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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는 즉위하면서 중앙집권의 강화를 위해 북도 출신 수령의 임명을 제한하고, 수령들에게 지방유지들의 자치기구인 유향소의 감독을 강화하게 하여 북도 출신인 수령들과 유향소와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 사이 회령부사를 지내다 상을 당해 관직을 사퇴한 이시애는 유향소의 불만불평과 백성의 지역감정에 편승해 아우 시합, 매부 이명효와 반역을 음모하고 세조13년(1467) 5월 반란을 일으킨다.

그는 '함길(경)도의 절도사가 진장들과 함께 반역을 음모하고 있다'고 선동해 절도사 강효문, 길주목사 설징신 등을 죽이고, '방금 남도의 군대가 바다와 육지로 쳐올라와서 함길도 군민을 다 죽이려 한다'며 군민들을 속여 타도 출신 수령들을 살해하는 등 함길도를 대혼란에 빠트렸다.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왕릉골 길목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왕릉골 길목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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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빛 왕릉골
 황금빛 왕릉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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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시애는 중앙에서도 '병마절도사 강효문 등이 서울의 한명회, 신숙주 등과 결탁해 함길도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올라가서 모반하려 하여 민심이 흉흉하니 함길도 사람을 고을의 수령으로 삼기 바란다'는 모략전술을 펴, 세조는 이에 속아 신숙주 등을 투옥하였다가 곧 구성군 준을 병마도총사로 삼아 토벌군을 출동시켰다.

3만의 토벌군에 맞서 이시애는 여진족까지 끌어들여 대항했으나, 결국 여진으로 도망치지 못하고 토벌군에게 잡혀 3개월간의 난은 평정되었다 한다. 함길도 호족인 이시애의 난을 토벌하는데 큰 공을 세운 적개공신 중에는 조선 제3대 왕 태종의 둘째 아들인 효령대군의 손자 율원군 이종도 있었다.

효령대군의 손자인 율원군 이종을 모신 재실
 효령대군의 손자인 율원군 이종을 모신 재실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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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원군 이종은 문무에 모두 능해 세조가 종친 가운데 문무에 뛰어난 자를 선발하는 시험을 시행했을 때, 양쪽 모두에서 뽑혀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한다. 성종7년(1476) 1월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에 양경이란 시호를 추증받았다.

그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왕릉골에 자리하고 있으며, 부인 무안현부인 동래 정씨의 묘와 쌍부을 이루고 있다. 묘역 내에는 1987년 건립한 율원군 사당과 재실인 충의재도 있다. 고려공양왕릉을 찾아가다 발견한 율원군 사당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 전한다.

율원군 사당 뒤로 그와 부인의 묘가 있다.
 율원군 사당 뒤로 그와 부인의 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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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은 외부인의 출입을 막아놓았다.
 사당은 외부인의 출입을 막아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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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뉴스와 블로거뉴스에도 송고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율원군사당, #충의재, #왕릉골, #원당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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