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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연예기획사)이 원하고 요구하는 어떤 행사, 모임 또는 술자리에 당연히 '노'라고 말할 수 있는 권리가 명시적으로 있었다면 (고 장자연씨가) 절대로 그런 일을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7일 오전 서울 서초동 공정거래위원회 1층 브리핑실. 문제갑 한국방송영화공연예술인노동조합(이하 한예조) 정책위의장은 "장자연씨 사건의 경우 계약서상에 단 한 조항만 없다고 하더라도 보호가 될 수 있었다"며 이 같이 말했다.

 

"술대접, 성상납에 매까지 맞고"... 표준약관 진작 나왔더라면 장자연씨는?

 

실제 고 장자연씨와 소속사 전 대표 김아무개(41)씨가 맺은 전속계약서는 말 그대로 '노예계약서'였다. 특히 장씨는 연예활동과는 무관한 김씨 개인의 사업을 위한 영업용 술자리에도 불려 나간 사실이 경찰 조사에서 확인됐다. 경찰은 김씨에 대한 구속영장에서 "김씨가 고인과 맺은 계약서가 일방적이어서, 고인으로서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강조했다.

 

또한 한예조가 공개한 '연예인 인권 실태 조사' 결과에서도 연기자 5명 중 1명이 '본인이나 동료가 성상납을 강요받았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원로배우 임동진씨는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에서 "(방송사 PD들이) 술대접, 성상납, 해외여행 티켓에 골프접대까지 받는다. 심지어 지금은 (접대 갈등 탓에) 외주제작사 대표에게 매를 맞는 시대"라고 개탄했다.

 

고 장자연 사건 재수사로 연예계의 술·성상납 파문이 다시 일고 있는 가운데 공정위가 이른바 '노예계약' 풍조를 바로잡을 연예인 전속계약서 표준약관을 제정·발표해 주목된다.

 

공정위는 이날 브리핑에서 "대중문화예술인의 정당한 권익을 보장하고, 연예산업의 공정거래질서 확립을 위하여 가수와 연기자를 중심으로 한 대중문화예술인 표준약관 2종을 심사·공시한다"고 밝혔다.

 

공정위는 특히 "대중문화예술인 표준계약서 제정 작업을 진행하는 도중에 (지난 3월) 고 장자연씨 사건이 발생, 연예기획사 측의 부당행위에 대해 국민들의 관심이 많아졌고, 이러한 관심과 연예계의 자정노력이 표준계약서 제정을 앞당긴 측면이 있다"고 강조했다. 결과적으로 고 장자연씨 사건이 '제2의 장자연'을 막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 마련에 기폭제가 된 셈이다.

 

"연기자에게 부당한 자리 참석 요구 거절 명문화"

 

이날 공정위가 공시한 표준전속계약에는 그간 연예인과 연예기획사 간의 고질적 문제로 지적됐던 연예인의 사생활 보장 등 인격권 보호를 위한 조항이 명시됐다(가수 2조2항, 5조5항, 연기자 2조2항, 4조5항).

 

연예기획사 측이 연예인의 사생활을 과도하게 침해할 수 있는 조항들은 없애고(대내적으로 침해 금지) 더 나아가 연예기획사는 연예인의 사생활이 대외적으로도 침해되지 않도록 연예인을 보호할 의무를 강화한 것. 예를 들어 연예인이 항상 자신의 위치를 기획사에 통보하게 하거나, 사생활 일체를 연예기획사와 미리 상의하여 기획사의 지휘감독을 따르도록 한 조항 등이 삭제됐다.

 

또한 기획사가 연예인의 사생활이나 인격권을 침해하거나 침해할 우려가 있는 행위를 요구하지 못하도록 별도 규정을 만들었고, 연예인은 기획사측의 부당한 요구에 대해 거절할 수 있도록 명문화했다. 고 장자연씨의 경우처럼, 만일 기획사측이 연예인에 대해 인격권 침해행위 등을 요구하면, 연예인은 이를 거절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계약해지 및 손해배상청구도 가능하게 됐다.

 

이날 기자회견에 참석한 홍종구 한국연예매니지먼트협회 부회장은 "인격권이나 사생활 보호 조항은 사실 기존의 연예계약서 조항에 들어가지 않았다"며 "연기자에게 일방적으로 부당한 자리에 참석하는 등의 요구를 거절할 수 있는 장치로 활용될 것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문제갑 정책위원회 의장 역시 "장자연씨가 자살까지 이르게 됐던 저간의 배경을 볼 때, 이번 표준약관은 (기획사의) 인권침해적이고, 배타적인 권력의무를 정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지시하고 복종해야 되는 불합리한 조항에 대해서는 철저히 배격했기 때문에 수용했다"고 강조했다.

