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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서자마자, 길이 막혔다. 신호등 때문이란 집사람의 말에 동의할 수 없었다. 길게 늘어선 자동차 행렬에 방향을 바꾸었다. 아파트 단지를 돌아서 다른 길로 들어섰지만 마찬가지였다. 출발부터 밀리니, 난감하였다. 그러나 다른 도리가 없었다. 다른 길을 택하였어도 막히니, 방법이 없었다. 마음을 느긋하게 가져야 하였다.

고향 향
▲ 성묘 가는 길 고향 향
ⓒ 정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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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과는 달리 얼마 지나지 않아서 길은 뚫렸다. 병목 구간을 넘어서니, 그 많던 자동차들이 사라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방금 전까지만 하여도 가다 서다를 반복하였었다. 그런데 신나게 달릴 수 있으니, 좋았다. 막힘없이 갈 수 있다는 사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인생 사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성묘 가는 길.
어머니 아버지 묘소가 있는 곳은 고창이다. 전주에서 그곳까지 가는 길은 그렇게 멀지 않다. 서두를 이유가 없다. 여유를 가지고 아이들과 함께 다녀올 수 있다. 출발할 때 길을 막혀 잠시 걱정을 하기는 하였지만, 이내 길이 뚫려 다행이었다. 고창에 도착할 때까지 한 번도 쉬지 않고 곧바로 도착할 수 있었다.

읍내에 들어서니, 낯설다는 생각이 앞선다. 고향이니, 정겨운 이미지가 고정되어 있었다. 어디를 보아도 정감이 넘쳐나는 곳이다. 그럼에도 낯선 느낌이 드는 것은 새로 들어선 건물들 때문일까? 아니면 세월 따라 달라진 마음 때문일까? 새로 난 고향의 도로를 달리게 되니, 만감이 교차하였다. 온갖 영상들이 겹쳐지고 있었다.

성실한 삶
▲ 익어가는 감 성실한 삶
ⓒ 정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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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님 묘소에 당도하였다. 푯말이 박혀 있었다. 온천지구로 개발이 되니, 이전하라는 공고였다. 이사를 해야 한다는 일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어머니는 아시는지, 모르는지, 아무 말씀도 없었다. 그동안 집안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상세하게 말씀을 드렸다. 성묘를 마치고 아버지 묘소로 향하였다. 어머님을 아버지 옆으로 모셔야 할 형편이 되었다.

아버님 묘 앞 감나무에는 감들이 주렁주렁 열려 있었다. 매형이 그 동안 애써서 농사를 지은 덕분이었다. 성묘를 마치고, 매형과 조카 그리고 조카사위와 함께 상하 구시포로 향하였다. 은빛 찬란한 바다를 바라보면서 고향 정에 취하였다. 눈에 들어오는 서해 풍광이 마음에 와 닿았다. 매형의 환대에 따뜻한 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매형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렇게 고맙고 감사할 수가 없었다. 왜 진즉 매형의 보살핌에 고마움을 느끼지 못하였는지 이상한 일이었다. 너무 익숙해서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매형의 따뜻한 사랑을 귀한 줄 모르고 살아왔던 것이다. 매형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소홀하게 대하고 있었다. 헤어보니, 한 둘이 아니다.

고마운 사람들
▲ 은 빛 바다 고마운 사람들
ⓒ 정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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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가 고마운 사람들뿐이다. 그 분들의 보살핌으로 살아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들에게 고마움을 알지 못하고 살아왔다. 고마운 마음을 고맙게 여기게 되면 세상이 바뀐다. 바꾸어진 세상을 살게 되면 삶도 달라질 수 있다. 왜 진즉 그것을 몰랐을까? 매형 얼굴을 바라보고 누나 얼굴을 바라보았다.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

돌아오는 길에 보름달이 떴다. 둥근 달을 바라보면서 소원을 빌었다. 감사한 분들에게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기원하였다. 고마운 분들에게 고마움을 알고 감사하면서 살아갔으면 좋겠다. 그렇게 살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디딤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하면서 살아가게 되면 그 것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겠는가? 보름달이 환하였다.<春城>

덧붙이는 글 | 데일리언



태그:#성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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