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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색 대문은 항상 열려 있다. 주렁주렁 매달린 대추와 포도, 감은 그렇게 높지 않은 담장 넘어 골목까지 고개를 내밀고 있다. 그런데도 아무도 손을 대지 않은 것 같다. 도심 한복판에 있는 집이다.

'공간초록'. 부산교대 앞에 있는 단독 주택을 말한다. 18일 오후 혼자 이 집을 찾았다. 대문은 열려 있는데 아무도 없었다. 정원에 심어진 나무들은 온통 녹색인데 붉은 봉숭아 꽃잎이 선명하다.

부산교대 앞에 있는 '공간초록'의 녹색으로 된 대문은 항상 열려 있다.
 부산교대 앞에 있는 '공간초록'의 녹색으로 된 대문은 항상 열려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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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대 앞 개인주택에 들어선 '공간초록'의 거실과 방. 여름인데도 거실 가운데에 난로가 그대로 있다.
 부산교대 앞 개인주택에 들어선 '공간초록'의 거실과 방. 여름인데도 거실 가운데에 난로가 그대로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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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으로 들어가는 문도 열려 있다. 푹푹 찌는 여름 더위를 피해 선풍기 틀어놓고 한 숨 자고 가도 좋을 정도였다. 책도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고, 차도 따라 마실 수 있다. 조금 전 누군가 왔다가 간 흔적도 보인다.

방은 4개. 책장이 있고 컴퓨터도 있다. 부엌도 있고, 거실도 있고, 화장실도 있다. 지난 겨울 온기를 불어넣어 주었을 난로가 여름에도 주인처럼 거실을 지키고 있는 풍경이 이채롭다.

부산광역시 연제구 거제동 89-53번지에 있는 '공간초록'. 이 집은 이전에 식당이었다. '공간초록'이 만들어진 지는 올해로 3년째. 2006년 8월 20여 명이 십시일반으로 전세금을 마련해서 만든 집이다.

공간초록을 만들자고 처음에 제안한 사람은 '천성산 지킴이' 지율 스님이다. 경부고속철도(대구~부산)가 천성산을 뚫고 가자 법원에 냈던 도롱뇽 소송(고속철도 천성산 구간 공사착공금지 가처분신청)이 끝나갈 무렵 지율 스님이 '아주 특별'한 공간을 만들자고 주변 사람들에게 제안했던 것.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간초록'은 부산교대 앞 개인 주택에 있다. 사진은 '공간초록' 문패.
 누구나 이용할 수 있는 '공간초록'은 부산교대 앞 개인 주택에 있다. 사진은 '공간초록' 문패.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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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대 앞에 있는 공간초록에는 방이 여러개 있는데, 누구나 앉아 쉬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방이 있다.
 부산교대 앞에 있는 공간초록에는 방이 여러개 있는데, 누구나 앉아 쉬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방이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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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면에 걸여 있는 '소개글'을 읽어보면 이 집이 생긴 까닭을 알 수 있다.

"지율 스님은 '세계를 열어갈 작은 문', '누구나 주인이 될 수 있는 공간', '비어 있는 공간', '찾아오는 사람이 주인이 되어 다양한 내용으로 가꾸고 채워가는 그런 집'을 짓자고 하셨다. … 몇은 십시일반 돈을 보태며 몇은 뚝딱 집 꾸미기 공사에 노동을 보태고, 살림살이며 책장의 책을 보내 왔다."

"찾아온 사람이 주인이다. 그것이 청소하거나 관리하는 사람을 따로 두지 않는 이유다. 이곳에 머물다 가는 사람이 주인으로, 그 일을 할 것이다. 책 읽다 가고 친구들과 이야기 나누다 가고, 뜻 모아 좋은 모임 만들어 열띤 토론도 하고, 공간초록은 그대로 기다리고 있다."

이곳을 자주 이용하는 사람들은 부산지역 시민사회단체다. 특히 환경 관련 단체들이 자주 찾는다. 습지와새들의친구, 부산녹색연합 등 단체들은 이곳에서 거의 매주 금요일 저녁 모여 환경 관련 영화나 다큐멘터리를 상영하고 토론도 벌인다.

녹색평론 김종철 발행인과 환경운동가 최병성 목사 등이 이곳에서 강연하기도 했다. 지난 봄 낙동강을 한 달 가량 걸어서 답사했던 지율 스님도 슬라이드 상영을 하면서 이곳에서 강연했다.

이밖에 공간초록에서는 크고 작은 모임들이 열리고 있다. 이 집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혼자거나 친구끼리 와서 지내다가 가기도 한다. 집을 나설 때는 다녀가지 않았던 것처럼 사용했던 물품들을 그 자리에 놓고, 청소도 한다.

'공간초록'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증한 책과 컴퓨터가 있는데, 누구나 읽고 사용할 수 있다.
 '공간초록'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증한 책과 컴퓨터가 있는데, 누구나 읽고 사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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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초록 방에 붙어 있는 편지함에는 많은 사람들이 흔적을 남긴 방명록이 꽂혀 있다.
 공간초록 방에 붙어 있는 편지함에는 많은 사람들이 흔적을 남긴 방명록이 꽂혀 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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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명록의 글을 읽어보면 공간초록이 얼마나 중요한 집인지 알 수 있다.

