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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름끼치는 일이다. 누군가가 나의 일거수일투족 사생활을 엿보고 있다면. 불행하게도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현상이다.

그래서 일어나는 집단탈출이 자유를 찾아 떠나는 '망명'이다. 새터민(탈북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정보화 시대에 살고 있는 대한민국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다. 비록 가상공간인 인터넷에서의 '사이버 망명'이지만, 현실세계를 반영하는 사회적 병리현상이다.  

나도 그저께 인터넷 세상의 새로운 사회현상인 사이버 망명에 합류했다. 해외에 서버를 두고 있는 인터넷 업체의 이메일 주소를 새로 마련한 것이다. 평소 뛰어난 선행은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불법행위나 부정행위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나였지만, 이번에는 왠지 불안했다.

검찰이 최근 MBC <PD수첩>의 광우병 문제 보도와 관련한 수사결과 발표를 통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한 여성 작가의 일상의 사생활이 담긴 이메일을 낱낱이 공개하는 것을 보면서, 참 세상이 무서워졌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내가 무슨 책을 읽나 나의 서재를 멀리서 누군가 망원경으로 감시하고 있고, 내가 잠자면서 무슨 잠꼬대를 하나 나의 침대를 누군가 도청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특별한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불길한 예감과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머리카락이 불쑥불쑥 솟는 오싹함이다.

최근 PD수첩 수사 결과를 발표한 서울지검 정병두 1차장 검사. 사진은 지난 2월 9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대회의실에서 '용산철거민 참사'에 관한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모습.
 최근 PD수첩 수사 결과를 발표한 서울지검 정병두 1차장 검사. 사진은 지난 2월 9일 오전 서울 서초동 서울중앙지검 대회의실에서 '용산철거민 참사'에 관한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모습.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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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최측근 인사마저 사이버 망명을 하는 세상

그런데 나만 느끼는 일이 아니었다. 이명박 대통령의 최측근 국회의원은 개인정보 침해 우려 때문에 이미 오래전부터 해외 이메일을 갖고 있다고 한다. 권력자들도 겉으로는 "개인의 사생활은 철저히 보호되고 있다"고 말은 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오래전 은밀히 사이버 망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과 권력자들은 이미 다리를 건너 도망간 뒤 한강대교를 폭파했는데도, "서울을 끝까지 사수하겠다"는 이 대통령의 말을 믿고 피난을 가지 않다 뒤늦게 사실을 알고 부랴부랴 피난길에 나서는 서울시민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도 뒤늦게 진실을 알고, 이런 사이버 피난민 행렬의 뒤꽁무니에 합류한 것이다. 

현직 대통령의 핵심 실세마저도 불안해 사이버 망명을 하는 나라. 기막힌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보통 사람으로서 요즘 대한민국에서 살아가기는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더욱 섬뜩할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기본과 인본주의의 마지노선이 무너져 내리고 있으니 말이다.

경제적으로 힘들거나 심리적 고통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주는 마지막 보루인 인간성이 붕괴될 때다. 보수든 진보든 서로의 정책과 노선을 비판할 수 있지만, 상대의 인간성을 부정하거나 파괴해서는 안 된다. 인격 살인이나 여론재판은 어느 쪽에도 겨눠서는 안 되는 인본주의의 마지노선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개인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를 인정하고 프라이버시(사생활)를 철저히 보호하는 것은, 보수든 진보든 누구나 지켜야할 철칙이다. 자유민주주의와 인본주의를 지지한다면. 따지고 보면 개인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도 마음속의 내밀한 프라이버시다.

어떤 경우에도 당사자의 허락 없이는 개인의 그 내밀한 머릿속과 마음의 프라이버시를 파헤치거나 들여다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 국가권력이든 타인이든 주체가 누구든지, 정치적 이유든 개인적 호기심이든 어떤 목적에서든 마찬가지다.

머리나 마음속으로는 어떤 상상과 사고를 하던 무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의 기본전제다. 창의력의 발판인 상상의 자유만큼은 아무도 간섭하지 말자. 그 내밀한 개인의 사고가 겉으로 표출되어 폭력적 행동으로 분출하거나, 공동체의 안녕을 심각하게 파괴하기 전까지는.

선생님은 "절대로 남의 일기장을 열어보지 마라"고 했는데

대한민국은 드디어 개인의 내밀한 프라이버시까지 감시하는 'BBS(빅 브라더의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 사상과 양심의 자유마저 통제하기 위해 개인의 마지막 성역인 프라이버시까지 들여다보는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전체주의 사회가 떠오른다.

