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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막'과 '태백산맥'의 고장, 벌교

문학관 벽에 장식된 작가의 한마디가 예사롭지 않다.
▲ 태백산맥 문학관 문학관 벽에 장식된 작가의 한마디가 예사롭지 않다.
ⓒ 이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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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교는 '꼬막'의 고장이다. 추운 겨울날, 여자만(汝自灣-순천만의 또 다른 이름)의 찰지고 찰진 뻘밭에서 캐낸 꼬막은 아낙들의 모진 고생이 농축된 그야말로 명품의 맛을 지녔다. 그러나 그것을 제외하고는 이름조차도 생소했던 남녘의 이 지방 소도시를 훨씬 더 벌교답고 유명짜하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조정래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이다. 700만부가 훨씬 더 넘게 팔렸다는 불가사의한 소설의 주무대가 바로 이 벌교이기 때문이다.

나같이 십 수년도 훨씬 더 묵은 오래된 독자에게, 이름만으로도 곱다시 큰 설레임을 일으키는 몽환의 도시 벌교를 존재케 하는 것은 오로지 한 편 소설의 힘, 문학의 힘이다. "보라! 우리 문학, 여기까지 왔다!"며 위풍당당했던 소설의 광고문구처럼 벌교 곳곳에는 소설이 실제로 재현되어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2007년 11월에 준공된 '태백산맥 문학관'인데 벌교를 찾는 이들에게 소설을 소개함과 동시에 세계문학기행 1번지를 지향하는 취지로 건립되었다고 한다.

그 바로 옆에 영험했던 무당의 딸 소화의 집이 있고 그녀가 정하섭과 사랑을 나누었던 현부자댁도 위용을 뽐내며 중도 들녁을 내려다 보고 있다.

소화의 집
▲ 소화의 집 소화의 집
ⓒ 이양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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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섭과 소화가 사랑을 나누던 곳. 일본식이 가미된 특이한 형식의 한옥이다.
▲ 현부자댁 정하섭과 소화가 사랑을 나누던 곳. 일본식이 가미된 특이한 형식의 한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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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범우가 건넜던 '횡갯다리'는 보물 제304호인 홍교

'벌교'라는 지명을 탄생시킨 홍교는 현존하는 아치형 석교 중 그 규모가 가장 크고 아름다워 보물 제304호로 지정돼 있는데 소설 속 김범우가 건넜던 '횡갯다리'가 그것이다. 지주로부터 빼앗은 쌀을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던 곳이기도 하다. 80년대에 복원해 지금도 마을사람들이 이용하고 있으니 벌교사람들은 '보물'을 밟고 다니는 셈이다.

그 바로 옆이 숱한 양민들의 죽음이 있었던 소화다리이다. 소설속 아름다운 새끼무당 소화의 이름을 딴 것이 아닌가 고민해 보지만 사실은 왜정 때인 1931년, 소화(昭和)6년에 건설된 다리라는 뜻이라 한다. '소화(昭和)'는 당시의 일본 왕 히로히토의 이름을 딴 연호인데 서슬퍼런 일왕의 이름을 다리에 붙이고 불렀던 식민지 벌교사람들의 기개가 놀랍기도 하거니와 해방 이후에도 원래의 이름인 부용교(芙蓉橋)를 놔두고 변함없이 그렇게 불리우고 있다는 것도 사실은 의외이다.

보물로 지정된 홍교를 걸어 다니는 벌교사람들은 보물을 밟고 다니는 셈이다.
▲ 벌교 홍교 보물로 지정된 홍교를 걸어 다니는 벌교사람들은 보물을 밟고 다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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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일제때 만들어진 원 다리 옆에 새 다리가 살을 맞대고 놓아져 새 다리는 왕복차도로, 옛 소화다리는 사람이 다니는 인도교(人道橋)로 쓰이고 있다고 한다. 이 외에도 벌교초등학교 옆에는 소설 속 빨치산 토벌대장 임만수와 그 대원들이 한동안 숙소로 사용하던 '남도여관'이 있고 염상구가 깡패 왕초와 누가 더 오래 버티나 담력 시험을 하던 '기차 철다리', "지아무리 심든다 혀도 워찌 뻘밭에다 방죽 쌓는 일에 비허겄소..."라는 대사 장면이 나오는 '중도방죽'이 모두 지근거리에 있다.

