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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에서 부산으로 가는 경부 고속도로를 달려 거의 경주에 닿을 때쯤이면 건천과 청도로 빠져나가는 I.C가 나온다. 여기서 내려 요금을 정산하고 나면 바로 좌우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닿는데, 오른쪽으로 가면 곧장 좌측에 제법 큰 호수를 낀 채 청도 운문댐으로 넘어가는 고개를 오르게 된다. 만약 운문댐이나 운문사에 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고, 한번쯤 가벼운 등산을 할 요량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호수 끝자락쯤에서 왼쪽으로 접어드는 길로 내려갈 만하다.

이정표에는 "단석산 신선암, 김유신 수련 장소"라는 내용의 안내가 적혀 있다. 마을 들머리의 공영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걷기 시작하면 대략 1시간 후 신라 천년 고찰임을 자랑하는 신선암, 김유신이 수도 생활을 했다는 거대한 바위 절벽에 새겨진 국보 199호 마애불상을 거쳐 단석산 정상에 오를 수 있다. 그리고 단석산 정상에는 김유신이 두 토막 내어놓은 바위가 오랜 풍상을 견디고 여전히 남아 찾아오는 이들을 반겨준다.

김유신이 17세 때 삼한통일을 염원하며 칼로 내리쳐 단숨에 반토막을 내었다고 전하는 단석산 정상의 바위
 김유신이 17세 때 삼한통일을 염원하며 칼로 내리쳐 단숨에 반토막을 내었다고 전하는 단석산 정상의 바위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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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석산(斷石山)'이라면 '돌을 자른 산'이라는 뜻이다. 단석산의 이름은 김유신이 화랑 시절 이 곳에 들어 무예를 수련하던 중 산 정상에 있는 큰 바위를 칼로 내리치면서 천지신명에 기원하기를 "이 바위가 둘로 갈라지면 삼한일통이 이루어지고, 아니 갈라지면 통일이 되지 않는 것으로 알겠나이다"고 했는데, 마침내 유신의 칼에 바위가 정확하게 두 동강 났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었다.  

신선암과 마애불상은 단석산 거의 정상에 있다. 신선암은 신라 천년 고찰이라고는 하지만 당시 건물도 아니고, 현재 면모 또한 옹색하여 비록 보잘 것 없지만, 암자 바로 옆에 버티고 있는 마애불상은 보는 이의 숨을 가로막을 만큼 장엄하여 경주 가는 길이라면 누구나 반드시 들러야 할 곳임을 깨닫게 해준다.

국보 199호인 이 마애불상은 사람 키의 여러 길이나 되는 거대한 바위가 절벽처럼 날카롭게 갈라진 한복판에 있다. 마애불상이라면 절벽 바위에 새겨진 불상이라는 뜻이니, 신라인들의 불국정토 정신이 진정 얼마나 높은 경지였는지를 새삼 느끼게 해준다. 게다가 이 거대 바위의 틈새에서 소년화랑 김유신이 애끓는 수련을 하였다니, 이 곳에 들른 여행객은 누구나 한번쯤 지구상 유일의 분단국가인 오늘의 우리 현실을 돌이켜보며 두 손 모아 통일을 염원하게 된다.

단석산 신선암 마애불상은 비바람에 의한 국보의 마멸을 막기 위해 거대한 보호막으로 하늘까지 덮어놓았다.
 단석산 신선암 마애불상은 비바람에 의한 국보의 마멸을 막기 위해 거대한 보호막으로 하늘까지 덮어놓았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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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천 IC에서 그렇게 우회전을 하면 단석산 신선암과 김유신 바위로 가게 되지만, 그 반대로 좌회전을 하면 금세 건천 읍내로 들어간다. 건천(乾川)은 '마를 건'과 '내 천'이 결합한 지명이니, 이는 건천읍 일대를 흐르는 시내 강바닥이 지질상 너무나 배수가 잘 되어 늘 한발이 발생하였기에 그렇게 마을 이름이 붙여졌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과연 읍 소재지를 관통하며 흐르는 시내를 보면 정말 물이 없다. 근래 경북 일대에 가뭄이 심해 그런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건천에 사는 주민에게 물어도 "물이 콸콸 흐르는 것을 본 게 어느 소싯적 일인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고 대답하는 것을 보면 지명 그대로 이곳은 정말 건천인 듯하다.

