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안개구름이 산등성이를 넘는 지리산에 단풍이 곱게 물들고 있다
 안개구름이 산등성이를 넘는 지리산에 단풍이 곱게 물들고 있다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까마득한 저 아래 골짜기 구름 좀 봐요? 이곳은 산 위가 아니라 하늘인 것 같네"
"그럼 우리들이 지금 신선이 된 건가요? 구름 위에 올랐으면 신선이잖아요? 호호호"

봉우리 아래 주변이 온통 새하얀 안개구름에 휩싸인 천왕봉에 오른 일행들이 갑자기 호들갑을 떤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일 것이다. 정상에 서면 항상 그렇지만 어렵고 힘들게 오른 만큼 보람도 그만큼 크기 때문일 것이다.

9월 25일 지리산 천왕봉에 올랐다. 얼마 전에 산청군에 사는 91세 이병덕 옹과 한 마을 노인들이 오른 코스여서 그리 어렵지 않게 오를 수 있으리라고 예상했지만 천만의 말씀이었다. 거리는 가장 가까운 코스였지만 경사가 그만큼 급하여 여간 힘든 산행이 아니었다.

안개구름 뒤덮인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신선이 되다

어두운 새벽에 서울을 출발하여 산청군 중산리에 도착한 일행들은 곧바로 등산길에 나섰다. 중산리 지리산국립공원탐방안내소 주차장엔 벌써 상당히 많은 등산객들이 모여 있었다. 주차장 앞 1층이 식당인 3층 건물 베란다 천정엔 둥그런 말벌집이 커다란 전등갓처럼 신기한 모습이다. 우리들은 다른 등산객들과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중산리 등산로 초입 코스모스길
 중산리 등산로 초입 코스모스길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주차장 옆 건물 3층 베란다 천정의 말벌집
 주차장 옆 건물 3층 베란다 천정의 말벌집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하늘엔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있을 뿐 맑은 편이었지만 골짜기엔 짙은 안개구름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산길은 습기가 많아 길바닥의 돌과 바위가 미끄럽고 무더웠다. 높은 습도 때문이었다. 산행을 시작한지 10분도 지나지 않아 땀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이른 시간에 산행을 시작해서 시간은 넉넉할 것 같았다. 느긋한 마음으로 여유 있게 걸어 경남자연학습원과 법계사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이르렀을 때였다. 위령비가 세워져 있는 삼거리 왼편 법계사로 오르는 길을 승려 하나가 비질을 하고 있었다.

"여긴 날씨가 괜찮지만 천왕봉은 어떨지 모르겠네요. 아침엔 우르르 꽝꽝 요란했는데."

승려는 법계사 셔틀버스를 몰고 올라온 버스운전기사와 이야기를 나누며 잠시 비질을 멈추고 서 있었다.

"저 스님이 여기서 산길 청소 하는 것을 보니 법계사가 가까운가 보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길가에 서있는 이정표엔 법계사까지 2.4킬로미터, 천왕봉까지 4.4킬로미터라고 표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그럼, 아직 반도 못 올라왔다는 거잖아?"

일행 한 사람이 비지땀을 흘리며 실망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힘들어 할까봐 지난  주에 산청에 사는 91세 노인을 비롯한 80대와 70대 노인들 다섯이 거뜬히 올랐던 코스라고 미리 귀띔을 해주었는데 생각보다 힘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단풍이 곱게 물들어 가는 지리산
 단풍이 곱게 물들어 가는 지리산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단풍과 안개구름
 단풍과 안개구름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정말 힘든 산행은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이곳에서부터 법계사 입구 로터리 산장에 이르는 구간은 거의 물기에 젖어 있었다. 길바닥이 온통 돌길이었는데 물기에 흠뻑 젖어 있어서 너무 미끄러웠기 때문이다. 발을 내딛기가 불편하여 한참동안 걷자 발가락과 종아리에서 쥐가 났다.

지리산 법계사가 좋아 날마다 오르며 산길을 청소하는 직지사 보각 스님

길가엔 산죽과 하늘을 가린 숲이 우거져 밤처럼 어둑어둑했다. 햇빛이 들지 않아 새벽에 잠깐 내린 빗물이 그대로 젖어 있었던 것이다. 쥐난 종아리가 너무 아파서 길가 바위에 걸터앉아 아픈 부위에 물파스를 바르자 시원하게 풀린다.

