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탁탁탁탁탁탁탁. 촤아악-. 낯익은 도마 소리가 끝나면, 잘 달궈진 팬에 재료가 담긴다. 고소하고 부드러운 냄새. 능숙하고 절도 있는 몇 번의 손놀림이 끝나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푸짐한 야채 볶음이 식탁에 올라온다.

볶음 반찬은 우리집 단골 메뉴다. 그리고 아버지 담당이다. 아버지의 야채 볶음은 아주 간단하다. 호박 볶음이라면 호박, 가지 볶음이라면 가지만 넣고 다진 마늘을 조금 넣은 뒤, 소금으로 간을 한다. 만들기 쉬운 반면 맛이 아주 좋고, 야채 본연의 맛과 향이 느껴져 깔끔하고 담백하다. 난 이런 야채 볶음을, 늘 맛도 안 본 채 밥에 듬뿍 올려 비벼먹는다. 아버지의 볶음 요리는 그만큼 친숙하고 따뜻하다. 그럴때면 우습게도, 이렇게 맛있는 밥이 세상에 또 있을까 싶다.

그런 우리 집에 이 맘때만 되면 등장하는 것이 바로 '박'볶음이다. 고모께서 보내주시는 탐스러운 박. 그 박을 하나 하나 손질해서 먹음직스럽게 볶아내는 것도 역시 아버지 몫이다.

 둥글둥글 보기 좋은 박. 매년 이맘때가 제철이다.
둥글둥글 보기 좋은 박. 매년 이맘때가 제철이다. ⓒ 김종은

박은 구하기 힘들고 또 다루기도 쉽지 않은 탓에 요즘 사람들에겐 좀 생소한 음식이 됐다. 그러나 우리 조상들에게 박은 매우 소중한 음식이었다. 실제로 우리 모두는 초가 지붕 위에 주렁주렁 달린 흥부네 박을 기억하지 않는가. 박은 봄에 심어 여름, 가을에 수확하는데, 시간이 더 지나면 껍질이 딱딱해져서 먹을 수가 없다. 그래서 선조들은 박을 먹지 않고 놔두었다가 그릇을 만들어 썼다. 요즘 TV에서 머리로 바가지를 깨트리는 게임을 많이 하는데, 어쩌면 요즘 아이들에겐 박보다도 바가지가 더 친숙하지 않을까 싶다.

박을 먹는 방법은 다양하지만, 크게는 손질해서 바로 볶거나 국에 넣어 먹는 방법과 가을 겨울 말려두었다가 박고지로 먹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고지'는 호박이나 가지 등 각종 야채를 얇게 썰어 말린 식품을 뜻하는 순 우리말이다. 박고지는 '박오가리'라고도 하는데, 임금님 수라상에 빠지지 않았던 음식으로, 열아홉가지 궁중 탕요리 중에 박고지가 들어가지 않는 요리가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박은 국물맛을 내는 데 아주 탁월하다. 가끔 무가 아닌 박이 들어간, 제대로된 낙지 연포탕을 먹을 기회가 있는데, 그 시원하고 개운한 국물맛이 아주 일품이다.

우리 집은 박을 썰어 바로 요리해 먹는 편이다. 덩그러니 놓여진 큰 박을 보면 저걸 어떻게 요리해 먹나 싶기도 있지만, 손질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박은 껍질은 벗기는 일이 가장 번거롭다. 박이 개화 후 40∼45일 이상 되어 표피가 완전히 굳어지면 바가지를 만들기도 한다.
박은 껍질은 벗기는 일이 가장 번거롭다. 박이 개화 후 40∼45일 이상 되어 표피가 완전히 굳어지면 바가지를 만들기도 한다. ⓒ 김종은

우선 박 껍질을 벗겨야 한다. 감자칼로 벗겨내도 되지만, 더 익어 껍질이 딱딱해진 것은 칼로 벗겨낸다. 편한 방법으로 하면 되겠지만 박을 몇 등분한 후에 돌려 깎아도 되고, 가르지 않은 채로 깎아도 무방하다.

