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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골아이들의 거침없는 지적에 당황하는 김근태 화백
 산골아이들의 거침없는 지적에 당황하는 김근태 화백
ⓒ 김대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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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일장 대회를 휩쓰는 시골학교 아이들

전교생 22명. 무안군 승달산 자락의 시골학교 청계남초등학교. 나는 3년차 논술선생님이다. 출판된 교재에 의존하던 첫해는 편했다. 따로 수업을 준비할 필요가 없이 수학문제 푸는 것처럼 글쓰기 공식을 가르쳐 주고 거기에 글을 집어넣으면 됐으니까. 시골아이들은 각종 백일장대회에서 대상, 최우수상을 휩쓸었다. 대회가 다가오면 글재주 있는 아이들을 따로 뽑아 예상 글감에 예행연습을 시켰다.

나는 어느새 능력 있는 논술선생님이 되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수업시간에 졸기 시작했다. 글쓰기는 따분하고 재미없는 과목이 되었다. 나도 싫증나고 재미없어지기 시작했다. 놀면서 하는 글쓰기는 없을까 고민하던 나는 교재를 과감하게 버리기로 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교실 밖으로 나갔다. 봄볕이 눈부시게 빛났다. 관찰기록문 쓰기. 아이들은 개나리, 유채꽃, 동백꽃, 대나무 등등 자신이 좋아하는 식물을 골라 세밀하게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다음 시간엔 윷놀이를 했다. 끝말잇기 대회를 열어 1등한 아이들에게 책을 선물했다. 즉흥연극하기, 노래 듣고 동시 쓰기, 동시 듣고 그림그리기, 그림보고 산문쓰기 등등 아이들은 즐거워했고 더 이상 백일장대회에서 상을 받지 못하게 됐다.

방심했다가 긴장해 아이들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는 화가
▲ 요놈들 긴장되네. 방심했다가 긴장해 아이들 이야기를 진지하게 경청하는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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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아이들이 유난히 재미있어 하는 그림읽기 수업시간이다. 작품에 대해 어떤 정보도 주지 않고 제목을 달게 하고 무엇을 그린 것인지 발표하게 한다. 그림을 보고 이야기도 짓게 한다. 아이들은 발표를 두려워  하지 않는다. '정답은 없다. 내 생각이 정답이다'는 것을 수없이 이야기 해 왔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지난 2년 동안 다빈치부터 시작해, 모네, 세잔, 피카소, 마티스, 미로, 파울 클레, 칸딘스키, 바스키아까지 그림읽기를 했다.

전라도야 집안에 한국화 한 점 없는 집이 없으니까(심지어 다방, 식당, 모텔, 유흥주점까지 그림이 걸려 있다) 문제없지만 아이들은 서양화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화가를 직접 만나 본 적은 더더욱 없다. 가까운 목포에서 수없이 미술전시회가 열리기는 하지만 시골 아이들에게는 그림의 떡이다. 자구책으로 인터넷 검색을 통해 그림을 다운받고 A4종이에 얹어 프린트해서 나눠 주지만 축소된 데다 색감과 질감까지 없으니 제대로 읽혀질 리 만무하다.

6월 초, 내가 소장하고 있는 중견 서양화가 김근태 화백의 '길을 걷는 사람(45㎝×50㎝)'을 가져갔다. 예쁘고 잘 그려진 그림에 익숙한 아이들 사이에서는 이 괴상망측한 정체불명의 그림을 둘러싸고 격렬한 논쟁이 일었다. 답답해진 한 아이가 '이 선생님을 한번 만나 직접 들어봤으면 좋겠다'고 한다. 나는 김근태 화백을 시골학교로 직접 모셔오기로 마음먹었다.

9월 중순. 김근태 화백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 이미 중견화가의 반열에 접어 든 화가에게 시골학교에 와서 강의료 한 푼 없이 특강을 해달라는 부탁이 실례일 수도 있다. 어떤 작가들은 '일정이 안 맞아서' 등등 핑계를 댄다. 실상은 '자신이 설 자리가 아니다'고 불쾌감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말이다. 격에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럴 때 나는 무능력한 내 자신에 아이들 앞에서 자격지심에 빠진다.

