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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는 몇 겁쯤 건반에 얹히더라도 
지치거나 병들거나 늙는 법이 없어서 
소리로 파이는 시간의 헛된 주름만 수시로 
저의 생멸(生滅)을 거듭할 뿐. 
접혔다 펼쳐지는 한순간이라면 이미 
한 생애의 내력일 것이니. 
추억과 고집 중 어느 것으로 
저 영원을 다 켜댈 수 있겠느냐. 
채석에 스몄다 빠져나가는 썰물이 
오늘도 석양에 반짝거린다. 
고요해 지거라. 고요해 지거라. 
천천히, 천천히 파도 소리가 씻어 내리니, 
지워진 자취가 비로소 아득해지는 
어스름 속으로 누군가 끝없이 
아코디언을 펼치고 있다. 
-김명인 '바다의 아코디언' 부분

 
물 위에 앉은 의자들
 
그  바다의 배는, 물 위의 앉은 의자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날의 갈매 호는 남위 03도 37분, 동경 70도 08분에 정박해 있었다. 브리치실의 둥근 창밖의 바다는 쉼 없이 아코디언처럼 접혔다가 펼쳐지고 있었다.
 
태양 빛에 반사된 하얀 바다. 그 하얀 바다는 잠시도 조용하지 않고 움직였다. 그것이 마치 흰 뱀들이 몰려다니며 만드는 율동 같았다. 그날의 높은 마스트 돛대 위에는 태극기와 갈매 호 깃발이 가랭이 찢어지게 펄럭이고 있었다.
 
그 아찔하게 높은 마스트 돛대 위에 북방 가넷 떼들이 날개를 접고 쉬고 있었다. 그들은 이제 저 먼 그린란드를 향해 날아갈 요량인 모양이다. 그 하늘은 동요 없는 부처의 마음처럼 고요했다. 
 
맹석출은 그 철새들을 바라보며 잠시 아버지를 생각했다. 어릴 적 아버지는 철새와 같은 존재였다. 1년에 한번씩 돌아오는 철새처럼, 2-3년에 한번씩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그는 그런 아버지의 직업이 어머니의 잔소리와 달리 이상하게도 근사해 보였다. 다른 아버지처럼 집에 함께 사는 아버지의 모습을 생각해 보면 그 편이 훨씬 나았으니 말이다.
 
어머니를 빨래 방망이로 때리는 아버지라도...바다가 나간 아버지는 그립다
 
1년에 한번 집에 돌아오는 아버지에 대한 반가움이란 고작 하루나 이틀이었다. 아버지는 술이 아니면 안되는 알코올 중독자 같이 술, 술, 그저 술만 찾았다. 술이 없으면 안되고 술이 들어가면 포악해 졌다. 어머니를 빨래 방망이로 때리고 석출 뿐만 아니라 석순, 석수이와 일곱살배기 막내 여동생까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맞아야 했다.
 
그래서 그런 아버지가 혹시 계부는 아닐까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석출은 그렇게 지긋지긋한 계부 같은 아버지가 바다로 떠나고 나면 이상하게 그리웠다. 그리고 나도 크면 아버지처럼 넓은 바다를 안방처럼 돌아다니는 뱃사람이 되리라 굳게 마음 먹었던 것이다. 
 
아버지로서는 정말 형편 없는 분 같은데 뱃사람으로서 아버지의 모습은 맹석출 기억 속에 매우 멋진 기억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왜 그런 기억이 자신에게 남아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늘을 쳐다보았다. 몇 마리 낙후병 같은 철새들이 사라진 하늘에는 고요했던 구름들이 정처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구름은 사자모양처럼 흘러다니다가 어느 순간 코끼리 모양으로 변했다. 어장 근처에는 돌고래와 씨알 작은 상어 떼들이 저희들 마음대로 어울려 다니며 미끼를 떼어 입에 잽싸게 물고 수면 밑으로 사라졌다. 
 
갑판에는 막 투망한 직후이라, 어부들이 부지런히 고기를 손질하고 있었다. 그 갑판 구석에는 늙은 윤씨와 곱추 전씨가 누룽지처럼 들어붙은 고기 피를 열심히 닦아내고 있었다.
 
"야, 이 X새끼들아, 빨리 빨리 움직여라. 게으름 피우는 놈은 저녁밥은 없을 것이다."
 
 
살인 전과자라 해도 내겐 무기가 필요하다
 
서른 세살의 박달수는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고무장화를 신고, 머리에 챙모자를 쿡 눌러 쓰고 있었다. 그리고 게으름 피우는 어부들을 닦달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대나무 채찍을 윙윙 소리나게 갑판 바닥을 향해 내려치다가 어부들의 등짝을 후려치기도 하였다.
 