건천 읍내 유일의 사통오달 사거리에서 경주 방면으로 우회전을 하면 이내 도로 좌우로 크고 작은 고분들이 한곳에 모여있는 광경이 나타난다. 길은 고분군 한복판을 가로지르며 뚫려 있다. 큰 것이 24기, 작은 것도 14기나 있어 모두 38기의 고분이 운집하여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이곳은 분명 옛날에는 대단한 세력가나 소국의 웅거지였을 터인데, 감히 그 가운데를 뭉개고 예전에 없던 신작로를 내었으니 왕년의 권력가와 그 후손이 여전히 당당한 세도를 누리고 있다면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할 풍경이리라.

길가에서 바라보는 금척 고분군. 단석산 등으로 에워싸인 분지에 38기의 크고 작은 무덤들이 놓여 있어 고분군 중에서는 아주 이채롭다.
 길가에서 바라보는 금척 고분군. 단석산 등으로 에워싸인 분지에 38기의 크고 작은 무덤들이 놓여 있어 고분군 중에서는 아주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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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능선을 타고 거의 정상까지 줄지어 분포되어 있는 고령 주산의 대가야 고분군. 금척고분군은 산에서 멀리 떨어진, 완전 평지에 설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른 고분군들과는 크게 다르다.
 산능선을 타고 거의 정상까지 줄지어 분포되어 있는 고령 주산의 대가야 고분군. 금척고분군은 산에서 멀리 떨어진, 완전 평지에 설치되어 있다는 점에서 다른 고분군들과는 크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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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분들은 무엇인가. 이처럼 고분들이 한 곳에, 그것도 평지에 운집해 있는 모습은 다른 곳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광경이다. 경북 고령의 주산(主山)이나 성주의 성산(星山)에도 많은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지만, 그래도 그 곳 무덤들은 지명 그대로 산줄기에 자리하고 있다. 물론 먼 뒷날 사람들이 자꾸만 산허리를 개간하는 바람에 결과적으로 밭기슭에 놓이게 된 고분도 전혀 없지는 않다. 하지만 여전히 대부분 고분들은 산등성이나 거의 정상에 버티고 있다. 이 곳 건천읍 금척리의 고분군 분포가 다른 지역의 그것과는 그 양상이 전혀 다르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고분들이 발등만큼의 구릉도 없는 완전한 평지에 집중적으로 설치된 것으로 보아 이곳에는 만만하지 아니한 역사적 까닭이 있을 법하다. 과연 어떤 전설이 전하는지 건천읍 홈페이지 중 금척리의 '지명 유래'를 살펴보았다.

금척(金尺)은 전설에 의하면 신라시조 박혁거세의 꿈에 신인(神人)이 나타나 그에게 금자(金尺)를 주었는데, 꿈을 깨 보니 손에 그것이 쥐어져 있었다. 이상하게 생각되어 꿈에 가르쳐준 신인의 말대로 죽은 사람을 금자로 재니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고, 병든 사람을 재면 병이 나았다. 소중하게 간직하여 나라의 보물로 자자손손 물려오던 중 당(唐)의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이 신기한 금자를 보여달라고 요청하였다. 왕은 이를 거절하기 위한 수단으로 38기의 무덤을 만들어 금자를 감추었다. 그 후 이 금척 고분(金尺古墳)의 이름을 따서 (이 마을을) '금척' 이라고 부르기 시작하였다.

