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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기가 시원하게 내리던 어제 오후 현관에서 바라본 ‘만호뜰’. 도로를 경계로 오른쪽은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십자들녘’입니다. 멀리 ‘오성산’도 보이네요.
 소나기가 시원하게 내리던 어제 오후 현관에서 바라본 ‘만호뜰’. 도로를 경계로 오른쪽은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십자들녘’입니다. 멀리 ‘오성산’도 보이네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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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가 끝나고 더위가 며칠 지속되더니 입추(立秋)를 하루 앞둔 6일 오후에는 뜨겁게 달아올랐던 대지를 식혀주는 소나기가 내렸고, 강둑을 넘어온 강바람은 엉덩이까지 시원하게 해주었습니다.

옆집 지붕과 감나무 이파리를 때리는 빗소리는 조화를 이루며 경쾌한 음률로 다가왔고, 앉아만 있기 뭐해서 현관문을 여니까 길 건너 '만호뜰' 벼들도 금방 샤워를 끝낸 피부처럼 윤기가 더하고 생기가 돋는 것 같았는데요. 정겹고 평화로운 농촌 풍경이었습니다.

진초록으로 변해가는 만호뜰을 바라보는데, "지금까지는 괜찮었는디, 앞으로 날씨가 문제지요!"라고 했던 백인영(49세)씨 얼굴이 떠올랐습니다. 며칠 전 만났을 때 벼로 봐서는 앞으로 비가 내리지 않는 게 좋다고 했기 때문이지요.

"벼는 물에서 자라는 식물이잔여요. 근디도 비가 많이 내리믄 흉년들어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헐 때 물이 많여야 허는 게 정상인디, 요즘에 비가 오믄 안 되거든요. 그런 걸 보믄 벼는 굉장히 까탈시런 작물인 것 같어요. 허긴 보리도 그러긴 헌디."

70년대 이전만 해도 봄에 모를 심으면 입추·처서 절기가 들어 있는 달까지 세 벌 김매기를 했는데 당시 사람들은 "지심 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농촌에 와도 허리를 굽히고 김매는 모습을 구경할 수가 없는데요. 백씨는 모두 농약 덕이라며 씁쓸한 입맛을 다시더군요.

시내 아파트에서 논으로 출근하는 농부

 ‘소작인’인지 ‘대지주’인지 헷갈리는 백인영 씨, 환한 표정만큼이나 대화도 시원시원하게 풀어갔습니다.
 ‘소작인’인지 ‘대지주’인지 헷갈리는 백인영 씨, 환한 표정만큼이나 대화도 시원시원하게 풀어갔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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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40대인 백씨는 만년 농사꾼답게 "처서(處暑) 전·후 3일에 비가 오면, 사방 십 리에 곡식 천 석을 감한다"는 속담을 인용하며, 아직은 처서가 보름 넘게 남았지만, 사실은 지금부터가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8월 12-13일쯤에 벼 모가지가 나오기 시작하고 꽃을 피우려고 준비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군산시 나포면 등동리(등불을 밝히고 공부하는 이들이 많아서 붙여진 이름)가 고향이라는 백씨는 조상 대대로 농사짓는 집안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논에 나가 바쁜 일손을 도와주면서 농사를 짓기로 결심하고, 고등학교도 남들이 꺼리는 농고에 입학했다더군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취직해서 근무하는 동안 결혼도 하고, 아이도 둘이나 보고, 시내에 아파트도 구입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기에 직장을 때려치우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는 모은 돈을 부모에게 물려받은 농토를 넓히는데 투자하면서 농사를 적극적으로 짓다 보니까 이제는 논이 직장이 되었다고 하더군요. 요즘엔 보기 드문 40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백씨는 먹고 사는 문제는 아내가 화장품 외판원을 해서 버는 돈으로 해결하기 때문에 농사를 짓는 데 부담이 없다면서 고향집을 홀로 지키는 어머니를 찾아뵙기 위해서라도 논으로 출근할 수밖에 없다며 껄껄 웃었습니다.

그럭저럭 20년 넘게 농사를 짓고 있다는 백씨는 시내 아파트에 살면서 농사를 짓고 있었는데요. 힘들지 않으냐고 물었더니 아침에 일어나면 총각 시절 회사에 출근하는 마음으로 논에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부모가 물려준 농토까지 합해서 지금은 1만 평이 넘는 논을 소유하고 있다기에 "그럼 시골에서는 부자네요!"라고 했더니 손을 저으며 "시골부자, 그거 암껏도 아녀요. 일만 헝게. 머시냐 서울서는 에어컨 나오는 10억짜리 집이서 살어도 서민이라고 허든디"라며 헛웃음을 짓더군요.