다시 권력의 충견이 된 검찰과 국정원이 쌍두마차로 뛰고 있다. 검찰은 '법의 이름'으로 앞에서 노골적으로, 국가정보원(국정원)은 '국가보안'을 내세워 뒤에서 은밀히. 옛날 그대로다.

검찰은 치졸했다. 검찰은 이런저런 이유를 대지만, 한 여성 프리랜서 작가의 개인 이메일까지 파헤쳐 공개하는 태도는 정말로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괴기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죽은 시체가 벌떡 일어나 목덜미를 갑자기 잡아당기는 좀비영화 <레지던트 이블>과 <새벽의 저주>의 소름끼치는 광경이 오버랩 된다.

검찰은 이번 한 작가의 개인 이메일 공개 뿐 아니라, 이미 올해 초 무리한 '미네르바' 구속과 서울시 교육감 선거에서 진보세력 단일후보였던 주경복 후보에 대한 선거법 위반혐의 수사를 하면서 무려 7년 치의 이메일을 압수수색했다. 

피의자 인권과 개인의 프라이버시 보호에 대한 고려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과정에서도, 검찰은 마치 혐의사실을 스포츠나 재난사고 중계방송 하듯 일일이 공개하고 일기예보처럼 브리핑했다. 법과 절차에 의한 재판보다는 여론재판을 즐기는 검찰의 모습이었다.

우리가 초등학교 다닐 때, 선생님이 가장 강조했던 말은 "도둑질 하지 마라"와 함께, "절대로 남의 일기장을 열어보지 마라"는 것이었다. "99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한사람의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법치주의의 정신이자 수사의 기본원칙이 아니던가.

검찰이 범죄혐의가 있는 곳에 대해 수사하는 것은 당연한 임무다. 그러나 수사를 하더라도, 개인의 인권과 프라이버시를 보호하는 법정신을 준수하면서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 '품위 있는 수사', '품격 있는 검찰'의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는가.

검찰은 정부에 비판적인 사람을 마치 옛날 반정부 인사나 빨갱이처럼 사상범으로 다루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민주주의의 다양성은 사라지고, 경직화된 이념의 획일성만 남았다. 정정당당한 검찰상은 이미 권력의 눈치 보기에 길들여진 검찰에 대한 너무 무리한 기대일까.

검찰은 정보화 시대에 인터넷이 차지하는 개인 인권과 프라이버시의 개념에 대해 무지한 것인가, 아니면 권력의 요구에 맞는 '맞춤형 수사'를 위해 이를 애써 무시하는 것인가.

인터넷에 정부 정책과 관련한 허위 사실을 게재한 혐의(전기통신기본법 위반)로 구속 기소됐다 자난 4월 20일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난 '미네르바' 박대성씨
 인터넷에 정부 정책과 관련한 허위 사실을 게재한 혐의(전기통신기본법 위반)로 구속 기소됐다 자난 4월 20일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난 '미네르바' 박대성씨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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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화 시대의 안방은 인터넷과 핸드폰

정보화 시대의 인터넷은 오래 전부터 나만의 휴게소이자 안방이고, 사랑을 속삭이는 은밀한 연애방이고, 책을 읽고 생각하는 사색의 서재고, 친구와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는 대화방이고, 비밀의 일기장이다. 책상의 컴퓨터에 있는 인터넷 공간은 모든 우리의 일상이 이뤄지는 나만의 성이다.

정보화 시대, 유비쿼터스 사회에서 우리의 모든 생활은 인터넷과 핸드폰을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인터넷과 핸드폰을 감시한다면, 우리에게 남는 자유란 존재하지 않는다. 권력이 나의 머리와 마음까지도 통제하는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의 세상이다. 끔찍하다.

검찰만 그런지 알았더니, 국정원도 움직이기 시작했다고 한다. 국정원이 시민단체 <희망제작소>에 대한 일반기업의 후원을 중단시켰다는 박원순 변호사의 폭로를 보면, 국정원의 행보도 예사롭지 않다.

지난해 2008년 정보수사기관이 감청한 전화번호와 전자우편(이메일) 주소 건수는 9004건으로 사상최대치를 기록했다. 놀라운 사실은 검찰과 경찰 등 수사기관의 건수는 해마다 줄어드는데, 정보기관인 국정원의 건수는 급증해 지난해 감청 대상의 98.5%인 8867건을 차지했다. 국가 보안을 위해 꼭 필요한 합법적인 감청은 필요하겠지만, 박원순 변호사의 폭로에서 보듯 최근 민간인 사찰 재개를 보인 국정원의 행태는 불안감을 주기에 충분하다.