새로운 갑판장이 오기까지, 맹석출은 박달수에게 갑판 대리란 직함을 임시로 주었다. 생각같아서는 박달수를 자신의 파트너 삼아 갑판장으로 부리고 싶지만, 그는 살인 전과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간을 배 밖에 내 놓고 다닌다는 소리를 남들에게 듣는 맹석출이지만, 그래도 살인은 무서운 일인 것이다. 그래서 맹석출은 적절하게 그의 살인적인 폭력성을, 그의 무기로 이용하고만 싶었다. 그러나 그는 이 위험천만의 무기를 쉽게 버릴 생각은 이제 없는 것이다. 어차피 배안의 시스템 상, 필요악과 같은 박달수와 같은 존재는 꼭 필요하다고 내심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판에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다. 상어 창자 속에서 방금 꺼내 놓은 내장과 창자에서 올라오는 김이었다. 상어는 머리통만 남았는데도 숨을 놓지 못하고 꿈틀거리고 있었다. 
 
김씨와 이씨가 한 켠에서 잘라낸 상어 지느러미만 잘 간추려 얼음조각을 깔고 조심스럽게 상자 안에 옮겨 담고 있었다. 맹석출은 그것을 지켜보며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유럽 레스토랑에서도 고급 요리에 속하는 상어 지느러미다. 저것의 수입이 이번 항차의 기름 값은 지불하고 남을 터다. 
 
이 몸으로 병원에 가도 달라질 것은 없다
 
맹석출은 며칠 째 공복 속에 술만 먹어서 속이 무척 쓰렸다. 위궤양 증세가 온 지 벌써 7년이나 병원 문 앞에도 가지 않았다. 이제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다 해도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의 피부는 햇볕에 그을려 흑인 노예의 얼굴처럼 까맣다. 그 그을린 피부에 해수독이 번져 있었다. 그 자신도 모르게 긁은 생채기로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데도 그는 세수를 한 달이나 하지 않고 있었다.
 
바다에 나오면 맹석출은 정말 되는 대로 살았다. 그것이 습관이 되어 이제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그러나 육지에 내리면 그는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야단스럽게 백색의 양복에 넥타이, 거기에 백색 구두까지 신고 다녔다.
 
어젯밤 맹석출은 악몽을 꾸었던 것이다. 대왕암 근처 동해 바다를 혼자 죽기 살기로 헤엄치고 있었다. 그런데 난데 없이 아버지가 나타나서 자신의 머리통을 물 속으로 밀어 넣는 꿈에 비명을 지르고 깨어났던 것이다.
 
아버지의 꿈을 꾼 적도, 또 꿈 같은 것은 꾼 적이 없는 맹석출이었다. 죽은 아버지가 꿈에 나타난 것이 왠지 마음에 걸렸다. 아버지는 바다에서 익사하셨다. 물론 시체도 찾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하니 새삼 가슴이 아팠다. 어머니는 어떻게 지내시는 것일까. 맹석출은 당장 모든 것을 그만두고 귀항하고 싶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의 고생은 이루 다 말 할 수 없는 것이다. 처녀시절 해녀의 일을 한 경험으로 다시 바닷속을 들락거리며 해삼 멍게를 따시며 가계비와 자식들의 학비를 벌어야 했던 어머니는 해수병에 걸려 고생이 이만 저만 아니신 것이다. 거기다가 며느리들까지 곁에 없어서 어떻게 지내실 것인가.
 

 

누가 뭐라해도 마누라만은 믿었는데

 

강렬한 태양 빛에 반사되어 오후가 되면서 바다는 하늘과 구별이 되지 않았다. 마치 하얀 모래사막이 출렁이는 것 같았다. 맹석출은 곱씹어 볼수록 도수철에게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직한 데 사람을 뒤통수치게 만드는 기술을 가진 도수철… 결코 그가 영숙이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영숙이 같은 여자는 돌멩이가 발에 차일 듯이 너무 많은 것이다. 도수철이 포기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녀에게 집요해지는 자신을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남포 다방 레지정영숙이가, 마누라와 사이에 생기지 않은 아이를,  자신에게 덥썩 안겨 줄 것도 아닌데 말이다. 정말 맹석출도 영숙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참을 인(忍)자 하나면 살인도 면한다더니..."

 

맹석출은 일주일째 일손을 탁 놓고 유람선을 탄 것처럼 한가롭게 지난날을 회억했다. 그 누구보다 믿었던 아내였다. 희미한 기억 저편에 정말 유쾌하지 않는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에 어떻게 돌아가신 아버지 말씀이 생각났는지 말이다. 그 참을 인(忍)자를 생각하지 않았다면, 마누라, 정미순은 맹석출 손에 죽고 없는 지상의 존재가 됐을 터이다. 마누라 정미순을 생각하면 사람이란 환경의 지배를 받는 동물이 아니라, 감정의 지배를 받는 동물인지도 모른다. 그 야속한 세월이 아내의 배신에 당혹했던 현장도, 이제 멀리 멀리 되돌릴 수 없는 시간속으로 데리고 간 것인가…<계속>


#북방 가넷 새#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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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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