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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홍길동전>의 작가, 조선중기 문신 겸 소설가인 허균이 능지처참으로 죽음을 맞았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가 않다. 또한, 역사에서 허균을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아는 이는 많지가 않다.

 

허균 vs 노무현

 

 

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0년 9월 6일에는 허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역적의 우두머리 허균은 성품이 사납고 행실이 개돼지와 같았다.

    윤리를 어지럽히고 음란을 자행하여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전연 없었으며,

    윤기를 멸시하고 상례를 폐지하여 스스로 자식의 도리를 끊었다. "

 

왜 역사는 가혹하리만큼 그에게 악평만을 쏟아내고 있을까.

 

허균은 성리학이 아니면 이단으로 취급받던 조선시대 승려들과 허물없이 어울렸다. 특히, 임진왜란 때 승병을 일으켜 공을 세웠던 사명당이 열반하였을 땐 그의 비문을 직접 썼을 만큼 사명당과는 각별한 사이였다. 사신의 자격으로 다녀온 중국에서 서학인 천주교를 접하였고 4천여 권의 책도 구입, 탐닉하였다. 또한 서얼 출신의 친구들과 그의 식솔들을 직접 거둬 뒷바라지를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승려와 허물없이 어울리는 행동, 서학을 접하고 서얼 친구들과 어울렸던 허균의 행동은 유교사회인 조선에 곱게 보일 리 만무하였다. 이를 반영하듯 당대 최고의 지성인으로 불렸던 허균이지만 20여 년의 관직생활 동안 3번의 유배와 6번의 파직을 당할 만큼 허균은 조선과는 맞지 않는 시대를 앞선 인물이었다.

 

이러한 허균의 자유분방한 행적은 조선시대 피지배 계층들에게 많은 공감과 지지를 얻을 수 있었지만 조정 대신들과 기득권 세력들에게 허균은 그저 눈엣가시 같은 몹시도 불편한 존재일 뿐이였다. 결국 허균은 역모의 주동자로 지목되어 투옥되고 세 번의 반복 심리가 이루어져야 하는 삼복계, 사형 집행에 앞서 반드시 받아야 할 죄인의 자백도 없이 그의 형은 일사천리로 집행되었다.

 

허균의 투옥 사실이 알려지자 성균관의 유생들은 상소를 올리며 반대를 했고 하부계층들 또한 그러한 움직임에 주축이 되었다. 허균의 사후에도 그를 따르는 민중은 많았다. 그를 따르던 민중들은 계속해서 잡혀 들어가거나 귀향 또는 고문 끝에 죽임을 당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퇴임 후, 촌부로 살던 노무현은 2009년 5월 23일 한통의 유서를 남긴다.

 

  "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일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집이 될 일밖에 없다. "

 

오연호 기자의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에서는 임기 말, 레임덕에 시달리는 권력의 수장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그는 당당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게 당당했던 그는 왜 그 새벽, 봉화산을 오를 수밖에 없었을까.

 

미국에 처음 가봤다던 대통령, 보수언론과 인터뷰 한 번 하지 않았던 대통령, 그 흔한 대학 간판 없는 고졸 대통령, 독학으로 사법고시에 합격해 연수원에 들어가지만 연수원 교수들에게 '상고 출신 노무현'으로 불렸던 대통령. 그들이 나름 정한 룰과 코스를 밟지 않고 그야말로 아닌 밤중에 홍두깨처럼 불연 듯 나타나 전혀 고급스럽지 못했던 그는 보수언론과 기득권층에게 인정하기 조차 싫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그래서 임기 내내 그를 깎아내리고 괴롭혔던 보수언론과 기득권층의 행태는 임기 후에도 그칠 줄을 몰랐다.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 부산에서 3차례 총선과 시장선거에 나섰으나 고배를 맞았지만 '바보'라는 스스로에게 만족스런 별명을 얻었던 모습, 검찰 내부에서 조차 '심했다' 라는 소리가 나올 만큼 수사 진행 상황을 하루하루 은밀히 언론에 누출했던 검찰의 치졸한 행태에 맞서며 자신의 무죄를 증명할 수 있는 삼심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자신의 목숨만큼 소중 했던 도덕성에 치명타를 얻은 그는 그렇게 그 새벽, 봉화산으로 올라야했던 그의 뒷모습에서 허균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를 따랐던 민중들의 모습도 닮아있다. 그를 추모하기 위한 분향소는 보수단체에 의해 훼손되고 그를 기리고자 했던 촛불집회는 경찰차벽에 둘러싸여 방해 받기 일쑤였으며 그의 마지막 길을 추억하고자 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의 추모사는 결국 무산되고 말았다.

