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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를 달리던 차가 갑자기 툴툴거리면서 이내 멈추고 말았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차들이 빠른 속도로 뒤따라 달려오고 있었다. 운전사는 도로 한 복판에서 연거푸 시동을 다시 걸어보려 하지만 늦었다. 트로트로(미니 완행버스)가 긴 여생을 마감하는 순간이다. 덕지덕지 붉은 허물을 뒤집어 쓴 차는, 오른쪽으로 한참이나 차체가 기울어진 것이, 벌써부터 얼마 못가 운명을 다할 것을 직감한 터라, 탈까말까를 고민했었다. 이번이 두 번째, 내가 탄 차가 이렇게 고속도로 위에서 위험스럽게 멈춘 채 자연사하고 있었다.

 

 

도로 한 복판에서 시동이 멈춘 차를 끌고 가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봐온 터다. 그 뿐인가? 트로트로 엔진이 멈추어버리자 승객이 일제히 내려서 도로 가에서 운전수나 조수와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도 이젠 그다지 새로울 것 없는 광경이다.

 

드디어 내 차례가 온 것이었다. 트로트로를 타고 해안도로를 달리는데 차가 멈춰버린 것이다. 스무 명이 조금 못되는 승객들은 웅성웅성 거리면서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죽는 순간까지 남은 힘을 아낌없이 바친 그 육중한 몸체가 이 세상과 작별을 고하는 찰라, 누굴 원망해봐야 소용없는 일이다. 차라리 한 평생을 거쳐 몇 개의 대륙을 떠돌다 노쇠한 몸으로 아프리카 주민들의 고단한 삶과 동반한 그 거룩한 충성에 경의를 보내는 게 맞다. 나는 다행히 약속시간이 한 참 남아 있는데다, 바로 손만 뻗으면 닿을 코앞에 대서양이 펼쳐져 있어 이 순간을 여유롭게 즐기기로 했다. 꼬마 녀석들 서넛이 바닷가에서 옹기종기 모여 장난을 치고 있는, 평화로운 한 낮의 대서양이었다.

 

트로트로에는 운전수와 별도로 조수가 있다. 우리나라에도 80년대 어느 시기까지는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역할은 비슷하다. 좁은 트로트로 안에서 승객이 다음 내릴 동네 이름을 이야기하면, 조수는 운전수에게 큰 소리로 차가 멈출 장소를 외치고, 차가 정차하면 조수는 문을 열고 맨 끝의 접이식 의자를 들어올린 후 승객을 보낸다. 그리고 다시 문을 닫고 출발을 외치면 된다. 또 하나 더 있다. 트로트로 어디에도 목적지가 표시되어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조금이라도 모여 있는 곳을 지날 때마다, 조수는 큰 소리로 그 차가 어디까지 가는지 지명을 수십 번씩 반복하면서 외치는데, 반복되는 음이 너무 빨라, 아직 트로트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일 경우 조수의 입 모양과 말 그리고 몸짓에 집중해서 눈과 귀를 가져가야 한다.

 

 

사람도 동물도 나무도 꽃도 살아있는 것들은 모두 한번 생을 마감하는데, 생명이 없는 것들도, 노년으로 이렇게 자연사하며 생을 마감한다는 것을 여기에 와서야 제대로 알게 되었다. 물론 가나에서, 값이 꽤나 나갈 것 같은 고급 신형 차량들 또한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지만 한 달 월급이 10만원도 채 안되는 사람들이 태반인 이곳에서, 서민들이 그나마 큰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는 유일한 교통수단은 바로 이 트로트로 밖에 없다. 이렇게 연로한 차를 타고 가다, 그 노쇠한 육체가 죽음을 고하는 위태로운 순간을 끝도 없이, 그리고 예고도 없이 접해야만 하는 주민들을 생각하니 안타깝기만 하다.

