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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엔 갑자기 결혼식날 성당에서 올린 혼배미사가 떠오른다. 성당에서 올린 혼배미사 때 신부님께서는 마지막 축복 기도를 하시면서 "한 남자와 결합하는 이 여인을 축복하소서!"하고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한 축복기도를 올려주셨다. 그 순간의 가슴 떨리던 기억을 나는 잊지 못한다. 사랑하는 남자와의 결합은 축복이다.

여성의 삶에 유난히도 굴레와 굴곡이 많은 이 땅에 여인으로 태어나 종가 맏며느리로 살아오면서 온갖 불합리함에 억울하다고는 생각했지만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은 없다. 그러나 여자로 태어나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아까운 사람들을 많이 보아왔다. 나는 에너지가 넘치고 재능 있는 여성들을 좋아하고 존경하며 사랑한다.

그러나 한국이나 외국이나 예외 없이 여성들은 남성보다 불리함을 온몸으로 당하며 살아왔다. 세계적인 명성을 얻어낸 남자들, 그들의 그늘에 철저히 가려져 이름조차도 알려지지 않은 재능 있는 아까운 여인들의 슬픈 운명을 더듬어보고 싶다.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한 아인슈타인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밀레바 마리치 아인슈타인은 어려서부터 관찰과 수학에 재능이 뛰어났다. 자신도 '남자 동료들처럼 훌륭한 물리학자가 될 수 있다'는 자의식이 뚜렷한 여성이었다. 그러나 그녀의 존재는 안타깝게도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사라져버린 인물이다. 그녀는 '여성 과학자의 비극적 삶'을 빠짐없이 보여주는 전형이다.

스위스 국립공과대학의 홍일점 입학생이 된 그녀는 같은 과에서 아인슈타인을 만났을 때만 해도 장래가 촉망되는 우수한 학생이었다. 수학적 재능이 뛰어났던 그녀는 아인슈타인과 애정관계로 발전하여 결혼한 뒤에는 상대성 이론, 광양자 이론, 통일장 이론 등의 연구를 공동으로 진행, 아인슈타인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에 절대적인 공헌을 했다. 남편이 보낸 편지를 보면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고 파트너로 인정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우리가 새로운 작업을 하게 되어 나 역시 기쁘오.
이제 당신은 당신의 연구를 계속해야만 하오.
내 자신은 아직 평범한 인물인데, 박사 애인을 갖는다면
얼마나 자랑스러울지 모르겠소!

나와 똑같이 힘 있고 자립적인 동등한 인간을 당신에게서 발견하고
나는 얼마나 기쁜지!
당신과 함께 있지 않으면 누구와 있어도 나는 혼자라오.

아인슈타인에게 그녀는 사랑하는 여인이었으나 학문적인 토론을 벌일 때는 언제나 진지한 파트너였다. 아인슈타인에게 있어 학문과 사랑은 별개라 할 수 없을 정도로 밀착되어 있었다. 그는 언제나 애인을 공동 연구의 파트너로 보았다. 결혼 후 아인슈타인은 연구에만 몰두했고, 밀레바 마리치 아인슈타인은 그를 뒷받침해주었다. 그녀는 어느 날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얼마 전에 우리는 매우 중요한 작업을 완성시켰어.
그것은 남편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들어줄 거야.

그 중요한 작업은 아마도 상대성 이론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결혼 전에는 공동제작에 언제나 <아인슈타인-마리치>라고 서명했지만 결혼하고 나서는 아인슈타인의 이름이 공동서명을 대신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에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그녀의 말대로 이제 둘은 하나였기 때문이다. 첫아들이 두 돌일 당시 다섯 편의 논문을 발표했으나 모두 아인슈타인의 이름으로였다. 이 논문들은 아인슈타인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확고히 다져주었을 뿐 아니라 세계적인 대학에서 연구를 계속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전쟁으로 남편의 재정이 불규칙해 생계가 어려울 때는 그녀의 피아노 교습으로 생계를 이어갔다. 막내아들은 비상한 재능을 가진 아이로 정신질환이 있는 문제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막내아들에 대한 염려를 전적으로 아내에게만 떠맡겼다. 그녀는 자신이 결코 원한 적이 없던 역할, 곧 학문과 절연된 채 단지 주부이고 어머니일 뿐인 상황으로 내몰렸다. 막내아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남편의 학문생활에 참여할 수 없었던 밀레바는 개인적으로도 소외당하게 되어 끝내 아인슈타인이 조건이 좋은 다른 여인과 결혼하기 위해 이혼까지 요구당한다.

단란했던 시절의 아인슈타인 부부 아인슈타인과 밀레바 마리치
▲ 단란했던 시절의 아인슈타인 부부 아인슈타인과 밀레바 마리치
ⓒ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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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초기에는 지속되었던 동등한 공동체이자 삶의 공동체가 이혼으로 실현될 수 없었는데 그 좌절의 대가를 그녀 혼자서 고스란히 치러야 했다. 그녀는 빈손이 되었다. 학문적으로 새로 시작하기도 너무 늦었고, 정신질환을 앓는 막내아들에게 남은 힘마저 빼앗겨 그녀는 겨우 생계를 위한 피아노 레슨이나 수학수업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막내아들 출생 뒤로 학문은 물론, 남편과도 멀어져 이혼당하고 정신질환자였던 막내아들을 위해 마지막까지 헌신의 세월을 보내다 결국 지친 노파가 되어 모든 이들로부터 소외된 채 정신병원에서 쓸쓸히 죽음을 맞이했다. 재능 있는 여자가 그 재능을 꽃피우지도 못하고, 함께 했던 연구결과도 남편이 독차지해 버리고, 이혼까지 당해 정신병원에서 홀로 쓸쓸히 죽어간 그녀를 생각하면 원통하고 눈물겹다. 그녀가 만일 여자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그녀의 소망대로 훌륭한 물리학자가 되었을 것이다.


#밀레바 마리치#재능있는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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