세월이 흐르자 대단한 권력가의 무덤 위에는 나무가 아름드리로 자라났다. 어찌 인간의 권력이 자연의 섭리를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세월이 흐르자 대단한 권력가의 무덤 위에는 나무가 아름드리로 자라났다. 어찌 인간의 권력이 자연의 섭리를 이길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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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홈페이지의 '관광 안내' 중 '금척 고분' 부분도 살펴본다. "건천읍지"의 내용을 옮겨 실었다는 설명이 붙어 있는 안내문을 맞춤법이 틀린 부분과 오자를 고쳐가며 읽어본다.

금척(金尺)이란 글자 그대로 황금으로 만든 자(尺)라는 뜻이다. 그 옛날 신라 진평왕이 정사(政事)를 보다가 낮에 깜빡 졸고 있었다. 눈앞에 일곱 무지개가 곱게 나타나더니 금으로 된 황금자 하나를 건네 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왕은 졸음에서 번뜩 깨어났다. 그런데 그때 꿈속에서 신선으로부터 받은 그 황금자가 거짓말처럼 바로 눈앞에 놓여져 있는 것이었다. 죽은 사람도 그 자로 재면 다시 살아나고, 가난한 사람이 소원을 빌면 무엇이든 소원대로 이루어진다고 하는 그런 자였다. 나라의 모든 부귀와 영화도 그 자를 가진 사람에게만 한한다고 하는 보물이다. 그 덕택인지 신라는 날로 번창해 갔다.

그러나 진평왕대에 이르러, 신라에서는 하늘에서 내린 황금의 자가 있어서 날로 국력이 부강해진다고 하는 소문이 당나라 황제 귀에 들어가게 되었다. 황제는 이것을 자기 손에 넣고 싶어하였다. 그래서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바치지 아니하면 당장 많은 군사를 일으켜 나라를 쳐부수고 말겠다는 협박을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진평왕은 머리를 싸매고 자리에 누웠다. 그러다가 한 가지 계책을 세웠다.

왕은 백성들을 충동하여 여기에 크고 작은 여러 개의 가짜 왕릉과 같은 고분을 만들게 하였다. 이것이 바로 황금자가 묻혀있는 금척이다. 왕릉 같기도 하고 봉황대 같기도 한 큰 무덤들이다. 왕은 이 어느 고분 속에 자신만 알 수 있도록 혼자서 이 금자를 묻어 두었다. 이 일로 인하여 당나라 신하들과는 금척의 줄다리기를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진평왕은 급병으로 그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결국 황금의 자를 묻은 고분은 진평왕밖에 모르는 영원한 비밀이 되고 말았다.

일제시대 때 일이다. 고증(考證)을 받은 역사학자들이 황금자가 탐이 나 발굴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맑은 하늘에서 '우왕탕탕' 뇌성 번개가 치더니 비가 쏟아졌다. 하늘이 노한 것이다. 사방에서 시커먼 먹구름이 몰려들고, 밤낮 1주일간 빗줄기가 끊일 줄 모르게 내리 퍼붓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일대는 대홍수(大洪水)가 났다. 일본인 발굴단은 부득이 철수하는 길 밖에 없었다. 그 뒤로는 누구도 이 금척 고분에 손을 대지 못했다. 해방(解放)과 6.25사변을 거쳐 반세기가 훨씬 지나도 금척리 고분은 말없이 그대로 있다.

두 인용문 사이에는 서로 약간 다른 내용이 보인다. 금척이 이 세상이 나타난 시점을 한 곳에서는 박혁거세 때라고 말하고 있고, 다른 곳에서는 진평왕 때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당나라 황제가 금척을 내놓으라고 한 것은 박혁거세왕 때보다 훨씬 뒷날의 일이고, 그것을 감추기 위해 38기의 무덤을 조성했다는 내용은 두 기록이 일치된다. 아마도 당나라 황제가 금척을 빼앗으려고 시도한 것만은 틀림이 없는 것 같다. 그랬으니, 일제가 금척을 찾기 위해 도굴을 시도한 것도 틀림이 없는 역사적 사실일 터이다.