 

홍길동 vs 노무현

 

율도국을 꿈꿨던 홍길동은 신출귀몰, 동에서 번쩍 서에서 번쩍하는 도무지 그 행적을 종잡을 수 없었던 인물로 소설 속에 묘사되고 있다.

 

스스로 자만했다고 말한 대연정 수류탄, 잘못된 선택이였지만 불가피 했다던 이라크 파병, 참여정부 장관을 지냈던 인사들조차 단식을 하면서까지 반대했던 한미 FTA 체결과 재신임 그리고 절대 잊을 수 없는 탄핵과 촛불까지 어쩔땐 그의 지지자들의 등을 돌리게 만들더니 또 어쩔땐 그와 앙숙이었던 조중동에게까지 박수를 받았던 노무현의 그야말로 신출귀몰한 정치적 행보였다.

 

 

전직 대통령 중 유일하게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왔던 대통령, 그런 대통령을 보수언론들은 전 대통령들의 사저와 비교하며 어마어마한 혈세가 들어갔다는둥 또 다른 정치적 야욕을 갖고 있다는 둥 왜곡시켰다.

 

노무현은 봉하마을에 그들말처럼 그저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율도국을 세우려고 했던 게 아니다. 그가 세우려고 했던 율도국은 아마도 그 어떤 누구도 아무런 제약없이 자신의 의견을 공유할 수 있던 인터넷 웹사이트 '사람사는 세상'과 '민주주의 2.0'이 아니었을까.

 

허균의 성소부부고와 노무현의 정치학

 

허균의 자신의 문집인 <성소부부고> 마지막에 '호민론'을 주장한다. 호민론이란 하늘 아래 두려워할 자는 왕이 아닌 백성이며 백성을 3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다고 했다.

 

관리가 시키는 대로만 하는 향민과 세상을 원망만 하는 원민 그리고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행동으로 나서는 호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 중 가장 두려운 자는 호민인데 호민은 잠자는 민중을 이끄는 지배자로 임금과 지배세력이 백성을 업신여기면 호민이 앞장서 원민과 향민을 선동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초래할 것이라고 허균은 경고하고 있다.

 

오연호 기자의 <노무현, 마지막 인터뷰>에서 노무현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 정치권력이 만능이 아닌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정치권력을 최고 정점으로 생각하고,

    정치권력 지상주의를 가지고 있어요. '거기(대통령) 끝나면 그만두어야지.'

    그러는데, 정치권력이 최종 종점이 아니라는 것이죠. "

 

  " 정치권력은 하나의 권력일 뿐이고, 하나의 과정일 뿐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권력은 시민들의 머릿속에 있어요. 진정한 의미에서. " 

 

정치권력은 최고의 정점이 아니며 진정한 의미에서의 권력은 시민의 머릿속에 있다는 노무현의 말은 가장 두려워할 존재는 왕이 아닌 백성이며 그 백성들 중에 깨어있는 '시민의식' 호민이 가장 두려운 존재라는 허균의 말과 일맥상통 한다. 

 

율도국을 꿈꿨던 홍길동, 호민 노무현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다' 누군가 말했다. <성소부부고>와 <홍길동전>이 쓰여진지 약 400여년, 10년에 한 번씩 바뀌는 강산이 수십 번도 더 바뀔 만큼 세월이 지났지만 호민론과 율도국으로 이어지는 허균의 개혁 사상과 그를 시기하는 세력에 의해 죽음을 맞이했던 허균의 모습이 마치 눈앞에 펼쳐지는 듯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진정한 권력으로 돌아간다는 노무현. 허균이 말한 호민, 사람 사는 세상 율도국을 꿈꿨던 홍길동이 바로 노무현이 아니었을까.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개인블로그 (http://blog.naver.com/ygmature)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노무현, #허균, #홍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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