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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고인(古人)

.. 나는 그렇기 때문에 철두철미하게 고인(古人)의 기록을 검토합니다 ..  《선사상》 1985년 4월호 22쪽

'철두철미(徹頭徹尾)하게'는 '빈틈없이'나 '꼼꼼히'나 '찬찬히'로 다듬습니다. '검토(檢討)합니다'는 '살펴봅니다'나 '둘러봅니다'로 손보고, '기록(記錄)'은 '글'이나 '책'으로 손봅니다.

 ┌ 고인(古人) : 옛날 사람
 │   - 고인의 지혜
 │
 ├ 고인(古人)의 기록을 검토합니다
 │→ 옛사람 글을 살펴봅니다
 │→ 옛날 사람 글을 헤아립니다
 │→ 옛날 분들 글을 돌아봅니다
 └ …

죽은 사람을 가리키는 한자말 '故人'이 있습니다. 이 말과 헷갈릴까 보아 '고인'이라고만 적지는 않고 '古人'을 붙여 주었구나 싶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한자를 넣어 주어서 얼마나 알아보기 좋아졌을는지 궁금합니다. 다른 묶음표 한자말도 그러하지만, "고인의 기록"으로 적을 때하고 "고인(古人)의 기록"으로 적을 때하고, 어느 쪽이 더 알아보기에 나을까 궁금합니다. 늘 그렇듯, 한자말 '고인'을 아는 사람한테는 묶음표에 넣은 한자가 군더더기이고, 한자말 '고인'을 모르는 사람한테는 묶음표에 넣은 한자가 쓸모없는 노릇 아닌가 싶습니다.

조금만 생각해 보면, 러시아말로 무언가 끄적일 때 '묶음표를 치고 러시아말을 밝혀 놓는다' 할 때에 누가 알아보겠습니까. 프랑스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스페인말이나 독일말이나 덴마크말이나 매한가지입니다. 히라가나로 일본말을 밝힌들, 알파벳으로 헝가리말을 밝힌들, 아랍말과 사우디말과 이란말을 밝혀 준다 한들, 어느 누가 알아보겠습니까.

한자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묶음표를 치지 않아도 알아보고 알아채고 잘 새깁니다만, 한자 지식이 없는 사람한테는 묶음표 치기란 그저 '글쟁이 겉멋'일 뿐입니다.

 ┌ 고인의 지혜
 │
 │→ 옛사람 슬기
 │→ 옛날 사람 슬기
 └ …

이 보기글을 들여다보면, '철두철미'며 '검토'며 '기록'이며 같은 한자말이 보입니다. 이 글을 "徹頭徹尾하게 古人의 記錄을 檢討합니다"처럼 적는다면 알아보기에 한결 낫겠습니까? 또논, "철두철미(徹頭徹尾)하게 고인(古人)의 기록(記錄)을 검토(檢討)합니다"처럼 적어야 글맛이 나겠습니까?

사람들한테 낯선 토박이말을 '우리 말 살리기'라도 되는 양 섣불리 끼워넣는 글쓰기도 얄궂고, 사람들한테 까다로운 한자를 집어넣어 '알아보기 좋도록 한다'는 셈이라고 내세우는 글쓰기도 얄궂습니다.

지난날에는 이처럼 한자를 집어넣었는데, 이제는 온통 알파벳을 집어넣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자도 그렇고 알파벳도 그러한데, 모두 지식 자랑입니다. 제 잘난 지식을 '지식 얕은 사람 앞에서' 우쭐거리려고 내뱉는 꼴입니다.

 ┌ 옛사람이 남긴 글
 └ 옛사람이 보여준 슬기

우리는 내 너른 뜻과 내 따뜻한 마음을 나누려고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얼마나 잘났고 똑똑한지를 자랑하려고 글을 쓰거나 말을 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됩니다.

글쓰기나 말하기는 모두 나눔입니다. '자선-적선-동정'이 아닙니다. 글쓰기나 말하기는 한결같이 어깨동무입니다. 나 스스로 높은 자리에 올라선 채로 여느 사람을 내려다보면서 깔보거나 업신여기는 '권력-권좌-기득권'이 아닙니다.