 

 

연예인 계약기간 7년 제한... 대형기획사 "투자한 돈 어떻게 해?" 반발

 

공정위의 표준전속계약에서 또 하나 눈에 띄는 점은 연예인들의 장기계약기간 설정을 제한하거나 해지권을 강화했다는 점이다. 공정위는 연기자에 관한 전속계약서의 경우 계약기간을 7년으로 제한했다. 다만 계약기간 중에라도 당사자들 간의 합의에 따라서 계약갱신이나 연장이 가능하기 때문에 실제 연예활동에 제약을 주는 부분은 크지 않다는 게 공정위의 설명이다.

 

가수의 경우에는 계약기간의 제한은 없지만, 7년이 경과한 경우에는 연예인이 계약 해지를 주장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경우에도 해외활동을 위해서 장기계약이 필요하거나 교육 등 장기간 소요되어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는 당사자 간의 합의에 따라 해지권 행사를 제한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대형기획사 측은 "신인가수들을 체계적으로 발굴·육성 및 수익창출을 위해서는 10년이 넘는 계약기간이 필요하고, 굳이 소속 가수들이 원한다면 계약기간 자체는 문제 삼을 것이 없다"는 입장이다.

 

실제 지난 4월 공정위 측에 표준계약서안을 만들어 심사청구했던 연예제작자협회(이하 연제협)의 경우, 공정위가 최종 결정을 앞둔 지난 3일 심사청구를 취하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연예인의 계약기간 조항 때문이었다.

 

대형기획사들을 위주로 한 연제협은 "신인들을 훈련시켜 정상적인 궤도에 오르기까지는 장기의 계약기간이 필요하고, 그 계약기간은 당사자들이 자율적으로 판단하여 결정할 수 있도록 해야지, (공정위의) 표준계약서처럼 7년이 넘으면 가수에게 해지권을 주는 것은 현실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막대한 투자를 통해 오랜 기간 신인들을 발굴·훈련시켰는데, 7년 후에 계약해지를 요구하면 그에 따른 피해는 어떻게 보상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이에 대해 공정위는 "연제협의 주장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장기계약은 신인에게는 불리한 계약조건을 유지함으로써 가수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고, 대형 연예기획사들이 실력 있는 연예인들을 장기 보유함으로써 중소 연예기획사들의 시장진입을 곤란하게 하는 경쟁제한의 폐해를 유발한다"고 반박했다.

 

문제갑 한예조 정책위의장도 "연기자나 가수들 입장에서는 활동을 가장 왕성하게 하는 20대에 장기계약에 묶이게 되는 경우, 자신이 배우로서 또는 가수로서 그 인생을 모두 걸어야 되는 기간이 된다"며 "그것이 최장 10년을 초과하면 사실상 재기의 기회를 노리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이밖에 공정위의 표준계약서는 ▲연예인 자신의 연예활동에 대한 통제권 강화 ▲연예인의 저작권 및 저작인접권(실연권) 보호 ▲연예인의 자유로운 경제활동 보장 및 수익의 정기지급 ▲계약상 권리이전은 연예인의 사전동의 필요 ▲연예활동에 따른 비용 부담 관계 ▲중재제도 이용(선택) 가능 ▲연예인의 인성교육 및 정신건강지원 등을 명시했다.

 

표준계약서 자율 적용, 실효성 있을까?... "갑과 을, 지위관계 변하지 않을 것"

 

그러나 이날 공정위가 공시한 표준전속계약서는 강제사항이 아니라 기획사가 자율적으로 사용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따라서 이번 표준계약서로 인한 실효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공정위는 "이 계약서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약관법 위반에 따른 여러 제재를 받을 수 있다"며 "(표준계약서 외의 계약서는) 우리가 제시한 조항과 다른 부분에 대한 설명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경우 계약서로서 효력이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공정위는 또 "무엇보다 약관법이 아닌 민법에 따른 손해배상의 의무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많은 기획사들이 표준전속계약서를 사용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반면 문제갑 정책위의장은 "공정위의 표준계약서가 실질적으로 연예인들의 인격권 등을 보호하는데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보느냐"는 질문에 "절대 그렇지 않다"고 답했다. 문 의장의 부연설명이다.

 

"이제까지의 관행으로 봤을 때, 갑과 을의 관계는 표준계약 여부를 떠나서 항상 우월적 지위와 상대적으로 열등한 지위에서 계약을 체결 할 수밖에 없다. 앞으로도 그런 지위관계는 절대 변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개인과 소속사의 계약에 대해서 저희 대중문화예술인들이 공동으로 감시의 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사실상 실효성은 없다."

 

그는 "지금까지의 계약 관행들에 대해 철저히 감시하고, 잘못된 것에 대해 시정을 요구하는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은 채 시장에 자유로운 계약으로 내맡겨 놓는다면 표준약관은 공염불이 될 것"이라며 "오히려 표준약관이 정해진 지금 시점부터 저희의 본격적인 일이 시작됐다"고 강조했다.


태그:#고 장자연 사건, #연예인 노예계약, #표준전속계약서, #술접대, 성상납, #대형기획사와 연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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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너머의 진실을 보겠습니다. <오마이뉴스> 선임기자(지방자치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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