 

시원한 바닷바람을 힘껏 들이마시고는, 우여곡절 끝에 항구도시 테마에서 다시 수도 아크라로 입성했다. 일요일 저녁 7시, 최종 건축업체 선정을 위해 서강열 상무가 도착하는 시간이다. 일찌감치 공항 근처 호텔로 가서 시간을 보냈다. 여기 도시에선 외국인이 휴식을 취하기 위해 갈만한 곳이 그다지 많지가 않다. 정부 부처 중에 관광부가 있기는 하나, 서아프리카의 경우 동아프리카에 비해 무슨 연유에서인지, 빼어난 자연경관에도 불구하고 아직 관광산업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다.

 

가나에서의 생존법을 하나 설명하자면 이렇다. 조금이라도 시간적인 여유가 생겨 편안하게 쉬고 싶을 경우, 돈을 안들이고 가장 쉽게 휴식을 취하는 방법은, 좀 괜찮다 싶은 호텔에 무작정 들어가는 것이다. 운이 좋을 경우 무선 인터넷 접속도 무료로 가능하고, 호텔 로비에서는 에어컨이 시원하게 스물 네 시간 가동이 되는지라, 지친 몸을 쉬기에 충분하다. 에어콘이 가동되는 좋은 차를 타고 이동하지 않는 이상, 도로에서 쏟아지는 배기가스 미세 분진을 엄청나게 들이 마셔야하고, 한낮에 머리로 쏟아지는 태양의 기운이 너무 강열하기 때문에 매우 쉽게 피곤을 느낀다. 얼굴 위로 쏟아진 먼지를 털어내고 잠시라도 휴식을 취하며 다음 일정을 준비하려는 나그네에게, 경비가 들지 않는 최적의 장소는 뜻밖에도, 화려한 고급호텔들이다.

 

 

가나에는 퍽이나 호텔업만 유독 발달한 듯 하다. 지금도 국제적 수준의 대형 고급호텔들이 우후죽순처럼 공항 인근에 새로 들어서고 있다. 가나는 금과 코코아가 국가수입원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데, 여기에다 올 해부터 원유가 생산되는지라 수많은 사업가들이 물밀 듯이 가나를 방문하고 있다. 몇 주 후면 미국 대통령 오바마가 아프리카 대표로 가나를 방문하는데, 이것만 봐도 가나가 아프리카 전역에서 정치, 경제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공항에서 도보로 오 분 거리, 공항신도시(Airport City)에 새로 지어진 한 호텔로 찾아들어갔다. 호텔 안은 과연 우리나라의 여느 고급 호텔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신식으로 지어졌다. 하루 20세디(2만원) 하는 게스트하우스의 가격에도 놀라, 얼마 전부터 항구도시 테마에서 기거하고 있는데, 하루 방값이 무려 200~300달러라니, 현지인들의 월급 두세 배와 맞먹는 금액이다. 이런 매머드급 호텔의 소유주마저도 거개가 다 외지인들이라 하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아직 그 내막은 잘 파악하지 못했지만, 많은 고급 음식점, 호텔, 쇼핑몰 등의 소유주가, 아직까지 정치적으로 안정되지 않는 중동의 국가 레바논 사람들이다. 레바논 사람들이 가나에 정착한지는 꽤 오래 전 일이며, 최근에는 많은 중국인과 인도인들이 사업과 관련하여 가나로 진출하고 있다.

 

 

나는 마치 투숙객처럼 뻔뻔스럽게 로비에 있는 소파에 앉아 컴퓨터를 켜고 이러저런 밀린 일을 하기 시작했다.  현지인 한달 월급의 두 배 넘는 하루 방값을 받는 호텔에서, 지나가는 나그네 한명 쉬어가는 것을 허락하지 못할까 생각하며 배짱을 부리려 했지만, 컴퓨터 작업을 위해 전기를 사용하는 것도 생각하면, 손해 보는 것은 아니다 싶어 커피 한잔을 주문했다.