단석산을 뒤로 하고 노을이 지는 무렵, 금척고분 위로 하늘이 곱다.
 단석산을 뒤로 하고 노을이 지는 무렵, 금척고분 위로 하늘이 곱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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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 묻힌 금척은 매장 당사자인 진평왕이 급사한 이래 아무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 되었다. 그러므로 당연히 도굴을 시도한 일제도 그것을 손에 넣을 수는 없었다. 죽은 사람을 살리고, 가난한 사람을 단숨에 부자로 만들어주는 신이한 금자가 도굴범의 손에 들어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늘이 진노하여 일제의 도굴 행위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는 기록은 분명 실제 사건임에 분명하다. 전해져 오는 설화의 시간과 장소가 분명하고 증거물이 남아 있으면 신화(神話)나 민담(民譚)이 아닌 전설(傳說)로 인정한다는 국문학적 관점과 관계없이, 도굴이 시도되자 갑자기 폭우가 연일 쏟아지고 뜻밖의 대홍수가 범람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우리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이제 금척 고분군이 산자락과는 거리가 아득한 평지에 조성된 연유를 알 듯하다. 금척을 내놓으라는 당나라 황제의 요구에 따르지 않기 위해 진평왕은 긴급히 큰 무덤들을 축조하였다. 당나라에서 사람은 오고 있고, 금척은 부랴부랴 감추어야 한다. 그러자니 시간이 없다. 높은 산에 대형 무덤들을 만들다가는 완성 이전에 당나라 사람들이 들이닥칠지도 모른다. 공사를 하기 쉬운 곳이 바로 평지이다. 무덤 수만 많으면 당나라 사람들은 금척이 묻힌 봉분을 간파해낼 재주가 없고, 다 파헤치는 데에는 너무나 긴 세월이 요구된다. 그래서 평지에 이처럼 많은 고분이 생겨난 것이다. 하지만 당나라 사람들이 돌아간 뒤 진평왕 본인이 급사하는 바람에 금척이 묻힌 봉분은 영원한 수수께끼가 되고 말았다.

사람에 견줘보면 고분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사람에 견줘보면 고분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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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금척 고분군은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 경주시에서는 100억원의 예산을 들여 이곳 일대를 역사공원으로 새롭게 정비하고 단장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 결과 고분군에 바로 인접한 집들은 철거되었고, 이전 대상에 들어가지 않은 단 두 집만 사람이 살고 있다. 찾아오는 이도 드물고, 거주하는 주민도 별로 없지만, 죽은 사람을 살려내고 가난한 이를 부자로 만들어낸다는 금자가 묻혀 있다는 이곳 금척고분군.

사시사철 어느 때 방문하여도 평지를 가득 메우고 있는 고분들과 고목들, 광활한 풀밭과 갖가지 꽃들, 멀리 배경을 이루고 있는 단석산의 곡선까지, 이 모든 것들이 아름답게 어우러진 풍광은 참으로 곱고 아름답다. 머잖아 역사공원으로 꾸며지고 나면 고풍스럽고 자연스러운 지금의 맨얼굴은 다시 보기 어려워질 것이다. 고분군 사이를 거닐다가 혹여 금척이라도 발견하면 진시황의 불로장생에 대한 염원을 오늘에사 완성해낸 위대한 인류사의 혁명가로 역사에 남을 수도 있다! 경주에 간다면 꼭 금척고분군에 가보고, 단석산에도 한번 올라보자.

고분 꼭대기에 사람이 섰지만, 고분이 너무나 큰 나머지 마치 평지에 사람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고분 꼭대기에 사람이 섰지만, 고분이 너무나 큰 나머지 마치 평지에 사람이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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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금척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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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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