- 논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소작을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이왕 농사를 짓는 거, 경지면적을 넓히면 수입이 조금이라도 늘어나니까 남의 논이라도 지으려고 헙니다. 5대 5로 나눠 먹는디, 한 필지(1200평)에서 나락이 마흔여덟 가마를 수확한다고 치고, 스물네 가마를 주기로 계약하는 걸 '늙은 농사'라고 허지요. 하이간 마흔여덟 가마 이상 소출하면 그것은 다 내 것이 되니까 열심히 지어야지요."

올봄에는 1만 평이 넘는 자기 논에 소작까지 더해서 4만 평 논에 모를 심었다고 합니다. 열심히 성실하게 노력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고, 소작인이면서 대지주라는 생각에 웃음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제초제 작업

논둑에서 잡초제거작업에 열중인 백 씨. 농약을 살포하지 않으면 1년 농사가 망한다며 안타까워하더군요.
 논둑에서 잡초제거작업에 열중인 백 씨. 농약을 살포하지 않으면 1년 농사가 망한다며 안타까워하더군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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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갓 모양의 비닐 뚜껑을 논둑 이곳저곳에 얹히고 다니기에 궁금해서 물어봤더니 잡초를 제거하는 약을 뿌리고 있다며 농약이나 제초제를 뿌리지 않고는 농사를 지을 수 없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 친환경농업을 하고 싶은 마음은 없으신지요?
"저 같은 경우는 힘이 달려서 못혀요. 4만 평을 돌아보는 디만 하루가 걸리거든요. 아까도 얘기혔지만, 한 가마라도 더 수확허믄 내 것이 되는디 어떻게 나락이 죽어가는 걸 구경만 하고 있겄어요. 나락 한 가마라도 더 수확할 수 있다믄 제초제를 뿌리고 농약을 살포허는 게 사람 마음 아니겠어요."

백씨는 잡초를 제거하지 않으면 논둑에서 2-3m 안에 있는 벼들이 제대로 자라지를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며 앞으로도 병충해 방제를 최소한 한 번 내지는 두 번은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7일)은 입추(立秋)

선조들은 24절기 중 입춘(立春), 입하(立夏), 입추(立秋), 입동(立冬)을 4계절을 시작하는 절기로, 15번째 절기인 입추에서 처서, 백로, 추분, 한로, 상강까지 여섯 절기 90일을 가을로 쳤습니다. 

입추는 대서와 처서 사이에 들어 있으며, 양력 8월 8일(음력 칠월칠석 전후)경이 되는데, 윤달(5월)이 든 올해는 음력 6월17일이네요. 어쩌다 늦더위가 있기는 하지만, 여름이 지나고 가을에 접어들었다는 뜻으로, 밤에는 서늘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농촌에서는 이때부터 가을채비를 준비합니다.

특히, 김매기도 끝나가고 농촌도 한가해지기 시작해 '어정 7월, 건들 8월'이라는 말이 거의 전국적으로 전해지는데, 이 말은 5월이 모내기와 보리수확으로 매우 바쁜 달임을 표현하는 "발등에 오줌싼다"는 속언과 좋은 대조를 이룹니다.


이달 20일쯤이면 벼꽃이 피기 시작하는데 한 번에 피는 게 아니라 올라오는 순서대로 핀다고 해서 오묘한 신의 섭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보름 후에라도 태풍이 올라오면 먼저 핀 부분은 열매가 열리지 못하더라도 반타작은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지요.  

"조생종 벼를 싶은 사람들 벼 이삭이 5일 정도 늦게 핀 것을 보믄 올해는 작황이 조금 늦은 것 같어요. 어제도 이삭을 까보았더니 잘 보이지 않을 정도(2mm)로 올라왔는디 꽃이 피고 수정이 되어야 열매(벼)를 맺거든요"라며 하늘을 바라보면서 심호흡을 하더군요.  

"우리 부모들은 식구가 7명-10명이 됐어도 농사 열 마지기 지어서 자식을 키웠는디, 지금은 백 마지기를 지어도 자식 둘 키우기가 어렵고 힘들어요!"라고 하기에 더 잘 살려는 욕심 때문 아니겠느냐고 했더니 "생각혀보니까 그렇기도 허네요!"라며 웃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신문고뉴스(http://www.shinmoongo.ne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시골부자, #농사꾼, #제초제, #입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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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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