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농사꾼들의 분노

 

오늘 오후 우체국을 다녀오면서 주천강 강둑을 거쳐 집으로 돌아오는데 온 들녘이 황금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어제 오늘 청명한 날씨로, 타작하기에 아주 기가 막히도록 좋은 날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들녘 한켠에서는 우리 동네 한 농사꾼이 콤바인으로 벼 베기가 한창이었다.

 

예로부터 한로를 앞둔 이즈음은 "가을에는 부지깽이도 덤벙인다"고 할 정도로 온 들판은 추수하는 사람들로 가득, 농촌은 그야말로 몹시 바쁠 때다. 아울러 농사꾼들의 어깨춤이 절로 나는 매우 흥겨운 계절이었다.

 

봄부터 구슬땀을 흘려 애써 지은 농작물을 거둬들이는 때로 빈 곳간을 가득이 채우거나 추곡 수매장에 내가면 오랜만에 목돈을 쥘 수 있는 기쁨을 한껏 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농사꾼들의 얼굴에는 기쁨보다 분노로 가득 찼다. 쌀값이 해마다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사는 집의 대지는 내 땅이 아니기에 해마다 가을걷이가 끝나면 도지를 주고 있다. 이사올 당시 주인은 전에 살던 사람보다 도지로 닷 말 더 인상하여 쌀 두 가마니 값을 요구했다. 그래서 두 말 않고, 그의 요구대로 주며 지냈다. 대체로 시골에서는 도지로 쌀 몇 가마니 콩 몇 말로 정해져 있는데, 그것은 곡식 값이 물가상승률만큼 오르기 때문에 분쟁을 막기 위한 셈법이었다.

 

내가 이 마을에 내려온 지 그새 여섯 해째다. 첫해는 도지로 쌀 두 가마니 값인 37만원을 줬는데, 해마다 쌀값이 제자리걸음이거나 내려서 지난해는 34만 원을 줬다. 지난해 늦가을 도지를 갖다주자 땅 주인이 쌀값이 내린데 화가 났는지, 올해부터는 도지를 쌀값 연동제로 받지 않고 정액제로 받겠다고 하면서 일방으로 40만 원을 요구했다. 오죽 화가 나면 그럴까 이해는 되지만, 일방으로 인상하는 지주의 횡포에 몹시 화가 났다. 하지만 남의 땅에 도지를 내고 사는 처지라 참고 말았다.

 

그때 내가 그에게 내년에는 쌀값이 오르면 어쩔 거냐고 묻자, 아마도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장담했는데, 그의 예언이 적확히 맞아떨어져 올 쌀값 시세라면 30만 원 이하로 또 내릴 뻔했다. 농사꾼들은 정치인들이 농촌에는 표가 적기에 푸대접한다고, 도시의 일부 계층을 위한 정치를 한다고 아우성이다. 농사를 지어야 가난을 벗어날 수 없으니까 농촌이 자꾸 피폐해지고 있다.

 

집에 가서 카메라를 가지고 나와 혼자서 추수하는 썰렁한 장면을 몇 컷 담고는 동네 농사꾼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그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쌀이 남아돌아 쌀값이 떨어지는 것은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남는 쌀을 주체도 못하면서도 같은 동포는 굶주리고 있는데, 이를 외면하고는 동남아 빈민국을 돕겠다는 정부의 지도자는 도대체 정신이 제대로 바로 박힌 사람인가 나에게 묻는데 대답할 말이 없었다.

 

자존심을 구기지 않게 도와줘야

 

미국에서 뉴욕이산가족찾기 후원회 일을 10여 년 맡아 스무 차례나 북녘 땅을 오갔던 재미 동포 심재호(소설 '상록수' 작가 심훈의 3남)씨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남과 북이 통일하고 남과 북이 평화롭게 살자면, 서로 아픈 곳은 가급적 건드리지 말고, 생색내지 말고 도와줘야 합니다. 남과 북의 동포는 본의 아니게 서로 갚아야 할 빚이 많습니다.

 

통일 이전에 많이 갚을수록 좋습니다. 특히 요즘 북녘 동포들이 식량과 비료, 연료로 고통을 받고 있는데, 남쪽이 조건 없이 도와줘야 합니다.

 

많이 도와줄수록 그만큼 조국 통일과 화해의 길도 단축되지요. 남쪽 일부에서는 '퍼준다'는 식으로 비판하는 모양인데, 아주 한심한 발상입니다. 형제간에 도와주는데, 어찌 그런 말을 합니까? 상대의 자존심을 구기지 않게 몰래 도와줄 때, 그 보상으로 평화가 옵니다.

 

왜 '음덕양보(陰德陽報)'라는 말도 있지요. 남모르게 베풀면 언젠가는 밝게 알려져 그 보답이 돌아오게 마련입니다. 남과 북이 어디 남입니까?"

 

그러면서 분단 이전에도 남쪽은 평야가 많아 쌀이 흔했고, 북쪽은 산악지대가 많아 대신 지하자원이나 청정해역의 북어 정어리 같은 수산물이 매우 흔했다. 그래서 서로 물적 교류로 조화를 이루었는데, 분단으로 그 조화가 깨어져 동족이 더욱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를 마치 강 건너 불구경 하듯, 아니 동족의 고통을 즐기는 듯이 바라보는 태도는 옳지 않다고 말했다.

 

날이 갈수록 더욱 썰렁해지는 농촌 들판을 지나는 나의 마음도 우울하기 짝이 없었다. 우리 농민도 살고, 북녘 동포도 다 함께 사는 법을 두고도, 이를 굳이 외면해야 하는가? 동족이 굶주리는데도 딴 짓거리하는 못된 사람에게는 언젠가 하늘이 벌을 내릴 것이다.  


태그:#추수, #대북쌀지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이 기자의 최신기사"아무에게도 악을 갚지 말라"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