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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건강한 숲과 빌딩숲의 차이

 

풀숲을 거닐다 보면 수없이 많은 생명이 살아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 곁에 살고있는 작은 곤충들과 동물들을 이젠 도감으로나 보고, 곤충이라고는 기껏해야 인간이 있는 곳이라면 늘 함께 사는 모기나 파리 혹은 바퀴벌레 정도나 본다. 그것들 조차도 친한 곤충들이 아니니 바퀴벌레 같은 것을 만나면 비명부터 내지르는 아이들도 많다.

 

건강한 숲에서는 다양한 생물이 어우러져 살아가지만 건강하지 못한 곳은 몇몇 종(種)만 살아간다. 빌딩숲은 오로지 인간만 살아갈 수 있게 만든 공간으로 건강하지 못한 숲이다. 더불어 살아가는 모습을 보지 못했으니, 당연히 교과서적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오늘 교과서의 주된 내용은 '약육강식', '경쟁'의 논리로 "강한 자만이 살아 남는다!"는 것이다.

공존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 '나 홀로 독식하기'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나는 단언한다.

 

자연과 소통하고 싶어하는 것은 본능

 

어릴 적에는 풀벌레 소리와 개구리의 울음소리와 산새 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었다. 이른 아침에 조잘거리는 새소리는 또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모른다.

 

빌딩숲에 살다보니 풀벌레 소리는 커녕 술취한 행인들의 고함소리와 바삐 지나가는 자동차소리, 사이렌 소리 등등 도심의 소음에 잠을 이루지 못한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자연으로부터 독립해서 살아갈 수 있을까?

 

도시인들은 주말이면 자연으로 향한다. 오랜만에 만난 자연과 소통하기보다는 도심의 스트레스를 자연에 고스란히 남기고 돌아오는 소비지향적인 패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재충전을 하는 것을 보면 인간은 끊임없이 자연과 소통하고 싶어하는 근본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마음까지 어떻게 나무라겠는가?

 

여름, 이제 곧 휴가철이 다가오고 빌딩숲에서 건조한 삶을 살아가던 도시인들이 대자연을 찾아 떠날 것이다. 소비지향적인 여행을 따라가기 보다는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여행을 가고 싶다면 자연을 바라보는 눈을 가지라고 권하고 싶다.

 

 

좋은 추억은 고난을 이겨내게 하는 명약

 

풀숲을 바라보면 작은 들꽃부터 곤충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명들이 살아 숨쉬고 있는지 깜짝 놀란다. 그 중에서는 우리와 결코 친해질 수 없는 것들도 있긴하지만 대부분은 언젠가 한번쯤은 보았던 것들일 것이다. 이름을 알지 못해도 언젠가는 한 번쯤 보았던 그들, 사실 그런 어린 시절들이 있기에 빌딩숲에서 살아가면서도 추억을 먹으며 힘든 시간들을 견뎌내는 것이 아닐까?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이다음에 어른이 되었을 때 무엇을 추억할 것인가?

자연적인 것들에 대한 추억은 없고 오로지 인공적인 것들, 학원에 대한 것들만 남아있다면 그들의 추억은 얼마나 척박할까 싶다.

 

 

풀숲 여기저기에서 뛰어다니고, 날아다니고, 기어다니는 생명들을 보면서 나는 '우리 아이들도 이런 것들을 보면서 자라야 할 터인데'했다. 풀숲에 들어왔다가도 작은 곤충만 보아도 비명을 지르는 그런 아이가 아니라, 저것들도 다 우리와 함께 더불어 살아야할 생명이라는 생각을 하는 그런 아이로 자라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생각해 보면 곤충들을 대하는 어릴 적의 행동들은 잔인했던 것 같다. 벼메뚜기를 잡아 구워먹는 것은 기본이고, 개구리 뒷다리 구워먹기, 풍뎅이 다리를 떼어 돌리며 놀기, 잠자리 꽁지에 강아지풀 같은 것을 끼워 시집 보낸다고 날려보내며 누가 멀리 날아가나 시합도 했다. 그들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그런 것들 하나하나가 좋은 추억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고난을 이겨내게 하는 명약이 되었다.

