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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태안 부역혐의 희생사건 희생지

 

1950년10월부터 12월말경까지 서산·태안지역 주민 1865명 이상이 부역혐의로 체포되어 해군, 서산․태안 경찰서 소속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집단학살되었습니다. 서산시에서 집단학살된 장소는 이곳 갈산동 교통호를 비롯해 최소 30여곳으로 읍․면마다 2-3곳이 있었고 각각의 장소마다 부역혐의자와 민간인 수십명의 고귀한 생명들이 적법절차 없이 억울하게 희생되었습니다(진실화해위원회에서2008년12월2일 진실규명 결정)

(유해매장 추정지번)

서산시 갈산동 산 2-87번지

 

위 장소는 한국전쟁 시기에 발생한 서산․태안 부역혐의희생사건의 집단희생 유해매장 추정지이므로 함부로 훼손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2009.6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장

서 산 시 장

 

26일 오전 충남 서산시 갈산동 길가에 가로150cm, 세로 120cm의 스텐레스 표지판이 세워졌다. 이 표지판에는 위와 같은 내용의 검은 글씨가 세겨져 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와 서산시는 이날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집단희생자 유해매장 추정지인 서산시 갈산동 산 2-87번지에 안내표지판을 설치하고 제막식을 가졌다.

 

이 같은 스텐레스판은 이곳 말고도 인근지역인 성연면 메지골과 양대동에도 세워졌다. '메지골'은 보도연맹 사건 희생지로 서산·태안지역 국민보도연맹원 수백명이 경찰에 의해 희생된 채 묻혀 있다는 내용의 표지판이, '양대동'은 갈산동과 메지골과 달리 퇴각하는 인민군과 좌익세력에 의해 민간인 수십명이 희생됐다는 내용의 표지판이 세워졌다.

 

갈산동 뒷산과 메지골은 한국전쟁 당시 충남지역에서 민간인피해가 가장 많은 곳으로 알려져 있어 당연히 유해발굴조사가 이뤄져야 하나, 과거사 위원회의 활동이 내년으로 만료되기 될 예정이어서 시간이 촉박해 사실상  '진실규명 결정'을 받아놓고도 진실을 파헤쳐 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덮어질 우려가 크다.

 

이날 과거사 정리 위원회의 김동춘 상임위원은 갈산동 학살 현장을 답사한 자리에서 "서산지역에서 민간인 희생자 1865명은 최소치의 숫자로 실제로는 얼마나 더 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위원회의 존속기간이 내년으로 만료되어 이 기간 내에 유해발굴조사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며 "그렇다 하더래도 희생지에 표지판을 세우는 것은 과거의 진실을 후세사람들에게 바로 알려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함은 물론 민족의 진정한 화합을 위한 것이다"고 밝혔다.

 

이어 김 상임위원은 "내년으로 과거사 정리위원회의 활동기간이 만료되어 남아 있는 과거사를 풀어보지 못하고 마치게 되어 아쉽지만, 남은 기간 1차적으로 남아 있는 사건처리에 주력하고 유족보상, 유해발굴 등 후속사업을 계속해 나가는 동시에 이를 정부에 건의토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유족회의 명장근(76.서울시 동작구) 회장은 "너무 많은 세월이 흐르다보니 당시 아들, 딸을 억울하게 잃은 부모들은 모두 돌아가시고 형제자매마저도 세상을 뜬 사람들이 많은데다, 아직까지 좌익이란 딱지는 두려움의 대상이어서 남아 있는 유족들이 나서기를 꺼려해 유족들을 한자리에 모으기가 극히 어렵다"고 말했다.

 

이어 명씨는 "과거사 위원회에서 '진실규명 결정'을 한 만큼 죽은이들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것이 만천하에 드러난 만큼 올해가 가기 전에 합동으로 위령제라도 올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고 닷붙였다.

 

명씨(당시17세)는 한국전쟁 때 중학교교사이던 큰형(당시23세)과 중학생이던 둘째형(당시19세)을 메지골과 해미읍성 뒷편 산기슭에 있는 일제때 만든 방공호에서 각각 잃었다. 둘째형이 메지골에서 학살당하던 날은 1950년 6월30일로 마을사람 20여 명과 함께 해미에서 성연면 메지골까지 끌러와 전깃줄로 한데 묶인 채 총을 맞고 죽어 가매장 된 것을 그 이튿날 찾아 마을사람들과 함께 소달구지 2대에 함께 죽은 이들까지 싣고 가서 장사를 지냈다"며 그날의 일을 또렷하게 기억해냈다.

 

 

메지골에서 낳고 평생을 살고 있는 공선식(68.서산시 성연면 일남리)씨는 "내가 8살 때 일인데 6.25가 나고 며칠 있다가 산에서 종일 총소리가 요란하게 들리고 어른들이 산골짜기에 죽은 사람들로 넘쳐난다"는 말을 들었다"며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골짜기에 가면 신발짝과 혁띠 등을 쉽게 발견할 수 있고 때로는 사람뼈도 튀어나왔는데 이제는 보기가 힘들다"고 말했다.

            

유족회의 이아무개(67.서산시 지곡면)씨는 "이제 와서 이게 무슨 필요가 있나, 평생을 좌익이란 딱지를 붙여 숨죽이며 살게 해 놓고 진실화해라고?"하며 울분을 터트렸다.

 

이씨는 1950년 10월게 갈산동에서 큰형을 잃었다. 그날 아침에 군인들과 마을치안대원이 와서 이씨 아버지를 찾다가 없으니까 큰형을 끌고 갔다는 것이다.

 

"좌익을 하다 죽었다면 그래도 덜 억울하죠, 이건 농사밖에 모르는 청년을 잡아다가 부역했다고 죽이고 시신조차 못찾아가게 했으니 그게 사람들이 할 짓입니까, 더구나 나라를 지킨다는 군인들이 할 일이에요?"이씨는 평생을 분한 가슴으로 산다고 했다.

      

"봐요, 억울하게 죽은 사람덜은 오늘날까지 무덤조차 없어 원혼이 구천을 떠도는데 살인을 한 그 사람들은 '국가 유공자'라며 평생을 고개 쳐들고 따뜻한 밥 먹으며 당당하게 살다가 죽어서도 국립묘지에 묻히는 호사를 누리고 있는 판국에 무슨 화해고 진실 규명을 한다는 겐지 모르것시다."

 

큰오빠가 아침상 숟가락을 들다 말고 경찰과 치안대에 의해 끌려나간 채 갈산동 어느 산골짜기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말만 들었다는 팔순 할머니의 한 서린 얼굴, "총각의 몸으로 죽은 오빠는 후사가 없어 여태 제사 한번 못 얻어 먹었다"며 목메어 했다.

 

한국동란때 삼촌 둘이 휘말려 죽임을 당했다는 안아무개(54.서산시 팔봉면)씨는 "할머니는 평생을 '우익눔덜'하며 우익세력에 의해 희생된 아들의 죽음을 애달파 하셨습니다, 저의 선친께서는 생전에 결혼도 못하고 죽은 동생의 제사를 지내왔습니다, 집안어른들께서 제가 어릴 때 귀가 닳토록 듣고 지난 말은 '앞에 나서지 말아라'였습니다, 지금도 여차하면 대통령까지 좌익세력으로 몰아 매도하는 판국에 진정한 화해와 진실찾기가 가능하다고 본다면 너무 순진한 겁니다"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유족들은 "당장 유해발굴이 어렵다면 희생지에서 유족들이 한데 모여 위령제라도 올릴 수 있는 터만 마련해 주어도 더 바랄 게 없다"고 말했다.


태그:#진실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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