벌교 전체가 바로 '태백산맥'인 것이다. 이미 머릿속에서는 토벌대와 빨치산의 치열한 전투가, 김사용과 염상진의 담판이, 마름들의 토역질이, 인민재판 속 하대치의 일장연설이 뒤죽박죽 수를 놓듯 마을의 전경과 겹쳐지고 있다. 소설속 허구와 현실이 양립하는 결코 쉽지 않은 경험을 벌교가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더래도 이 멀리까지 왔는데 이렇게만 보고 그냥 가기에는 아무래도 아쉬움이 남는다. 여건이 허락되어 주변을 둘러 볼 수 있다면 여행은 한결 더 풍성해진다.

우선 벌교가 속해있는 보성에는 이름난 녹차밭이 있다. 은은한 녹차향기를 맡으며 피로를 풀어보자. 인근에 낙안읍성도 있다. 성(城)이라고는 그저 험준한 산악에 의지해 쌓은 산성(山城)만 보고 들었던 우리에게 사람이 사는 평지에 쌓은 읍성은 사뭇 흥미로운 체험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사용하는 성안 우물에서 물 한모금을 마시고 조금 더 가면 승보종찰 송광사(순천)가 있고 송광사 바로 옆에 조정래가 나고 자랐다는 선암사(승주)가 있다.

한국 선종의 대수도도량으로서 유서깊은 승보사찰(僧寶寺刹)이며, 통도사·해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사찰로 꼽히는 절이다.
▲ 송광사 한국 선종의 대수도도량으로서 유서깊은 승보사찰(僧寶寺刹)이며, 통도사·해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사찰로 꼽히는 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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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 순천만은 세계 5대 연안습지로 꼽히는 명소이기도 하거니와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 가보고 싶어하는 촬영지이기도 하다. 구내매점에서 파는 우리밀로 만든 빵도 맛이 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눈여겨,  반드시 둘러 보아야 할 곳이 있다. 찾는 이도 없어 흡사 버려져 방치된 듯 보이는 순천 왜성(順天倭城)이 그곳이다.

탐방객들이 한낮의 뙤얕볕을 피하기 위해 우산을 들고 서 있다.
▲ 순천 왜성의 문지 탐방객들이 한낮의 뙤얕볕을 피하기 위해 우산을 들고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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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물이 드나들던 순천 왜성 해자의 흔적이다.
▲ 해자의 흔적 바닷물이 드나들던 순천 왜성 해자의 흔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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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일전쟁 막바지, 왜군 남해안 따라 왜성 30여개 구축

순천 왜성은 400여 년전 조일전쟁(임진왜란, 정유재란) 말기, 조명 연합군과 의병, 이순신에 밀린 왜군들이 마지막 저항거점이자 교두보로 세웠던 전투기지이다. 때문에 두겹, 세겹의 완벽한 방어막을 형성하고 있으며 산 능선을 따라 곡선을 이루는 우리나라 성들과는 달리 일직선으로 구성된 전형적인 일본식 축성법을 보여준다.

바닷물을 끌어들여 해자를 만들고 다리를 놓아 낮에는 다리로 다니고, 밤이면 다리를 들어올려 통행을 끊었기 때문에 왜교(倭橋), 왜교성(倭橋城)이라 불리기도 했다. 축성 후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1만 3천 7백명의 병력으로 주둔, 조·명 수륙연합군과 두 차례에 걸쳐 최후·최대 격전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당시 남해안을 따라 군사적 요충지마다 이런 왜성들이 30여 개나 들어차 서로 긴밀한 상호협력체계를 구축하고 있었다고 하니 만일 전쟁을 일으킨 토요토미의 죽음과 철군명령이 없었다면 이후 전쟁 양상은 짐작키 어려운 것이었다.

당시 상황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조선 침공시 제1선봉장으로 악명을 떨쳤던 고니시가 하루라도 빨리 일본으로 돌아가야 했던 이유가 있었으니 바로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와의 대결 때문이었다. 애초 토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가 죽고 그의 아들 히데요리(豊臣秀賴)가 권력을 승계하기는 했으나 어린 히데요리는 노회한 도쿠가와의 맛있는 먹잇감에 불과했다.

전쟁에 단 한명의 부하도 보내지 않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도쿠가와는 히데요시 사후 서서히 권력을 장악해 가는데 히데요시의 충복이었던 고니시가 이를 막으려 했기에 대결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문제는 전투에 나서야 할 고니시의 전 병력이 이순신에 의해 순천 왜성에 철저히 봉쇄, 고립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다급해진 그는 포위를 풀고자 명나라 제독 진린에게 뇌물을 써가며 애원했으나 이순신은 눈도 깜짝하지 않았고 마침내 노량해전에서 전멸을 당한다.

