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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시 30분을 정확히 알리는 핸드폰 시계를 보며 안도를 하고 아프라니 행정국장의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그는 일찌감치 출근하여 밀린 서류들을 바쁘게 보고 있었다. 나를 보자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 애써서 웃음을 보이며 농담을 건넨다.

"차 선생, 얼굴이 좋아보이네요. 가나 생활이 몸에 맞나 봐요?"

빠듯하긴 했지만 그래도 제 시간에 도착했다는 성취감과 빌미를 잡힐 일을 만들지 않았다는 안도감에 나는 깊은 숨을 한 번 더 쉬고 멋쩍은 웃음을 보이고는 행정국장 사무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며칠간 은행 보증서 발부로 신경을 곤두세우다 어젯밤 하루 발 뻗고 단잠을 자겠구나 싶었지만, 더 큰 복병을 만나 하루 종일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4개월 동안 이발을 하지 않아 이제 거의 꽁지머리를 하고 다녀야할 때가 된지라, 반 곱슬 더벅머리가 비와 땀에 젖어 그다지 좋아보일 리가 없을텐데!

내 기분을 가라앉히려고 하는 행정국장의 고마운 말 한마디에 기분 좋게 답례를 건넸다.

"망고를 많이 먹어서 그런답니다!"

가벼운 농담을 두어 번 건네는 동안 역주행을 하며 쌓였던 팽팽한 긴장이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안심할 상황이 아니다. 더군다나 지금 곧 하게 될 면담이 다른 누구도 아닌, 장관을 상대해야 하는 일이라 생각하니 상황의 경중 유무를 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2008년 4월 중순 본 사업을 위한 최종면담 장면입니다. 아프라니(가운데)
▲ 최종 면담 2008년 4월 중순 본 사업을 위한 최종면담 장면입니다. 아프라니(가운데)
ⓒ 차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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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의 돌출행동, 행정국장도 쩔쩔매고 있다

아프라니 행정국장. 실은 그도 지금 곤궁에 처해 있다. 별정직을 제외하고는 가나 교육부 최고 직위인 아프라니 국장은 지금까지 본 사업을 돕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 수원국이라고 해서 주눅이 들지 않고 품위 있게 자존심을 지키며, 자국의 법과 절차를 원칙적으로 강조하다가도 때론 실용적으로 한 발짝 물러서주면서 사업이 원활히 진행되게끔 도와주는 재치를 발휘한다.

면담시에도 한 마디 마디 답변을 주고받을 때마다 깊이 생각해서 대화를 건네는 진중한 분. 거기에다 면담이 끝나면 항상 두 번째 현관까지 배웅을 나와 상대방을 깍듯이 예우해 주는 글로벌한 에티켓을 아는 분. 내가 아프리카에, 가나에 희망이 있다는 것을 항상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는 분이다.

장관의 돌출행동으로 지금 그도 역시 쩔쩔매고 있다. 더구나 본 계약서에 견증서명을 한 장본인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나는 장관에게 전달하기 위해 전날 작성한 면담용 공문을 아프라니 국장에게 건넸고, 그는 단숨에 읽어내려갔다. 그의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았다.

"충분히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더 이상 사업 미루면 안 되잖아요!"

국장은 계속해서 내 심정을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장관을 잘 설득해보자고 다짐을 하고는,
함께 장관실로 향했다. 이른 아침부터 각종 면담이 잡혀있는지 대기실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방송 촬영이 있는지 기자들이 방송카메라를 만지며 인터뷰를 준비하고 있었다.

'장관이 무언가 악의적인 마음을 품고 다른 요구 조건을 제시하지는 않을까?'
'아니면 정말 장관이 이 사업을 더 알고 싶어서 그러는 것일까?'
'장관과 협상을 진행할 만큼 내 영어가 유창하지 않은데, 어떻게 하지?'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무수한 생각들이 머리 속을 헤집고 다녔다.

실은 가나 교육부에서도 이미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는 사실 자체로도, 장관과의 면담을 무의미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해서, 약간은 객기와 배짱을 부려도 될 듯 하나, 특별히 이 사업 과정 하나하나에 집중을 요하는 이유가 따로 있다.

2008년 4월 말 교육부 차관 엘리자베스의 최종 서명 장면
▲ 협의의사록 체결 2008년 4월 말 교육부 차관 엘리자베스의 최종 서명 장면
ⓒ 차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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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말 교육부 차관 엘리자베스의 최종 서명 장면
▲ 최종 서명 2008년 4월 말 교육부 차관 엘리자베스의 최종 서명 장면
ⓒ 차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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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국의 대등한 발언권을 포기할 이유가 없다

이 사업은 정부기관인 KOICA가 NGO 상대로 입찰을 해서 사업관리를 맡긴 사업이다. 'NGO에 맡겼더니 별 볼 일 없더라'라는 말을 듣기에는 솔직히 NGO 활동가로서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NGO가 정부부문과 대등한 협력관계를(Partnership) 가진 채 각자 영역에서 장점을 살려 공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에 조금의 실수나 빈틈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원조사업을 진행하면서, 그 책임소재를 불문하고 수원국 정부기관과 불편한 관계를 만들면 사업의 의미가 반감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 아닌가?