그렇게 조금 더 쉬고 있을 때 삼거리 길에서 비질을 하고 있던 승려가 나타났다. 승려는 밀짚모자를 벗어 손에 들고 휘적휘적 걸어 올라오고 있는 모습이 여간 여유로운 표정이 아니었다.

"스님! 삼거리에 계시더니 어느새 쫓아올라오셨네요? 법계사 스님이십니까?"

금방 뒤쫓아 올라온 승려의 모습을 보고 일행이 묻는다.

"아! 예! 저는 법계사가 아니고 김천 직지사에서 왔습니다."

승려는 법계사 승려가 아니었다. 멀리 김천 직지사 소속 승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곳까지 왔느냐고 물어보았다.

"저는 지금 한 달간 방학 중이거든요. 그래서 이곳에 왔습니다. 법계사가 너무 좋아서요, 저 아래 중산리에 방 한 칸 얻어들어 머물면서 매일 한 번씩 이렇게 법계사에 오릅니다."

법계사로 오르는 삼거리 입구 산길을 쓸고 있던 보각스님
 법계사로 오르는 삼거리 입구 산길을 쓸고 있던 보각스님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승려의 법명은 '보각'이라고 했다. 법계사 소속이 아닌 직지사의 승려가 법계사 입구 길을 비로 쓸고 있었던 것이다. 왜 그랬느냐고 물어보았다.

"지리산과 법계사를 찾아온 분들에게 '안녕하세요?' 하고 열 번 인사하는 것보다 길을 쓸어 깨끗하게 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서 매일 아침 산길을 오르며 비질을 합니다."

참으로 멋진 승려였다. 자신이 속한 사찰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산과 절을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해 날마다 길을 쓸어 깨끗하게 하는 마음이 얼마나 아름답고 멋진 일인가. 그는 우리들과 잠깐 이야기를 나눈 후 휘적휘적 앞장 서 법계사로 올라갔다.

91세 노인도 오른 산이라고요? 급경사길 너무 힘들어 다리에 쥐가 나다

우리들도 다시 조심조심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로터리 대피소에 이르자 많은 사람들이 쉬고 있었다. 우리들도 한 쪽에 둘러 앉아 잠깐 쉬어가기로 했다. 간식을 들며 잠깐 쉬고 있을 때 40대 중반 쯤으로 보이는 여성등산객 둘이 근처에 있는 바위 위에 걸터앉자마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이쿠! 아야야, 아이쿠 엄마!!!"

그들 여성 등산객 둘 중에서 한 여성이 다리를 붙잡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이 참혹한 모습이었다. 그 여성등산객도 다리에 쥐가 난 것이었다. 일행인 다른 여성이 다리를 주무르며 도왔지만 비명은 그치지 않았다.

법계사 일주문 앞에 모여 쉬고 있는 알루미늄 회사 노동자들
 법계사 일주문 앞에 모여 쉬고 있는 알루미늄 회사 노동자들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단풍과 안개구름
 단풍과 안개구름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비명을 지르는 여성등산객이 안타까워 물파스를 꺼내들고 다가가려는 순간 그녀들의 동행인 등산리더로 보이는 남성이 나타났다. 그는 배낭에서 뿌리는 물파스를 꺼내 쥐난 부위에 뿌리고 능숙한 솜씨로 응급처치를 했다.

그녀들도 곧 우리들과 함께 다시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쥐난 다리 때문에 쩔쩔맸던 여성에게 며칠 전 이 코스로 91세 노인이 천왕봉에 올랐다는 이야기를 해주자 놀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 할아버지들 정말 대단하시네요, 아직 젊은 저도 이렇게 힘들어 죽겠는데."

여성등산객들은 다시 힘을 얻어 천천히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그녀들을 앞질러 조금 속도를 높였다. 천왕봉에 올랐다가 내려오려면 서둘러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산길에는 여기저기 새빨갛게 물든 단풍잎이 고운 모습이었다.

법계사 일주문 앞에는 어느 알루미늄 생산업체에서 일하는 노동자들 20여명이 모여 앉아 쉬고 있었다. 그들은 대부분 젊은 층이었지만 모처럼의 산행이어서인지 이마에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혀 있었다. 훈련을 나왔느냐고 물으니 아니라고 한다.

