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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함경북도 길주에 사는 외사촌 남동생한테서 편지가 왔습니다. 반가워서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조심스럽게 봉투를 열었더니 작년 9월에 외삼촌이 돌아가셨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깊은 한과 슬픔이 가슴 가득히 차오르면서 눈물이 끝없이 흘러내립니다.   

 

2007년 북녘땅을 밟았습니다

 

2007년 7월에 나는 큰아들과 함께 엄마랑 아버지가 밤이면 베갯머리 적시며 꿈에도 그리던 북녘땅을 두 주 동안 밟았습니다. 엄마가 자라난 원산 송도원에서 점심을 먹고, 다시 자동차로 네 시간을 달려 흥남 질소비료공장을 지나 아버지가 태어나신 함흥 바닷가, 어느 휴양소에 닿았습니다. 

 

그 곳에서 미리 연락을 받고 길주와 청진에서 오신 외삼촌 부부와 외사촌 동생들, 모두 아홉 식구들과 함께 하룻밤을 보낸 일이 꿈결같기만 합니다. 엄마를 많이 닮은, 비쩍 마르고 조그마한 외삼촌 모습이 처음이자 곧 마지막이 되고 말았군요.   

 

한국전쟁이 나기 이태 전부터 예수를 믿는 아버지 식구들은 할머니랑 고모들, 작은아버지 모두 하나 둘씩 남쪽으로 오셨습니다. 엄마도 먼저 떠나신 아버지한테서 아이들과 함께 오라는 편지를 받고 어느날 밤, 원산 앞바다에서 배를 타고 큰물결을 넘어 오셨습니다. 밤중에 인민군 몰래 오면서 친정 식구들에게는 인사도 못드리고 오신 뒤에 전쟁이 나고 그대로 삼팔선이 막혔으니…. 

 

나는 아주 어렸을 적부터 엄마가 북녘 하늘을 보시며 두고 온 고향땅과 부모 형제들이 그리워 늘 눈물 흘리시는 모습을 보면서 자라났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한숨과 함께 엄마 가슴 속에 채곡채곡 쌓이는 한은 오롯이 내게로 대물림이 되고 있었지요. 엄마의 눈물을 닦아 드릴 힘이 조금도 없는 우리 자식들은 "엄마, 사랑하는 남편과 자식들이 엄마 옆에 있고 이제는 손자손녀들이 주렁주렁 있는데도 아직도 그렇게 못 잊겠어요?"하면서 안타까운 눈물을 함께 흘린 적이 어디 한 두 번이었겠습니까?  

 

그러다가 1990년 범민족통일음악회가 평양에서 열릴 때 아버지와 엄마는 뉴욕 브룩클린 한인교회에 같이 다니는 음악가 집사님 주선으로 범민족통일음악회 후원회원이 되어 마흔해 만에 두 주 동안 고향땅을 밟으셨습니다.   

 

만나 보니 남동생 넷 가운데 하나는 한국전쟁통에 죽고 막내동생은 바닷가에 고기 잡으러 나갔다가 없어졌답니다. 그렇게 아들 둘을 잃고 외동딸은 남쪽으로 가서 소식이 끊겼으니 깊은 시름속에 사시던 부모님도 전쟁이 끝난 1953년에 한많은 세상을 떠나셨다고 합니다. 이 세상에 계시지도 않은 부모님과 동생들을 그렇게 못잊어 하며 피맺힌 마흔해 세월을 눈물로 보내셨다니요!

 

엄마와 아버지는 청진에 남아있는 두 동생이 사는 집에 가셔서 사는 모습을 보고, 부모님 산소도 찾아가 마흔 해 동안 저지른 불효를 아뢰고 통곡하면서 땅을 두드리셨습니다. 헤어져 돌아설 때에 외삼촌들과 그 식구들도 기차를 붙들고 "누나, 많지도 않은 우리 남매 사이를 누가 갈라 놓았소?"하며 통곡을 하셨습니다.   

 

"엄마, 늦기 전에 한번 더 다녀오시지요"

 

그 뒤에도 10년이 지나는 동안 큰외삼촌이 돌아가셨다는 편지가 오고  남은 식구들이 '고난의 행군'을 이겨 내느라고 어렵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그러는 동안 엄마도 많이 늙으시고 흰머리는 성성하셨습니다. 