 

 
수많은 정보 가운데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얼마나 되나?
 
현대사회는 모든 삶의 영역이 속도전을 치르듯 빠르게 진행된다.
어쩌면 놀라도 될 것들까지도 신속하게 안방까지 파고들고, 사소한 일도 언론에서 확대시키면 무척이나 중요한 일로 인식을 하게 된다. 수많은 정보들 가운데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은 얼마나 될까?
 
우리가 받아들이는 정보 중에서는 몰라도 될 것들이 더 많다.
정보의 홍수를 겪다보니 대화의 자리에서 어떤 특정한 인기 TV프로그램에 대해 알지 못하면 끼어들 수 없는, 왕따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한 것이다. 왜 우리가 시시콜콜한 연예인들의 일상까지 다 알아야 할까?
 
빌딩숲이 주는 스트레스, 자연과 동떨어진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느끼는 소외감은 깊이있는 인간을 추구할 수 없게 만든다. 자극적이고 일회적인 것들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없어도 되는 것들은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것이다.
 

 
내가 보았던 것을 우리의 아이들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어릴적 흔하게 보아왔던 참개구리도 요즘은 흔하게 볼 수가 없단다.

그런데 어디 참개구리 뿐인가? 얼마나 많은 것들이 우리 곁에서 사라졌는지 모른다. 아이들은 이제 도감에서나 이런저런 곤충들이 있구나 알 수 있을 뿐이다.

 

도감으로 보는 것과 실물로 보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누군가 꾸민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착한(?) 그림책으로 동물 이름을 척척 외운 아이가 야생 살모사를 만나도 무서운 줄 모르고 쓰다듬어 주고 싶다고, 왜 그림책에 나오는 뱀처럼 예쁘지 않냐고 했단다.

 

세계적으로 하루에도 수십 종이 종들이 멸종되어가는 심각한 지경임에도 우리는 그 심각성을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 자연과 소통하지 못하는 빌딩숲에 살아가니 피부로 느끼지 못할 수밖에. 그러나 최소한 우리가 보았던 것들, 그것은 우리의 아이들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우리 기성세대가 할 일이다.

 

물길을 바꾸고 산을 밀어내고 터널을 뚫는데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구불구불 강물도 보존하고, 그 곁에서 더불어 살던 생명들도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할 것이 아닌가?

 

 

생명있는 모든 것들에게 감사를

 

자신이 오늘 살아있음에도 감사를, 또다른 살아있는 모든 생명들에게도 감사를 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 유토피아적인 발상일까? 아니, 그것이 기본적인 삶의 양태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다른 생명들이야 어찌되든 말든 나만 잘 먹고 잘 살겠다는 마음은 결국 자신의 목에 칼을 겨누는 형국이다. 생명의 범주에는 사람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곤충과 동물을 위시하여 풀꽃과 나무와 산, 온 우주를 감싸고 있는 것들 모두를 포함한다 할 수 있다.

 

현 정부가 진행하고 있는 4대강 살리기에 대해서 접근할 때에도 '경제성이 있네, 없네!'하는 식의 찬반논란은 본질에서 먼 이야기다. '경제성이 없으니 접으라'고 주장한다면 경제성만 담보되면 함께 가겠다는 말과 다르지 않은 이야기다. 물론 데이터를 산출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로 인해 4대강과 더불어 살아가던 생명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더 중요한 것이다.

 

생명은 경제적인 것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것, 그러나 사회가 혼탁해져 돈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었으니 그것 역시도 우리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임에도 여전히 살아가는 생명들, 그 모든 것들에게 감사를 해야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이 모든 생명을 우리의 아이들도 또 그 아이들의 아이들도 보게해야 하지 않겠는가?

덧붙이는 글 | 곤충의 이름이 잘못된 것이 있으면 바로잡아 주십시오. 곤충도감을 보며 실물과 비교해 보았지만 여전히 헛갈리는 것 투성이 입니다.


태그:#곤충, #자연, #교육, #생태, #4대강 살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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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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