장관과 면담을 하기로 한 시간이 한참 지났다. 장관실에서는 방금 전 대기하던 방송기자들이 인터뷰 녹화를 진행하고 있었다. 약속시간을 한참 넘긴 후 우리 차례가 되어 장관실로 들어갔다.

올 초 대선에서 정권교체가 이루어져 장차관 등 주요 별정직 보직이 대거 바뀌었고 교육부장관도 교체가 이루어졌다.

한 쪽에 손님 접대용 소파가 놓여있고, 장관은 집무용 탁자 건너편에 선 채로 우리에게 악수를 청했다. 나는 탁자 맞은편에 앉았고 아프라니 국장은 둘 사이에 선 채로 장관에게 그간의 경위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중간 중간에 장관은 아프라니 국장의 말을 중단시켰다. 국장은 나보다도 더 많이 긴장해있는 듯했다.

내심 '한국에서 온 사업관리자에게 사업 설명이나 한번 들어보려고 하는 게 아닐까?' 했는데 의외로 장관은 집요하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펼쳐나가는 것이다. 입찰과정과 최종 낙찰 후의 입찰설명회 결과 등에 대해서 설명을 했는데도 잘 수긍을 하지 않는다.

"과연 1개의 건축업체가 그 사업을 잘 끝낼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까? 입찰과정 전체에 대해서 정부의 물품구매 이사회의 감독과 승인, 협의를 거쳤습니까?"

더 이상 말을 에둘러서 할 필요가 없다고 느낀 순간은 바로 이 질문을 받고서였다. 수원국을 동등한 협력관계로 예우하는 것이 중요한 만큼, 지원국으로서의 대등한 발언권을 포기할 이유도 없다.

'물품구매 이사회의 감독과 승인, 협의라니? 사업기간 2년 동안 그러면 입찰만 진행하다가 허송세월을 다 보내란 이야기인가? 그리고 과연 수원국측에서는 얼마나 이 사업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그동안 협조했는가?'

나는 며칠 간 나를 옥죄던 긴장이 이제는 오기로 변하고 있음을 느꼈다. 더 이상 사업 준비만 하며 서류작업에 하루를 보내는 것이 이젠 정말 지칠 때가 되었다.

'망치 소리, 대패 소리 가득한 지역 주민과 날품 노동자들의 떠들썩한 공사현장 소리는 언제 들을 수 있을까? 물동이를 나르는 아주머니들의 질펀한 이야기와 학교를 기웃거리는 아이들의 장난 섞인 이야기들은 도대체 언제 나눌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좀 억울하다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구구절절 항변해보아서 득이 될 게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프라니에게 사인을 보내고 내가 작성한 공문을 읽어줄 것을 부탁했다.

'교육부 장관님

본 사업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2007년부터 사업발굴을 위해 조사단을 파견한 후 벌써 2년도 더 지났습니다. 이제 그 긴 준비과정을 드디어 마감하여, 가나 동부지역 아이들을 위한 튼튼한 학교 건축을 시작하기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본 사업을 진행할 건축회사를 찾아내기 위해 가나의 법규를 따랐습니다. 입찰 과정에 중국과 영국 등 쟁쟁한 외국업체들이 참여했습니다. 그 중 중국회사의 매출액 규모는 여타 가나 업체들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대형업체였으며, 그 업체와 계약했을 시 우리는 보다 편하게 이번 사업을 진행할 여지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가나 현지 업체를 최종 계약자로 선정하기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본 사업을 통해서, 학교를 짓는 것도 중요하거니와 조금이나마 가나 경제 발전에 이로움이 있기를 원했고 또한 이 사업을 진행하면서 가나 건축업체가 더 많은 기술과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것이 주요 이유였습니다.

또한 최종 선정된 회사인 가나 컨크릿은 우리와 사적인 관계가 전혀 없는 회사이며, 입찰 전에 누구도 알지 못했던 회사입니다. 22개 학교를 네 개 구역으로 분할하여 입찰을 추진한 결과 4개 구역 모두에서 상기 회사가 최저가를 제시하였습니다. 또한 연간 매출액과 재정상태 등이 가장 우수하였고, 유사 사업 건축경험이 있고 동 사업지역을 가장 잘 아는 회사였습니다. 또한 예산이 이미 확정된 본 원조사업의 사업비 규모 안으로 가격을 제시한 유일한 회사였습니다. 이를 모두 종합하여 고려하였을 때, 상기 회사를 최종 낙찰하지 않을 다른 어떠한 이유도 없었습니다.