싸움의 와중, 혼란을 틈타 간신히 탈출에 성공한 고니시는 와신상담, 도쿠가와와 일전을 벌이지만 이미 날개가 꺾인 그는 전투에서 패한 후 참수형을 당한다. 일본 역사에서 유명한 '세키가하라 전투'이며 이후 250여 년에 걸쳐 일본을 지배한 덕천막부(徳川幕府)가 탄생되는 순간이기도 하다.(물론 고니시가 이 싸움의 주역은 아니었다) 고니시와 함께 조선 침공의 선봉에 섰던 경쟁자 가토(加藤淸正)는 울산 왜성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히데요시의 친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신, 도쿠가와편에서 전투를 치르고 영화를 누리게 되니 참으로 사람의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소용돌이치는 격랑의 역사속 한복판에 서 있던 순천왜성이 무심한 듯 조용히 서 있으니 일제 지정 문화재에 대한 재평가 작업에 따라 지난 1997년 1월 1일에 국가지정문화재에서 해제되었고 역사적·학술적 가치와 보존상태 등을 감안하여 1999년 2월 26일에 전라남도기념물 제171호 '순천왜성'으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른다.

고니시가 필사적으로 탈출을 원했던 그 바다는 매립되어 하이스코 공장이 들어서 강산도 이미 변했고 견고했던 왜성 역시 몇몇의 파편만 남았을 뿐이다. 그러니 상상속에서나마 눈에 보이는 공장의 건물들을 치우고 그 자리에 바닷물을 다시 채우는 것, 몇몇의 축대같은 성벽과 남아있는 파편 속에서 전투요새 왜성의 모습을 다시 그려내 치열했던 전쟁의 참화와 그 속에서 희생된 민초들의 모습을 찾아내는 것은 오로지 이곳을 찾는 탐방객들의 몫일 뿐이다. 그리하여 다시는 이 땅에서 전쟁이 없게 하겠다는 결심과 노력의 다짐을 되새기는 의미있는 시간으로 만드는 것도 오로지 남아있는 우리들의 몫인 것이다.

피서 대신 새로운 즐거움 찾기, '답사여행'

갈대숲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 순천만 갈대숲이 장관을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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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렸을 적만 해도 피서는 부자들 전유물이었다. 더위에 지쳐 머리가 어질어질해지고 도저히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지경이 되면 동네어귀 개천에 "풍덩" 빠져놀다 수박 한 덩이 베어 먹으면 그만인 것이 없이 사는 우리들 일상이었다. 그러던 것이 '상전벽해'도 이만한 것이 없다. 조금 산다 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해외로 빠져 버리고 여의치 못한 이들이 해수욕장이나 계곡을 찾는다.

여름 한 철, 빠뜨릴 수 없는 연중행사로 '바캉스'를 즐길만큼 우리에게 여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휴가철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서 느끼는 불친절이나 바가지 등을 생각해 보면 그 또한 전혀 즐겁지 아니하다. 휴가란 것이 일상의 피로를 쫒고 새로운 생활의 활력을 찾고자 함이 분명한 목적일 진데 우리의 그것은 휴가 본래의 목적에 전혀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때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새로운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데 '답사여행'이 바로 그것이다.

'답사여행'은 우리 조상의 문화유적을 직접 찾아 발로 밟으며 보고 느끼는 테마여행이다. 평소에는 여건상 하기 힘들었던 사적지등을 가족들과 함께 돌아보며 견문을 넓히는 것이다. 휴가지에서 분을 삭이며 지불해야 하는 평소 몇 갑절의 하루 방값이면 맛있는 특산물과 편안한 잠자리, 현지분들과의 교감등 지역의 맛이나 멋, 정서까지를 직접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뿐인가! 아이들에게는 그대로 체험학습의 장이 되기까지 하니 일석삼조인 셈이다. '답사여행'을 위해 우리가 준비해야 할 것은 오로지 "피서지는 바다와 계곡뿐"이라는 경직된 사고에서 벗어나는 것 뿐이다.

어찌 바다와 계곡만을 피서지랴 하랴! 우리나라는 온 국토가 박물관인 곳이다. 휴가는 역사속 조상들과의 즐거운 만남이 있는 곳, '답사여행'이 어떠하리!!!


태그:#벌교, #태백산맥, #순천왜성, #답사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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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분야는 역사분야, 여행관련, 시사분야 등입니다. 참고로 저의 홈페이지를 소개합니다. http://www.refdo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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