"아이들과 함께 왔습니다. 어제도 오고 오늘도 왔습니다. 도시 속의 숲이라고 할까요. 혼동 속의 여유라 할까요. 감사하는 맘 가득 담고 갑니다. 멀지 않은 곳에 마음을 쉴 수 있는 곳이 있어 삶을 다시 돌아봅니다"(2006년 12월 6일. 보리).

"대구공동육아협동조합 '씩씩한 어린이집'에서 '여행학교'로 다녀갑니다. 편안함으로, 아름다움으로 다가온 공간이었습니다. 차를 마시면서 나눔과 연대를 배웠습니다. 어린 시절 공동의 가치를 일깨우는데 얼마나 소중한 기억인지 새삼 느꼈습니다. 하나하나 손길과 마음을 주셨을 여러분에게 감사드립니다"(2009년 8월 2일).

"우리 곁에 이런 공간이 있어 바쁜 일상 잠시 내려놓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공간초록에 오면 좋은 사람들이 있고, 움직이지 못하는 사물들도 참선한 도인처럼 정물이 되어 내 마음 속에 박힙니다. 누가 놓고 갔는지 모르는 책 한 권, 시간 구애받지 않고 읽어 내려 갑니다. 일상의 시계를 봅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나 봅니다"(2008년 6월 2일 '구들장' 회원 황미란).

"늘 공간을 이용하면서 방명록 한번 안 썼네요. 어제 저녁 녹색평론 100호 발간 기념 행사 뒤 두고 온 게 있어 아침 일찍 찾으러 왔다가 텅빈 공간에 혼자 새 소리 듣고 이것저것 정리하다 방명록을 읽어 보아 한 줄 적습니다. 어제의 행사 열기는 어디 가고, 치우지 못한 겨울 난로는 앉아 있네요. 언제 와도 참 좋은 공간입니다."

공간초록에는 누구나 와서 마실 수 있도록 차를 마련해 놓았다.
 공간초록에는 누구나 와서 마실 수 있도록 차를 마련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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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9일 '생명은 대안이 없다' 토론 등 행사

오는 28~29일 사이 공간초록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릴 것 같다. "공간초록 3주년 기념 문화제"와 "2009 생명의 대안은 없다 토론회"가 이틀동안 열리기 때문이다. 부산지역 환경 문화단체들이 마련하는 행사다.

습지와새들의친구 김경철 사무국장은 "공간초록은 2006년 여름에 생명을 사랑하고 무한한 평화를 염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만든 작은 소통의 공간이다"며 "이 후 공간초록은 상주하는 사람 없이 이곳을 다녀가는 모두가 주인인 공간으로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고 많은 모임과 단체들이 애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지역 단체들은 "공간초록이 태어난 지 3주년이 되어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간 공간초록의 운영에 많은 도움을 주신 분들, 이곳의 주인으로서 아낌없이 공간초록을 사용해주신 분들,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는 모든 분들을 모시고 작은 문화행사를 개최하려고 한다"고 밝혔다.

기념문화제는 28일 저녁 7시30분 여는마당을 시작으로 '평상필름'에서 제작한 다큐멘터리 '공간초록'을 상영하고, 이후 백대현, 홍승이씨가 출연해 "빛이 아늑한 방"이란 작품을 공연한다.

29일 오후 3시경 여는마당을 시작으로 '토요음악회'(연주 국악공연팀조선블루스)가 열리고, 이날 저녁 6시30부터 "2009 생명의대안은없다 토론회"가 열린다. 이날 토론회에서는 지율 스님과 김경철 습지와새들의친구 사무국장, 박재현 인제대 교수, 남준기 내일신문 기자가 발제한다.

이 기간 동안 이곳에서는 지율 스님이 지난봄에 찍은 낙동강 사진전이 열린다. 행사 참가비는 무료다.

천성산대책위 손정현 사무국장은 "십시일반으로 전세금도 마련하고, 많은 사람들이 노동을 보태기도 해 공간초록이 만들어졌는데, 그동안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기는 했지만, 도심 속 '소통공간'으로 자리 잡아 나가고 있으며, 이용자들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고 말했다.

부산교대 앞에 있는 공간초록 담장으로, 주변 주택은 담장이 높은데 비해 이곳의 담장은 집 안쪽이 훤히 보일 정도로 낮다.
 부산교대 앞에 있는 공간초록 담장으로, 주변 주택은 담장이 높은데 비해 이곳의 담장은 집 안쪽이 훤히 보일 정도로 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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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초록의 정원.
 공간초록의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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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대 앞에 있는 공간초록 정원에 있는 포도나무에 포도가 송글송글 맺혀 있다.
 부산교대 앞에 있는 공간초록 정원에 있는 포도나무에 포도가 송글송글 맺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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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대 앞에 있는 공간초록의 정원. 봉숭아꽃이 붉게 물들어 있다.
 부산교대 앞에 있는 공간초록의 정원. 봉숭아꽃이 붉게 물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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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대 앞 공간초록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오래 전에 만들어진 우물이 있는데, 지역 주민들은 우물을 보전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부산교대 앞 공간초록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오래 전에 만들어진 우물이 있는데, 지역 주민들은 우물을 보전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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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공간초록, #지율 스님, #습지와새들의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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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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