'중견화가' 김근태, 산골아이들에게 혼쭐나다

그림 구석구석 까지 지적해 내는 아이들의 예리한 지적에 답변하는 화가
▲ 답변하는 김근태화백 그림 구석구석 까지 지적해 내는 아이들의 예리한 지적에 답변하는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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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태 화백은 자초지정을 설명하자. '재미있것다.' 흔쾌히 승낙한다. '도와 줘야지'라면 조금은 실망했을 것이다. 와서 '같이 놀고 싶다'는 이야기다. 역시 아이들이 그림을 보고 궁금해 할 만한 사람이다. 때론 아이들의 눈은 무섭도록 정확하다. '무엇을 준비하면 되느냐?'는 질문에 그냥 그림 한 점만 가져오시라고 말씀드렸다. 

9월30일. 아이들은 임산부처럼 '톡' 튀어나온 배에 우스꽝스러운 콧수염까지 기른 화가 선생님의 모습에 수군수군 키득거린다. 나름으론 창백한 피부색과 잘생긴 외모, 빵떡 모자에 깡마르고 파이프 담배를 피우는 그런 화가 선생님을 상상했나 보다.

나는 김 화백의 약력이나 작품세계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림읽기에서 선입견은 아이들의 상상력에 치명적이다. '서양화가 김근태 선생님'이라는 소개와 인사만 나누게 했다. 김화백은 교단에 서서 강의를 시작하려 한다. 내가 다시 제지를 한다.

"선생님은 앉아 계세요. 수업은 애들이랑 제가 할 겁니다."

겸연쩍게 물러나 교실 뒤편 아이들 사이로 앉는다. 김근태 화백의 '길을 걷는 사람'을 주제로 수업이 시작됐다.

전교생 22명의 작은학교 아이들 난생처음 서양화가를 만나다.
▲ 수업풍경 전교생 22명의 작은학교 아이들 난생처음 서양화가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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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 이 그림의 제목은 무엇일까요?" 아이들이 서로 발표하려고 손을 든다.

'집을 향해서', '걸어가는 거지', '불타오르는 마을', '소아마비 걸린 장애인', '희망이 없는 길을 가는 사람', '초록색 사람', '집이 없는 사람', '태양을 향하여', '마비된 사람', '새 희망', '점점 없어지는 희망', '미래가 사라지고 있는 사람', '벽' 등등 다양한 제목이 나온다. 자신의 그림제목과 유사한 제목이 쏟아지자 아까 약간 겸연쩍었던 마음이 회복이 되셨는지 입가에 옆은 미소를 띤다. 조금 마음이 편해진다. 그러나 그 다음이 문제였다.

"자, 그럼 이 그림 속 이야기를 읽어 볼까요? 김근태 선생님은 왜 이 그림을 그렸을까요?"

5학년 이루세가 먼저 손을 들었다. 발표가 계속될 때마다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이들은 그림 속의 사내와 김근태 화백을 동일시하며 거침없이 발표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산골아이들이 제대로 읽어 내 당황하게 한 김근태 화백의 유화
▲ '길을 걷는 사람(유화 45*50)' 산골아이들이 제대로 읽어 내 당황하게 한 김근태 화백의 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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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희미하고 뚜렷하게 잘 보이지 않는 것으로 봐서 이 사람은 희망이 없는 사람 같아요. 자신감도 없어 보이구요."(이루세, 남, 5학년)
"이 사람은 가정이 편하지 않은가 봐요. 보금자리는 파괴되었고 제대로 쉴 곳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보세요, 마을과 집들이 찌그러지고 희미하게 그려졌잖아요."(김우중, 남 6학년)
"장애인인 것 같아요. 지팡이를 짚었잖아요."(김은별, 여, 1학년)
"길이 휘어져 있고 갈수록 어두워져 가는 것으로 봐서 이 사람은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어요. 자신감도 부족하고요."(김성찬, 남, 4학년)
"몸집은 크고 다리는 가늘고 짧잖아요. 현재 자기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안정적이라고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아요."(백유경, 여, 5학년) 
"그래도 희망이 있는 것 같아요. 살이 초록색이잖아요."(박재형, 남, 1학년)