 

온 몸이 이완되어 그동안의 피로가 밀려와 소파 속으로 끈적거리며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순간, 어디선가 귀에 익은 음악이 흘러나왔다. 긴장이 풀린 몸으로 흐믈흐믈 공기를 타고 들려오는 소리의 음원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누군가 피리를 불고 있고, 그 옆에서는 한번도 본적 없는 악기로 몇몇이 음악을 연주하고 있었다. 호텔 밖은 과연, 풀장이 있고 파라솔 아래선 백인들과 아랍인들이 더러 현지인들과 섞인 채 맥주를 마시며 한낮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고, 그 옆에서 하얀 가운을 입은 주방장이 열심히 바비큐를 손질하고 있었다. 음악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모두 30도를 훨씬 웃도는 한 낮의 뜨거운 태양을 즐기고 있었다. 호텔 경내 밖에서 잔뜩 머리에 한 동이 짐을 진 채 날품을 파는 수백 명의 인파와는 참으로 극한의 대조다.

 

나는 악단에 한참 가까이 가서 자리를 잡고 음악에 집중했다. 풀장과 이어진 호텔 문 밖에서의 연주라, 이마와 겨드랑이 사이로 땀이 빗줄기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한 명의 관객으로도 신이 났는지, 그들은 나를 보더니 더 힘차게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피리소리는, 빠르면서도 구슬픈 듯한 페루의 그것과 너무도 닮아있었다. 한참의 연주를 마치고, 나는 그냥 가서는 안 되겠다 싶어 호텔 로비로 이들을 불렀다. 잠시라도 에어컨 바람을 쏘이면서 땀을 식혀주고 싶었다.

 

메뉴판을 건네서 음료수를 하나씩 대접하겠다고 하니, 신이 났는지 로비와 바에 자리를 잡는다. 더러 값비싼 음료를 시키는 바람에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두 번 있는 일은 아니라 생각하고, 무엇보다 전통음악을 접할 수 있는 것에 감사하기도 했고 젊은이들이 자신들의 음악을 업으로 삼아 열정을 바치는 것 자체가 작은 감동이었다.

 

이 유랑극단의 이름은 헤왈레 사운드. 1996년, 가나 국립대에서 함께 모임을 결성하였고, 이렇게 호텔이나 기관에서 가끔씩 부르면 연주하기도 하고 종종 외국에도 공연 나간다고 하니, 꽤나 전문적인 팀이다.

 

 

 

 

 

팀 리더는 악기 이름을 하나씩 불러주었다. 악기는 모두 완벽하게 가나의 전통악기라고 했다. 피리와 자이리푼(박 달린 실로폰)은 가나 북부지역에서, 아하치(세이켜스)와 강코비(벨)은 볼타호수 지역에서 그리고 팔루구(드럼)와 고메(베이스드럼)는 아크라 지역에서 각각 가져와왔다고 한다. 그리고 음악은 리더가 페루음악을 공부해서, 페루음악과 현지 가나 음악을 섞어 만든 퓨전음악이라고 한다. 정부에서 아무런 지원을 해주지 않는다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가나 경제가 계속 성장 중에 있으니, 조만간 이런 문화예술인들이 마음껏 자신들의 음악을 할 수 있도록 기반이 마련되었으면 하고 바라며 그들을 응원했고, 악단은 다시 호텔 뜰로 가서 남은 공연을 계속했다.

 

가나에서 현지의 예술을 접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정부의 대규모 행사나 지역의 큰 축제 때에 전통 춤과 공연 등을 볼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고급 호텔을 기웃거려야 이런 음악을 겨우 접할 수 있다. 그들이 마음껏 예술을 하게끔 정부의 지원이 있거나, 시장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이겠다. 그럼에도, 호텔 로비나 복도의 한 구석, 식당의 현관이나 심지어는 화장실 벽에 걸린 원색의 그림들을 보면, 수만 년 전부터 이 땅에서 살던 그들만의 숨소리가 막 들려오는 것만 같다. 먹고 사는 문제가 조금만 더 넉넉한 사정이었다면, 어느 나라 못지않게 화려하게 개화했을 이들의 문화예술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호텔 구석구석에 걸려있는 그림들을 감상한 후 공항으로 발길을 옮겼다. 건축전문가, 서강열 상무가 도착할 시간이다.

 

 

 


태그:#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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