 

"엄마,  더 늙기 전에 한 번 더 다녀 오시지요." 

 

어느 날 내가 말씀을 드렸더니 "한 번으로 됐다. 한 번도 못 가고 눈감는 많은 이산가족들한테 미안하지. 이만하면 나는 복이 많지. 아들이 돈을 주어 가서 보고 왔으니 평생 한은 풀었다. 갈 차비가 있으면 좀 부쳐 주었으면 좋겠다" 하셨습니다.  

 

"네, 엄마!  알아봐서 부칠 테니까 걱정 마셔요."  

 

그리고 돌아가시기 한 해 앞서인 2000년쯤 "엄마, 외삼촌과 사촌동생들 이름을 다 적어 주셔요. 외삼촌한테서 온 편지도 다 나한테 주셔요. 엄마가 돌아가신 뒤에라도 통일이 되면 가서 찾아야지요"했더니 엄마는 내 말에 눈물까지 흘리십니다.

 

"고맙다. 그렇게 말해 주니 참말 고맙다. 그래, 이제는 눈감고 죽겠구나." 

"엄마, 엄마 일이 내 일인데 뭐가 고마워요? 꼭 남같이 말씀을 하시네요. 섭섭하게시리. 엄마한테 동생이면 나한테는 외삼촌인데…"   

 

2004년, 큰아들이 평양에 가서 내 외사촌 동생 부부를 만나고 식구들 소식과 사진을 한아름 안고 왔습니다. 그동안 편지와 사진이 오고 간 덕분에 한 눈에 서로 알아보고 눈물바람을 했다지요. 그 사촌 여동생은 "고모와 고모부가 세상을 떠나셨으니 얼굴도 모르는 사촌들이야 시간이 흐르면 거저 끊어 지겠구나 하며 안타까와 했는데 이렇게 찾아주니 고맙다"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이모, 다음 해에는 엄마를 모시고 다시 올게요. 그때까지 외삼촌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건강히 계셔요."   

 

큰아이가 가져온 사진을 보니 엄마 생각이 나서 눈물이 저절로 났습니다.

 

"고맙다. 얘야! 네가 이렇게 나서서 도와주어 참말로 고맙구나."

"엄마, 엄마 일이 곧 우리 일이잖아요. 뭐가 고마워요. 할머니 일, 엄마 일이 모두 우리 민족이 풀어야 할 일이잖아요. 할머니 대에서 끊어지고 우리가 잊어 버리면 통일을 왜 하려고 하겠어요?"  

 

그리고 다음 해에 간다던 약속이 해마다 늦춰지다가 드디어 2007년에 아들과 나는 가서, 외삼촌과 숙모, 그리고 사촌들과 함께 엄마 아버지와 친척들 이야기꽃을 피우며 울고 웃고 노래부르며 밤을 지새우고 이튿날 아침, 큰소리로 통곡하는 북녘땅 식구들을 뒤로 하고 돌아왔습니다.  

 

더 늦기 전에

 

한국에서는 한가위 남북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열렸습니다. 그 분들을 보니 나는 차마 눈물이 앞을 가려서 뉴스를 못보겠습니다. 이산가족 2세로서 흰머리가 성성한 어른신들 앞서 상봉을 하고 온 나는 죄송한 마음이 들 뿐입니다.

 

아흔살, 백살이 되시도록 생떼 같은 남편을, 자식을 가슴에 품은 채 어떻게 살아들 오셨을까요? 죽어도 잊지 못하는 사랑하는 식구들을 누가, 무엇이 갈아 놓았는가요? 도대체 국가가 무엇이기에, 이념이 무엇이기에…. 피붙이들이 함께 사는 일보다 더한 가치가 무엇이길래  나라의 주인인 국민들을 이렇게 울리고 있을까요?  

 

이산가족 상봉 대기자 12만7천 가운데 벌써 4만명이 세상을 떠나셨답니다. 한달에 2천에서 3천 분들이 돌아가셨는데 요즈음에는 한 달에 4천에서 5천 분 되는 어르신들이 돌아가시고 있답니다. 점점 늙어가시니까 점점 빨라지지요. 시간이 없습니다. 

덧붙이는 글 | 신정란 기자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태그:#이산가족, #대물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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