내 삶을 오롯이 보여주면서 손을 맞잡는 글쓰기요 말하기입니다. 내 삶으로 가까이 다가서면서 함께 이 땅에서 살아가려는 몸짓과 품앗이가 글쓰기요 말하기입니다.

사랑으로 쓰는 글이고, 믿음으로 하는 말입니다. 지식으로 쓰는 글이 아니고, 권력이나 명예로 하는 말이 아닙니다.

ㄴ. 환상(幻想)

.. 그 당시 그를 휩싸고 있었던 열(熱)이 낳은 하나의 환상(幻想)과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  《존 밀턴/임상원 옮김-아레오파지티카》(나남,1998) 60쪽

'그 당시(當時)'는 '그때'로 다듬습니다. '열'은 한자를 따로 밝히지 않고 한글로 '열'이라고만 적으면 될 텐데요. 또는 '바람'으로 다듬거나.

'하나의'는 덜어내거나 '이른바'나 '이를테면'으로 손봅니다. "같은 것이었는지도"는 "같았는지도"로 손질합니다.

 ┌ 환상(幻想) : 현실적인 기초나 가능성이 없는 헛된 생각이나 공상
 │   - 환상이 깨지다 / 환상 속에 살다 / 환상에 사로잡히다
 │
 ├ 하나의 환상(幻想)과 같은 것이었는지도
 │→ 어떤 부질없는 생각과 같았는지도
 │→ 이른바 헛된 생각과 같았는지도
 │→ 꿈과 같았는지도
 └ …

우리 말로는 '헛된 생각'이나 '허튼 생각'입니다. 또는 '부질없는 생각'이거나 '덧없는 생각'입니다. 헛된 생각은 한 마디로 '꿈'입니다. 꿈 가운데에서 참으로 부질없는 꿈이라면 '개꿈'입니다.

 ┌ 환상이 깨지다 → 꿈이 깨지다
 ├ 환상 속에 살다 → 꿈속에 살다
 └ 환상에 사로잡히다 → 꿈에 사로잡히다

철학을 펼치고 언론학을 펼치는 자리라 '개꿈' 같은 말을 쓰기에는 알맞지 않다고 느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기는, 생태와 환경을 걱정한다는 분이 글을 쓸 때 보면, 돼지똥이나 닭똥이나 사람똥으로 땔감을 얻는다고 하는 이야기를 펼치면서 "돈분과 계분과 인분으로 연료를 제조한다"처럼 말씀하더군요. 이제는 세상이 바뀌어 '땔감'이 아닌 '燃料'라고만 해야 하는지 모릅니다만, 이런 낱말은 이렇게 바꾼다 하여도, '돈분-계분-인분'으로 적어야 할 까닭까지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똥은 그예 '똥'이 아니겠습니까. 돼지고기는 '돼지고기'일 뿐, '돈육'이 아니지 않습니까.

 ┌ 그무렵 그를 휩싸고 있던 바람이 불러들인 어떤 꿈과 같았는지도 모른다
 ├ 그때 그를 휩싸던 바람에 따라 품던 어떤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 …

'품위' 지키기라고 할까요. 양복을 차려입어야 예의를 지키고 품위를 살린다고 여기듯, 손쉽게 말하거나 글쓰면 품위가 없고 예의를 안 차리는 듯 여긴다고 할까요.

우리 스스로 '헛생각'이나 '헛꿈'이나 '바보꿈' 같은 낱말을 새롭게 빚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저 '환상'에만 머물면서 에헴에헴 헛기침이나 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세상에 자유와 민주가 조금씩 널리 자리잡는다고 하지만, 속살을 들여다보면 자유와 민주를 마음껏 누리지 못하도록 외려 더 억누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자유로운 옷차림이 없는 학교요 사회입니다. 자유로운 말나눔이 없는 학교요 사회입니다. 민주다운 매무새와 차림새가 없는 학교와 사회와 군대와 마을입니다. 민주다운 넋과 얼로 서로 어깨동무할 수 없는 학교와 사회와 군대와 마을, 여기에 국회와 행정기관과 언론매체와 시민단체가 아닌가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우리 말과 헌책방 이야기] http://hbooks.cyworld.com
[인천 골목길 사진 찍기] http://cafe.naver.com/ingol



#묶음표 한자말#한자#우리말#한글#국어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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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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