박을 반으로 가르면 씨가 가득 차 있다. 이 박속은 쉽게 도려낼 수 있다. 숟가락으로 홈을 파서 손으로 끄집어 내도 되고, 혹시 안빠진다면 칼로 도려낸다. 잘 익은 것은 도구없이 손만으로도 쏙 빠진다. 적당한 크기로 얇게 썬 박은 밀폐용기에 담아 냉장고에 보관했다가, 국에 조금씩 넣거나 볶아서 먹으면 된다.

 박속은 숟가락으로 약간 홈을 파 손으로 끄집어 낸다.
박속은 숟가락으로 약간 홈을 파 손으로 끄집어 낸다. ⓒ 김종은

 잘 익은 것은 숟가락이나 칼을 쓰지 않아도 손이 잘 들어간다. 깨끗하게 끄집어 내자.
잘 익은 것은 숟가락이나 칼을 쓰지 않아도 손이 잘 들어간다. 깨끗하게 끄집어 내자. ⓒ 김종은

 손질한 박은 적당한 크기로 썰어 냉장 보관하면 된다.
손질한 박은 적당한 크기로 썰어 냉장 보관하면 된다. ⓒ 김종은

역시 아버지는 기름 두른 팬에 다진 마늘과 박을 넣고 볶으신다. 박은 푹 익혀야 하기 때문에 물을 적당히 붓고 약한 불로 익힌다. 야채를 볶을 땐 자체의 독성이 빠져나오도록 뚜껑을 덮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다. 박은 한시간 쯤 여유있게 익힐 필요가 있다. 너무 서걱서걱하거나 무르지 않은 박요리를 위해선, 취향에 따라 시간 조절을 잘해야 한다.

간은 역시 소금뿐이다. 아주 가끔은 간장도 넣으신다. 개인적으로는 소금만 넣은 박나물이 맛있다. 그래야 박 본연의 깔끔한 맛이 살아난다. 박은 그 어떤 음식보다도 깨끗하고 담백한 맛을 지녔다. 

 박이 맛있게 익어간다.
박이 맛있게 익어간다. ⓒ 김종은

부모님 고향이 경상북도라 배추부침개를 자주 먹는데, 박의 맛이 배추부침개의 그것과 좀 비슷한 게 있다. 별다른 재료를 넣지 않아 본재료의 맛만 살아나는데, 둘다 심심할 것 같으면서도 전혀 그렇지 않다. 첫느낌은 아주 부드러운데, 씹을수록 참 고소하고 맛이 깊다. 조미료 하나 넣지 않아도 그 감칠맛이 혀끝을 맴돈다.

박은 섬유질이 많아 소화기능을 돕는다. 그래서 먹고 나도 속이 아주 편하다. 또 칼슘, 철, 인 등이 고루 함유되어 있어 임산부, 노약자, 어린이를 위해 좋은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동의보감에는 박이 열을 내리고 갈증을 해소한다고 나와 있으며, 박고지는 나이먹은 왕족의 노화방지용 식품이자 상궁·궁녀의 미용식이었다. 또 바가지는 우리 조상들의 생활 필수품이자, 과육 역시 힘겨운 형편에 훌륭한 건강식이 되어주었을 거다. 부러진 다리를 고쳐준 맘씨 좋은 흥부에게, 제비가 '박'씨를 물어다 준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박이 쑥쑥 자라 금은보화를 쏟아냈다는 이 이야기는, 실제로 옛 선인들에게 박이 얼마나 귀중하고 고마운 것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나이가 들어 그런지 요즘은 가끔 아버지가 해주신 음식을 먹으면서도, 아버지의 음식이 그리울 때가 있다. 말장난 같지만,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음식에는 저마다 추억과, 추억 속 어떤 이와, 또 그리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서, 삶이 담긴 음식에는 입보다도 마음이 먼저 맛을 느끼고 배보다도 마음이 먼저 부르기 때문이다. 박도 이렇게 우리네 삶이 담긴 맛이라 그토록 깊고 구수한 건 아닐까.

덧붙이는 글 | '우리집 대표음식' 응모글



#박#박나물#박고지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