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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평생 제일 무서웠던 것이 흰 종이와 연필이었어."
"지하철을 타도 잠을 잘 수 있었남, 글을 모르니 안내 방송을 들어야 하잖여."
"그 뿐이겠어? 은행 일을 볼 때 이름을 쓰라고 하면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단 말이지."
"봉제공장 다닐 때였지, 급여봉투에 사인을 해야 하는데, 그 때마다 화장실 핑계로 옆 사람에게 써달라고 했거든, 어느 날 팀장이 그러드만, 글을 모르냐고, 왜 옆 사람에게 쓰라고 하느냐고… 꼭 죽고 싶더만…."

서울 노원구 상계동 노원역 근처에 있는 '마들여성학교'는 만학의 꿈을 키워가는 어머니들이 다니고 있는 학교다.

가정통신문을 읽을 수 없으니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해 학교에서 혼난 딸을 둔 어머니, 손자 손녀들이 왜 학교를 다니지 않았느냐고 할머니를 이해 못하는 표정을 짓더라는 어머니, 심한 경우 읽을 것을 거꾸로 들고 있었다는 어머니, 영어반 어머니들은 자기가 찾고자 하는 간판 앞에서 사람들에게 물어볼 때의 멍한 느낌, 투표할 때 한 번도 자기 의사 없이 했지만 이제는 자기 주관대로 찍게 되었다는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겨우 한글 깨친 것인데, 학사모를 써도 되나 하는 자격지심 들어"

  지난 8월 27일 북부 고용지원센터 10층 강당에서 마들여성학교 31기 수료식이 있었다.
 지난 8월 27일 북부 고용지원센터 10층 강당에서 마들여성학교 31기 수료식이 있었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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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해 뭣해, 글을 몰라서 당한 일들은 밤새워도 모자르지."


한글을 몰라서 혹은 영어의 알파벳도 몰라서 '억장이 무너지는'일들을 당했던 어머니들의 무용담은 끝이 없었다. 어머니들의 평균 연령은 60이 넘는다. 짧은 기간은 2년, 긴 기간은 무려 6년이 되는 시간도 마다하지 않고 이 학교를 다니고 계신다.

지난 8월 27일에는 마들여성학교 31기 수료식이 있기도 했다. 수료식은 '마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다음 단계로 올라가기 위한 절차인 셈이다. 31기 중에는 상급반에서 공부하신 20명의 어머니들이 학사모를 썼다.

어머니들은 이구동성으로 "대학생도 아니고 겨우 한글을 깨우친 것인데 이런 학사모를 써도 되나 하는 자격지심은 들지…" "하지만 우리가 언제 이런 걸 써보겠어, 부끄럽지만 영광이지 뭐"라고들 하신다. 가운의 옷깃을 바로 잡는 손끝에서 자신이 자랑스럽고 대견하다는 떨림이 전해진다.

마들여성학교의 김인숙(46) 교장은 "모든 과정을 마친 어머니들께 학사모를 쓰게 하는 이유는 남이 갖는 것에 대한 동경을 내가 막상 해 봄으로써 그것에 대한 환상을 깨보는 동시에 자신 있는 삶, 변화된 삶을 추구해 보라는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학사모를 쓰지 않는 어머니들도 수료식을 하면서 초급반은 중급으로, 중급반은 완성반 등으로 다음 단계의 수업을 듣게 된다.

"나는 올라가고 싶지 않지, 선생님들이 올라가라니까 올라가는 거여."
"자네만 그런가, 우리 모두 같은 생각이라니까, 배울 것이 얼매나 많은데."

삼삼오오 어머니들은 모여서 한 단계 오른다는 설렘을 이렇게 수런수런 이야기로 토해냈다.

"다시 사는 인생이지, 이런 답답했던 마음을 누가 알겠어?"

    마들여성학교 교가- 늦게 배움을 시작한 어머니들은 학교를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고 하신다.
 마들여성학교 교가- 늦게 배움을 시작한 어머니들은 학교를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고 하신다.
ⓒ 박금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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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학사모를 쓰게 된 총학생회장인 김정하(62)씨는 마들여성학교에서 '기역' '니은'부터 배우기 시작해서 5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래도 끝난 것이 아니다. 중학예비반으로 올라가서 좀 더 심화된 한글과 영어 등을 배우게 된다.

"이제는 글을 읽고 쓰는데 어려움이 없어. 글에 대해 자유로워진 거지."

김씨의 남편은 옛날에는 한글을 모르는 부인이 어디를 가면 불안해서 못 가게 했는데 지금은 어디든 자유롭게 가라고 격려를 해준단다. 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외부 문해 관련 단체 행사에도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럴 때마다 황홀한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다시 사는 인생이지, 이런 답답했던 마음을 누가 알겠어?"라 말하는 김씨는 여성학교에 와서 자원봉사하는 교사들의 삶을 보면서 그전에는 다른 사람들을 돌아볼 여지와 필요도 못 느꼈는데, 지금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되었단다. 그래서 총학생회 활동도 더욱 열심히 했다고 하면서 "학교만 생각하면 웃음이 절로 나고 행복해진다"고 말했다.

어머니들은 초급반을 지나 중급반쯤에 가면 세상에 대한 시각에 변화를 만난다. 자신을 '늘 보잘 것 없고 가치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 했는데, 문해교육을 통해서 자신을 새로 바라보게 되고 햇수를 거듭할수록 세상에 대한 눈뜨기가 수월해진다고 말한다.

늦깎이 공부이지만 '중입, 고입과정'에도 관심을 갖고 더 공부하려는 어머니들도 계신다. 직장은 꿈도 못 꾸었다가 사회참여를 하게 되고, 어떤 어머니들은 선거참관인으로까지 활동을 해 보면서, "전에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문해교육으로 인해 얻어진 보물"이라고 총학생 회장인 김정하씨가 어머니들 심정을 대변했다.

김인숙 교장은 "이런 수료식을 할 때마다 저렇게 자랑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며 보람을 느낀다"며 "우선 기초적인 실생활에서의 불편을 해소한 그것만으로도 당장 기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수료식장에는 이지현 선생의 선창에 어머니들이 '마들여성학교 교가'를 목청껏 부르며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나를 위한 방학', '내 책가방', '내 책상'이 있다는 것에 대해 "너무 좋다"는 어머니들은 그날의 주인공들이 되어서 공부하며 힘들었던 마음들을 풀어내고, 또 다시 배움을 향해 다짐하는 시간들이 되었으리라.


태그:#마들여성학교, #한글, #마들, #여성, #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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