야당이던 한나라당은 지난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당시, 불법적인 도청 뿐 아니라 국정원이나 수사기관의 합법적인 감청의 증가까지도 온 국민을 도청하고 있다며 얼마나 정치적으로 공격했는가. 국민의 프라이버시 보호를 그렇게 강조하던 한나라당의 모습은 이제 여당이 되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인권과 프라이버시 보호의 주장은 여당이든 야당이든 아름다운 모습인데.
 
좀비가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검찰과 국정원의 최근 무분별한 인터넷 수색과 감청은 MB정부 들어 새로이 나타난 신종 좀비 바이러스다. 그것의 존재는 누리꾼들에게는 공포감 그 자체이며, 그로인해 나타난 사회적 병리현상이 바로 사이버 망명이다.

사이버 망명! 공포로부터의 탈출, 자유를 향한 여정이 지금 우리 사회에서 봇물처럼 터지고 있다. 정보화 사회에서 개인의 사상과 양심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지켜주는 최후의 성벽이자 안식처인 인터넷이 권력형 좀비의 침입으로 오염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이버 망명은 권력과 누리꾼 사이에 빚어지고 있는 심각한 갈등의 다른 표현이며, 21세기 세계 최강의 인터넷 강국인 대한민국에서 펼쳐지고 있는 아이러니다. 처음 '게시판 망명'과 '블로그 망명'으로 시작된 사이버 망명은 이제 '이메일 망명'까지 인터넷상에서 전방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너도나도 프라이버시 보호를 위해 서버가 외국에 있는 해외 인터넷 사이트로 활동무대를 옮기는 것이다.

MB 정부 출범 이후 인터넷 실명제에 이어 사이버 모욕죄 도입과 통신비밀보호법 개정 추진, 나아가 검찰과 국정원이 정보화 시대의 안방인 인터넷과 전화번호를 마구 뒤지는 행위에 대한 국민의 자구수단이요, 정당방위고, 자위행위다.

우리 사회는 언제부터 육체만 있고 정작 인간성의 본질인 영혼은 없는 좀비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까지 지배하고 통제하고 조작하는 무시무시한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의 사회를 보는 듯하다. 영화 <레지던트 이블>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좀비에 쫓겨 죽음의 도시 라쿤 시티를 필사적으로 탈출하듯, 인터넷상에서는 지금 권력의 감시망에서 벗어나려는 사이버 망명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다.

물론, 인터넷 세계에도 절제되지 않은 분노의 표출로 인한 명예훼손과 말초적 감각에 의한 포르노 등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는 부정적 측면이 있다. 어느 정도의 합리적 규제는 필요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터넷의 규제는 사상과 양심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 비밀의 자유, 프라이버시 보호 등의 본질적 가치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

MB정부와 검찰이 합작으로 몰아치는 인터넷과 프라이버시 초토화 작전을 중단하지 않는 한, 자유로운 정보화 사회를 꿈꾸는 누리꾼들의 사이버 망명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현실세계가 아닌 가상의 공간이라고 하더라도, 내 나라를 포기하는 사이버 망명은 모두에게 슬픈 일이다.

15세기 '플라잉 더치맨'과 21세기 '플라잉 코리언'의 전설

대한민국 누리꾼들이 나라를 잃고 인터넷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사이버 망명객으로 전락하는 것이 이명박 대통령이 내건 '실용'은 아니지 않은가. 이 대통령이 내건 '실용'은 좌우의 극단적 이념을 뛰어넘어 상생과 통합의 정치가 아닌가. 이 대통령은 어떻든 자국민인 누리꾼의 사이버 망명 행렬을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

2009년 대한민국은 점점 조지 오웰의 가상 국가 <오세아니아>가 되어 가고 있다. 남아공 희망봉 앞 바다에는 15세기 당시 대항해 시대를 주름잡던 네덜란드 선원들 사이에, 신의 저주를 받아 영원히 육지에 내리지 못하고 바다를 헤매는 유령선 '플라잉 더치맨(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의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21세기 대한민국이 선도하는 인터넷 시대에, 가상의 국적을 잃고 인터넷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플라잉 코리언(방황하는 한국인)'의 전설이 만들어지고 있다. 이제는 조국을 떠난 사이버 망명객을 다시 대한민국의 품으로 안아야 할 것이 아닌가.

MB가 꿈꾸는 세상이 정보화 시대의 감시권력인 'BBS(빅 브라더의 사회)'가 아니라면 말이다. 자유에 대한 차별, 참 가슴 아픈 현실이다. 내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의 아픔이 나의 국적을 "코리아!"라고 국가 설정을 못하는 상처로 남은 누리꾼의 고통을 알까.

덧붙이는 글 | 김성호 기자는 16대 열린우리당 국회의원을 지냈습니다.



태그:#사이버 망명, #MB, #좀비, #조지 오웰, #빅 브라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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