고도가 높아갈수록 산길은 더욱 가파르고 힘들었다. 그러나 길가 여기저기 곱게 물든 단풍잎과 골짜기에서 피어오른 하얀 안개구름이 산자락을 뒤덮는 풍경이 환상적이다. 앞서 걷던 여성등산객 두 사람은 그런 풍경을 카메라에 담느라 바쁜 모습이었다. 

"여기 참 멋있네요, 사진 좀 찍어 주실래요?"

우뚝 서있는 커다란 바위 사이로 좁은 길이 열려 있는 '개선문' 앞이었다. 여성등산객들이 멋진 바위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 달라는 것이었다.

단풍이 곱게 물든 바위 사잇길 개선문
 단풍이 곱게 물든 바위 사잇길 개선문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저 뒤에 바라보이는 봉우리가 천왕봉
 저 뒤에 바라보이는 봉우리가 천왕봉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가을 단풍이 곱게 물들어 가는 아름다운 지리산

개선문 바위 사이에도 빨간 단풍이 물들어 있어서 곱고 예쁜 모습이었다. 사진을 찍는 동안 건너편 산등성이엔 연기처럼 사르르 넘어가는 안개구름이 우리네 인간들처럼 무겁지 않고, 바람처럼 가볍고 날렵한 풍경이었다.

"힘내세요, 이제 거의 다 올라왔습니다."

우리들을 인솔한 산악회 후미대장이었다. 법계사로 오르며 쥐난 종아리가 아파 잠깐 쉬고 있을 때 맨 꽁무니를 따라 올라오고 있던 후미대장을 만난 것이다.

그의 독려를 받으며 마지막 코스에 힘을 모았다. 정상으로 오르는 바로 아래쪽 절벽 밑엔 남강의 발원지인 '천왕샘'이라는 안내 팻말이 세워져 있었다. 천왕샘에서 정상으로 오르는 길은 바위투성이에 매우 가파른 오르막이었다.

"아! 너무 힘들다! 벌써 몇 년째 등산을 하고 있는 우리들도 이렇게 쩔쩔매는 코스를 90이 넘은 노인이 올랐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구먼."

아픈 다리를 억지로 끌며 마지막 힘을 다한 후에야 겨우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정상에는 이미 많은 등산객들이 모여 있었다. 등산객들을 비집고 들어가 '앞면에 천왕봉 1915미터, 뒷면에 한국인의 기상 여기서 발원되다'라고 새겨진 정상표지석을 배경으로 겨우 사진 한 컷을 찍고 근처 아래쪽으로 내려서니 갑자기 허기가 진다.

바위에 걸터앉아 간식을 들며 주변을 둘러보니 봉우리만 빠끔하게 드러났을 뿐 주변은 온통 안개구름 천지다. 더구나 짙은 안개가 가끔씩 우리들이 앉아 쉬는 정상까지 뒤덮고 지나간다. 변화무쌍한 날씨였다.

천왕봉에 오른 등산객들
 천왕봉에 오른 등산객들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단풍이 물들어가는 지리산 고지대 산자락 풍경
 단풍이 물들어가는 지리산 고지대 산자락 풍경
ⓒ 이승철

관련사진보기


정상 주변은 사람들의 발길과 폭우로 황폐해진 땅을 복구하는 '생태복원작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복원지역은 사람들의 출입을 금지하는 울타리와 안내문이 설치되어 있었지만 그런 것을 무시하고 들어간 몇 사람이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자! 이제 그만 내려갑시다. 구름 위로 솟은 천왕봉에 올라 신선놀음 했으니 다시 세상으로 내려가야지."

너무 힘들게 올랐다가 금방 내려가는 것이 아쉽기는 했지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정말 신선이라면 모를까 평범한 인간이 드높은 산꼭대기에 머물 수는 없으니 말이다.

내려오는 길에서도 골짜기에서 피어올라 산등성이를 타고 오르는 안개구름은 여전했다. 안개구름 사이로 험산준령이 끝없이 이어진 지리산에도 가을이 찾아들어 곱게 물들어 가는 단풍이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중산리 주차장에 도착하니 산악회 일행들 삼십 여명이 거의 모두 내려와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유포터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지리산, #천왕봉, #안개구름, #이승철, #단풍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바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자.

이 기자의 최신기사100白, BACK, #100에 담긴 의미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