 맺은 노박사님. 비록 아주 가까이에서 함께 일은 하지 못했지만 북한학을 공부하면서 음으로 양으로, 그리고 심정적으로 항상 고마워하던 바로 그 분이 말을 걸어오신 것이다.

 

노박사 : ??

기  자 : ?

노박사 : 뭐해?

기  자 : 안녕하세요. 박사님

노박사 : 안녕요. 일해요?

기  자 : 네 일하죠. ^^;;

 

당장 이때부터 당황스러웠다. 박사님이 내게 일을 하냐고 물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공부 계속 하냐고 물었으면 의심하지 않았을 것을. 단 세 마디에 이것이 그 유명한 메신저 피싱임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당장 대화를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그들을 붙잡아 두고 신고를 하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노박사 : 점심은 드셨어요?

기  자 : 물론 먹었습니다. 박사님은요?

노박사 : 저도 맛나게 먹었죠. 점심이라고 한가하나 보네요.

기  자 : 뭐. 그렇죠. 어디세요?

노박사 : 사무실이죠. 많이 바쁜가요?

기  자 : 그렇죠 뭐.

노박사 : 아. 부탁 좀 하려고요.

기  자 : 말씀하세요.

노박사 : 제가 이런 부탁 한 번도 못했는데 혹시 300만원만 빌려주세요. 저녁에 갚을께요. 보안카드 안 가지고 와서 그래요.

 

역시 메신저 피싱. 상대방은 너무 일찍 들이댄 듯 하다.

 

 

기  자 : 그럼요. 빌려드려야죠.

노박사 : 지금 되는 건가요?

기  자 : 그럼요. 계좌번호는 예전 그거 쓰면 되는 거죠?

노박사 : 아니요.

기  자 : 아. 바뀌셨어요?

노박사 : 사촌언니한테 보내는 거니까 걱정말구요.

기  자 : 언니요? 박사님께 언니도 있어요?

노박사 : 네.

기  자 : 북한에요?

노박사 : -.-

기  자 : 탈북하셨나요?

노박사 : 아니요.

기  자 : 어라. 그럼 어떻게 내려오신 거래요? 이번에 이산가족 상봉한 건가?

노박사 : 또 있어요.

 

상대방은 분명 당황했을 것이다. 왜 북한 타령인가 싶었겠지. 설마 자신이 해킹한 아이디의 주인이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거라 상상이나 했겠는가.

 

기  자 : 계좌번호 불러주세요.

노박사 : 국민은행 인영심 35040204056277

기  자 : 300이면 되겠어요?

노박사 : 네

기  자 : 저도 돈을 구하려면 시간 좀 있어야 되거든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이때부터 나의 손놀림은 바빠졌다. 우선 노박사님께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려야 했다. 당신의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해킹당했으니 바꾸시라고 말씀드려야했다. 그러나 외국출장을 가셨는지 전화를 받지 않으시는 노박사님.

 

그 다음에 전화를 건 곳은 우선 국민은행이었다. 나와 같은 피해자가 더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내가 메신저로 받은 계좌로 들어온 돈은 모두 인출하지 못하도록 알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랜 대기 끝에 통화하게 된 은행직원은 그와 같은 조치가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했다. 법인즉슨, 내가 사기 당한 금액만큼만 인출 금지가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30원을 입금하든, 300원을 입금하든 딱 그만큼만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기 당한 본인이 넣은 만큼.

 

그럼 방법은 딱 하나. 태어나서 처음으로 경찰에다 전화를 걸었다. 메신저 피싱 신고라고 하니 전화 받은 이는 사이버수사대를 바꿔주었다. 그러나 담당 경찰관의 대응은 미적지근했다. 마치 이와 같은 신고가 항상 있다는 듯 그 어떤 대응도 무의미하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거의 대부분이 대포통장이요, 대포 폰이며, IP 자체도 중국 서버에 둔 것이라며 추적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경찰관의 대답이었다.

 

이렇게 무기력할 수가. 어쨌든 계좌번호도 입수하고 지금 나하고 이렇게 이야기까지 하고 있건만 이 사기꾼을 잡을 수 없다는 것인가. 영화에서 보면 경찰들이 첨단장비를 동원하여 그 네티즌의 소재를 잘도 잡아내더만, 현실에서는 왜 이리 한심한 것인지.

 

경찰과 은행 모두 손을 든 이상 방법은 없었다. 내가 직접적으로 그들과 접선도 할 수 없는 바 포기할 수밖에. 이런 저런 시도에 시간이 꽤 흘렀을까? 갑자기 상대방이 보채기 시작했다.

 

노박사 : 이체 했어요? 급해서.

기  자 : 아뇨. 아직

노박사 : 좀 빨리 해주면 안될까요?

기  자 : 잠시만요.

노박사 : 보냈어요?

기  자 : 지금 좀 바빠서요.

노박사 : 실례인데, 빨리 좀 해주세요. 아직인가요? 언니가 짐 기다리고 있어요.

 

이쯤 되면 그 정체를 들키든 말든 돈을 받아야겠다는 집착만이 남아있었다. 그래도 아까 박사님이라는 호칭까지 썼건만, 어떻게 이렇게 뻔뻔스럽게 돈을 달라고 보채는지. 나의 지루한 응대에 지쳤는지 상대방은 드디어 나가겠다고 선포했다.

 

노박사 : 바쁜가 봐요. 그럼 없던 일로 하고 이만 가볼께요.

기  자 : 잠시만요. 넣었어요. (진짜 넣었다. 30원. '이렇게살지마라'라는 문구와 함께)

노박사 : 보냈어요?

기  자 : 네. 그리고 이런 사기 치지 마세요. 이게 뭡니까.

노박사 : -.- 알겠습니다. 죄송해요.

기  자 : 얼마나 많은 사람이 속을지 모르겠으나 이게 뭡니까.

노박사 : 죄송해요. 수고하세요.

기  자 : 수고는요. 사기 치지 마쇼.

노박사 : 알겠어요. 이만 나가 볼께요.

기  자 : 착하게 사세요.

노박사 : 저기요. 한 가지만 물어 볼께요.

기  자 : ?

노박사 : ㅠ.ㅠ 먹고 살기 힘들어서

기  자 : 몇 살이예요?

노박사 : 20살이예요.

기  자 : 진짜요? 그럼 할 일 많잖아요.

노박사 : 아까 계좌에다 300만원만 넣어주세요.

 

우리의 대화는 여기까지가 끝이었다. 대놓고 돈을 내놓으라고 이야기하는 그들. 아무리 먹고 살기 힘들더라도 이렇게까지 뻔뻔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울 뿐이었다. 과연 이와 같은 범죄도 생계형 범죄 측에 드는 것인지.

 

여담이지만 그 다음날 노박사님은 또다시 내게 말을 걸어왔고, 범인을 잡을 수 없음을 알게 된 난 곧바로 욕지거리를 뱉었다. 한 번 해킹 당한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으면 그 아이디는 계속 해킹 당한다는 뜻이리라.

 

먹고 살아가기 힘든 시대. 결국 범죄의 대상도 역시 서민의 몫인가. 부디 MB의 친서민정책이 성공하여 이런 범죄가 사라지기를.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메신저 피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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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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