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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이이'...  민박집 현관문의 벨이 울렸다. 

안 그래도 나 또한 나가야 할 참이여서 '아주머니 제가 나가면서 문 열어 줄게요. 일 보세요'라고 말하고는 얼른 가방을 챙겨 1층으로 내려갔다.

현관문을 열어주자 한 한국인 아가씨가 그 흔한 캐리어 하나도 없이 앞뒤로 묵직한 배낭들을 하나씩 메고는 '고맙습니다' , '여기 ** 민박집 맞나요?'라며 씩씩하게 인사를 건넸다. ' 고맙기는요. 저도 마침 나가봐야 할 참이었어요, 3층으로 올라가시면 아주머니 계실 거예요'라고 내 쪽에서도  답인사를 건네고는 얼른 집을 나왔다. 그리고는 뒤돌아 닫혀지는 문틈으로 다시 한번 그녀의 앞뒤로 상체를 가리고도 남을 만큼 무겁게 멘 배낭들을 슬쩍 훔쳐보면서 '세상에… 저렇게 여행하는 사람도 다 있네… 아니 캐리어가 싫으면 등 뒤에 큰 배낭을 하나를 준비하던가, 세상에! 앞 뒤로 곧 쓰러질 것처럼… 중심 잡기도 쉽지 않겠어…"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거리로 나섰다.  

유럽여행 중 한 기차안에서의 경원이
▲ 여행 중인 경원이 유럽여행 중 한 기차안에서의 경원이
ⓒ 배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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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나와 경원이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녀가 무려 114일간의 여행 일정이며 여행 시작 17일 만에 악명 높기로 유명한 이탈리아에서 캐리어를 통째로 소매치기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다행히 여권과 유레일패스 그리고 돈 같은 중요한 물품들은 몸에 소지하고 있었지만 잠깐 전화하는 사이에  옆에 놔두었던 캐리어가 통째로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었다. 114일간의 여행에서 17일.. 이라면 앞으로 남은 기간이 무려 97일이고 이는 석 달이 넘는 긴 시간이었다. 

그녀가 신고 있던 양말을 벗으면서 말을 이어갔다. "이것도 제 것이 아니에요. 캐리어 안에 옷이며 화장품이며 중요한 것들이 많이 들어 있었거든요. 하지만 캐리어 잃어버렸다고 여행을 그만 둘 수는 없겠더라구요. 사실 여행을 준비할 때 어느 여행가 한 분이 '예상치 못한 상황을 즐기라'고 했던 말씀이 기억 나긴 했지만 막상 세계적으로 악명 높은 이탈리아 도둑들에게 털린 어느 여행자의 슬픈 이야기' 주인공이 내 자신이 되니까 정말 당황스럽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더라구요. 처음엔 그냥 눈물만 나고 아무 생각이 안났어요. 그런데 여권과 유레일패스 등은 지니고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생각하자라며 스스로를 추스르고 계속 여행을 하는게 옳은 길 같더라구요.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고 나서 '신은 나에게 뭘 가르쳐주실려고 하시는 걸까??'를 생각하면서 힘들게 다음 여행지로 갔어요. 그렇게 해서 이곳 오스트리아까지 온 거예요."

그녀에게서 나오는 믿어지지 않는 이야기들에 어안이 벙벙해져서 동그래진 눈을 더 크게 하고는 '아니 그러면 양말과 그 옷가지들은 어떻게 된거야? 그 이후에 다시 다 산거야? 본인 것이 아니라는 말은 또 무슨 말이야?'라고 물었다.

"여행지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이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제가 여행을 계속할 수 있게 도와주셨어요. 숙박비를 깎아주신 민박집 사장님, 자신이 쓰던 배낭, 옷, 화장품, 양말 등 아끼지 않고 나눠주시는 분들, 심지어 속옷까지 주시는 분들도 계세요. 한번은 같이 묵던 여자분이 본인이 입던 건데 괜찮다면 빨아줄테니 입으라고 하시면서 속옷을 내주시더라구요. 그건 정말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것 같아요. 이렇게 그런 분들에게서 다시 여행할 수 있는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 일들을 통해 이제까지 작게만 생각했던 것들이 제게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새삼 깨달았어요. 잃어버리고 나니까 '사소한 것, 사소한 일은 없다. 다만 사소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있다'라는 말이 생각나서 저 자신한테, 그 물건들한테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몰라요. 작은 것, 아니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나한테 오는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여행을 계속하기로 결심한 걸 지금은 너무 잘했다고 생각해요. 포기했더라면 이렇게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쳐버렸을 테니까요."

그것 역시 누군가가 주었다는 배낭 속에 이것저것 소지품을 챙기면서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녀의 얼굴을 나는 빤히 들여다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건강한 얼굴 위로 몇 년 전 나의 얼굴이 오버랩되었다. 사실 내게도 엇비슷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남도를 혼자 자전거로 일주할 때 하루 종일 먼지와 땀으로 뒤범벅이 된 나를 돈 한푼 받지 않으시고 서스름 없이 자신의 집안으로 들여 밥과 방을 제공해주신 분들에 대한  기억이 그녀의 이야기 속에서 되살아 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평생 잊을 수 없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나는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그녀의 삶도, 내가 그러했듯 그 전과 이후가 분명 다르겠구나, 라는 생각도 슬쩍 스치고 지나갔다.

경원이
▲ 그 힘든 여정에서도 웃음과 열정를 잃지 않았던 경원이 경원이
ⓒ 배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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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자의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 우린 얼마 전 서로 다시 연락이 닿았다. 여행 동안 겪어냈던 우여곡절보다는 요즘 환율이 높아져서 그 때 다녀오기를 정말 잘했다고 능청을 부리는 그녀가 여행 이후 무엇이 가장 달라진 것 같냐고 묻는 나의 편지에 "짐 잃어버렸을 때처럼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된 것이요. 여행을 통해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되었어요. 내가 행복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찾아보니까 셀 수가 없더라구요…"라고 적어 보냈다. 

여행은 일상에서는 얻기 어려운 수많은 우연들과의 조우이다. 또한 모든 삶이 그러하듯 예고 없이 행과 불행이 밀어닥치곤 한다. 그리고 그 앞에서 어떤 선택을 내리는가에 따라 그것은 전혀 다른 경험들로 채워지고 완전히 다른 색을 발산한다. 석 달이나 남은 여행에서 순간의 불행 속에 '포기'라는 단어를 선택하지 않았던 그녀가 얻어낸 가치는 바로 그 어디쯤이라고 나는 짐작해 본다. 그녀의 용기와 따뜻한 마음의 사람들이 만들어 낸 97일은 작은 기적이었다. 다 털린 그녀에게 잃어버린 것들이 하나 둘 채워져가고 그녀의 여행이 계속 될 수 있었던 것이 기적이 아니면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여행을 완전히 다른 색으로 바꾸어 버렸다. 불행과는 정확히 저 반대 편에 있는 그 무엇으로…. 

그리고 편지 속에서 그녀는, 그 이름을 '행복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작년 유럽 여행을 하고 직접 겪거나 만났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쓰고 있는 것들 중 하나입니다.



태그:#여행, #행복한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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