장관님을 비롯하여 많은 가나 공무원들이, 가나 건축업체의 능력에 의심을 하고 있음을 여러 경로를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가나 공무원들이 가나 건축업체를 신뢰하지 못한다면 누가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가나 사람들과 가나 업체를 전적으로 신뢰하는 바탕 위에서 이 사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교육부에서는 업체가 더 최선을 다하여 본 사업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전적으로 지원하고 협조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입을 연 장관,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이미 공문을 읽는 동안, 중국과 영국의 업체를 거론할 즈음 그의 표정에서 흠칫 놀라는 모습을 읽을 수 있었다.

장관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나에게 반문을 하는 것이었다.

"중국과 영국업체도 입찰에 참가했었습니까?"

나는 이것이 절호의 반전 카드라는 것을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물론입니다. 중국에서 두 개 업체, 영국에서 한 개 업체가 참가했었습니다. 그 중, 중국의 한 개 업체의 회사 규모는 나머지 전체의 건축업체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큰 대규모 건축회사였습니다. 국제 입찰이라 중국회사를 거부할 아무런 이유가 없었음에도 이와 같은 철학이 있어서 가나 회사를 선정한 것입니다."

"......"

장관의 침묵에 확실히 쐐기를 박기 위해 마지막 카드를 다시 꺼냈다.

"우리는 이만큼이나 가나 건축업체를 신뢰하는데, 오히려 가나 분들이 더 가나 건축업체를 신뢰하지 못하는군요. 저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

잠깐 동안 침묵이 흐른 후 장관이 다시 말을 꺼냈다.

"음...... 제가 뭘 도와드리면 될까요?"

순간 아프라니 국장과 나의 눈이 마주쳤다. 이제 됐구나 싶은 마음에 서로를 쳐다본 것이다.

나는 이때다 싶어, 가나 정부에서 지원하기로 한 '매칭펀드 사업'을 설명했다. 장관면담을 쉬이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안 그래도 최고 결정권자를 만나서 매칭펀드 지원을 약속받아야 할 터라 지금이 절호의 기회라 생각했다.

300만불 규모의 한국정부 지원에 더해서 가나 정부에서 지원하기로 한 30만불 사업에 대해서 확실히 책임지고 지원해줄 것을 요청했다. 지역 교육청 공무원 역량강화 사업과 장학 퀴즈대회, 그리고 여교사와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자전거 1200대를 지원하는 사업에 대해서 꼭 잊지 말고 지원해주시기를 부탁드렸다.

장관은 명함을 꺼내들더니 개인 핸드폰 번호를 명함 뒷면에 적어서 나에게 건넸다.

"언제든지 어려움 있으면 개인 핸드폰으로 전화하세요!"

나는 어느새 표정관리를 해야 했다. 역주행을 하며 온 몸이 비와 땀으로 젖었던 긴장의 순간을 까마득하게 잊어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큰 소리로 환호를 치고 싶었지만, 애써 진중한 표정을 지으며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고 면담을 마무리 지으려 했다.

"앞으로 진행되는 상황 정기적으로 보고드리겠습니다. 계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지켜봐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서는 순간 본 사업의 지원 약속에 대해 이번에는 장관이 쐐기를 박았다.

2008년 2월 가나 북부지역에서 이루어진 학교건축 첫삽 뜨기(북부지역 도지사)
▲ 첫 삽 뜨기 2008년 2월 가나 북부지역에서 이루어진 학교건축 첫삽 뜨기(북부지역 도지사)
ⓒ 차승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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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장에 조만간 가보고 싶군요. 첫 삽 뜨기가 언젠가요? 저도 꼭 불러주십시요. 가서 응원하겠습니다."

장관실 문을 나오는 순간 아프라니 국장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웃으며 서로 다시 농담을 건넸다. 팽팽하게 조였던 근육들이 갑자기 이완되면서 다리에 힘이 빠졌다. 

"아직 본격적으로 사업을 시작하기도 전인데, 짐 싸서 한국 갈 뻔 했네요."

"하하하. 자, 그럼 이제부턴 다시 뭘 해야 하는 것이죠?"

나는 당장에 사업장으로 내려가서 건축업체에게 학교를 지을 사업부지를 인수인계해야 하는 상황을 설명했다.

주차장에서 숨을 졸이며 신경을 곤두세운 채 면담 결과를 기다리던 사장 스티브와 운전사에게로 갔다.

"지금 당장 판테아크와 군, 베고로 마을로 가자구요. 단, 역주행은 절대 안됩니다!"

덧붙이는 글 | 2009년 6월 24일에 있었던 일입니다.



태그:#가나, #교육부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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