화가, 꼬마 비평가들 덕분에 희망을 찾다 

아이들의 '길을 걷는 사람'에 대한 비평은 대충 이랬다. 나이는 대충 50대. 부부관계가 원만하지 못하고 가장으로서 위치도 불안정한, 편치 않은 가정을 가진 사람. 현재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온통 불만족이지만 탈출할 방법도 찾지 못하고 있고 미래에 대한 확신도 없는 사람. 그래도 가슴 깊이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지만 왠지 좌절하고 포기해 버릴까봐 불안한 사람이었다. 젊은 내가 듣기에도 민망하고 낯부끄러운 이야기였다.

유명 전시장이 아닌 시골학교 칠판에 걸린 중견화가의 그림
▲ 칠판에 걸린 '들꽃처럼 바람처럼' 유명 전시장이 아닌 시골학교 칠판에 걸린 중견화가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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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아이들이 김근태 화백과 그림을 번갈아 보며 동일시하고 있다는 점에 있었다. 마치 아이를 야단치는 어른처럼 신랄하고 잔인한 비평이었다. 처음에 귀엽고 재미있게 아이들을 지켜보던 김근태 화백의 얼굴은 굳어졌고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마지막 '작가의 변'에 나선 김근태 화백은 아이들에게 '그 그림을 그렸던 시기 자신이 고민하고 힘들어 했던 자신의 자화상을 여러분이 정확하고 적나라하게 지적했다.' 솔직히 고백했다. 가져온 그림 한 점을 칠판에 걸고 다운증후군 등 정신지체를 앓고 있는 목포 고하도의 '공생재활원'의 버려진 아이들의 이야기도 꺼냈다. 자신의 작품의 주테마다.

'이 아이들은 죄나 악을 모른다. 선하다. 보는 대로 느끼고 느끼는 대로 행동한다.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사람의 감정은 냄새와 색깔을 가지고 있다. 눈에 보이는 형체와 색을 과감하게 버리고 마음을 그리는 화가가 되고 싶었다. 이 아이들은 나의 자화상이다. 힘든 시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 아이들을 그림으로써 그들에게 기댔다. 이 아이들을 통해 여러분과 내가 얼마나 행복한가 느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 하고 자신에게 질문해야 한다.'고 말했다.

난생처음 만나는 화가의 그림과 말이 아이들은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 아이들의 진지한 표정 난생처음 만나는 화가의 그림과 말이 아이들은 마냥 신기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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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이 끝나고 김근태 화백은 '돌에 이야기 했으면 메아리라도 있었을 텐데 지난 세월 허상뿐인 허수아비들에게 나를 물어 왔다. 명예에 집착했는데 그 사이 내 가정은 멍들고 아이들은 스스로 자라 버렸더라. 이제는 들꽃처럼 바람처럼 살고 싶다. 내가 평생 만났던 그 어떤 비평가보다 냉혹한 비평가들을 만난 것 같다. 아이들에게 인정받는 화가가 진짜 화가다. 나는 화나지 않았다. 내 모습을 바로 지적해주는데 오히려 고맙다.'고 털어 놓는다. 정말 용기 있는 화가다.

김근태 화백은 내년 4월에 있을 자신의 개인전에 아이들을 초대하기로 약속했다. 시골 아이들의 첫 번째 미술관 나들이가 될 것이다. 아이들의 순수한 눈이 무섭다는 것을 알았기에 긴장할 것이다. 내가 개인적으로 김화백의 전시회를 기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술전시회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아이들은 그림은 보는 것이 아니라 읽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 나무와 새와, 바람과, 들꽃들과 대화하는 법도 안다. 시골 아이들은 학교와 부모가 키우지 않는다. 숲과 들과 시냇물이 키운다. 아직도 도싯물이 남아 있는 나는 때때로 아이들이 무섭다.

시골아이들의 거침없는 공격에 화가는 두 손을 들고 만다.
▲ 항복! 시골아이들의 거침없는 공격에 화가는 두 손을 들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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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청게남초등학교, #작은학교, #시골학교, #김근태, #무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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