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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새턴 신전에 대한 기억은 영화, <로마의 휴일>에서부터 시작된다. 깊은 밤 길거리에서 잠을 자던 오드리 햅번(Audrey Hepburn)을 그레고리 펙(Gregory Peck)이 처음 만나는 장면의 배경으로 기묘한 모양의 8개 기둥이 등장한다. 나는 당시에 매력적인 기둥의 건물이 새턴 신전(The Temple of Saturn)이라는 것을 몰랐다. 흑백 영상 속의 고색창연한 기둥은 마치 전설 속의 건물인 양 다가왔다.

 

  그 8개의 기둥이 한 여름의 뜨거운 햇살 아래, 현실 속의 내 눈앞에 서 있었다. 지붕의 대부분과 벽면이 완전히 사라져 버린 신전 건물에서 높은 기단 위의 기다란 기둥만 무너지지 않고 서 있는 사실이 신기했다. 아무래도 기둥만 남은 후 홍수 등에 의해서 흙 속에 오랜 세월 동안 묻혀 있었기 때문에 저렇게 아슬아슬한 모습으로 남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이 넓은 새턴신전 주변을 모두 흙으로 덮어버린 홍수의 대단한 위력을 상상해 보았다.

 

 

  나는 가족과 함께 포로 로마노에서 카피톨리노(Capitolino) 언덕으로 올라가는 계단에 앉았다. 새턴 신전이 바로 눈앞에 내려다보이고 있었다.

 

  포로 로마노 내부로 연결되는 계단에는 수많은 여행자들이 길을 가고 있었다. 이 계단을 지나는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양의 여행자들보다는 서양의 여행자들이 대다수이다. 서양인들은 서양 역사의 기원인 이곳을 세밀히 둘러보지만 동양 여행자들은 콜로세움 등 유명세 있는 여행지 위주로 여행하기 때문일 것이다.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나는 나의 눈앞과 새턴 신전 사이를 지나가는 이탈리아의 남녀를 관찰했다. 로마시내 지식 가이드가 한 말이 머리 속에 떠올랐다.

 

"고대 로마 사람들은 평균키가 155cm 밖에 안 될 정도로 다리가 짧았어요. 그런데 밀라노 등 이탈리아 북부지방 사람들과 피가 섞이면서 지금같이 키도 커지고 미남형이 되었지요."

 

  16년 전의 로마여행 당시와 달리 로마 사람들의 체격이 그리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가끔 키가 훤칠한 아가씨가 눈앞을 지나갔지만 대부분의 사람들 신장이 우리나라 사람들과 큰 차이가 나지 않았다. 카피톨리노 언덕 아래 계단에는 체격이 건장한 우리나라의 대학생들도 간간이 지나갔다. 급성장한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체형 때문에 과거에 서양인들을 보면서 느꼈던 외모에 대한 동겸심이 점점 옅어지는 모양이다.   

 

 

  지금 앉아있는 계단의 그늘이 그렇게 시원할 수가 없다. 로마의 여름은 우리나라 여름같이 습하지는 않지만 햇볕은 따가울 정도로 강렬하기 때문이다.

 

  나는 숙소 근처에서 생수를 사오지 않은 것을 너무 후회했다. 포로 로마노에서 파는 생수 값은 말 그대로 바가지였지만 강렬한 태양 아래의 목마름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족과 함께 물을 한 모금씩 들이켰다. 로마의 여름 그늘은 묘하게도 시원했다.

 

 

  나는 그늘의 상쾌함을 즐기며 눈앞의 새턴 신전을 뜯어보았다. 새턴 신전은 서기전 498년에 최초로 지어졌을 당시의 건물은 아니었다. 새턴 신전은 그 유구한 역사만큼이나 여러 차례 보수되었고 기원전 42년에 마지막으로 재건되었다.

 

  재건되었던 새턴 신전은 어느 순간 허물어졌다. 허물어진 원인은 지진에 의한 것인지, 이민족의 침략에 의한 것인지 알 수가 없다. 19세기에 포로 로마노에 대한 고고학적 발굴이 시작되기 전까지 이 새턴 신전의 기둥은 반쯤 땅에 묻혀 있었다. 포로 로마노를 상징하기도 하는 이 신전은 포로 로마노 발굴 당시 가장 먼저 발굴되었고 기원전 42년에 재건된 모습의 일부나마 사람들이 다시 볼 수 있게 되었다.

 

  로마인들이 농사의 신으로 모셨다는 새턴(Saturnus)은 어떤 신이었을까? 나는 신전의 8개 기둥의 역사 속으로 들어가보았다.

 

  아버지인 우라노스(Uranus)를 쫒아내고 자식을 잡아먹은 새턴은 그리스 신화의 농경신, 크로노스(Cronus)와 동일시된 신이다. 그는 아들인 주피터(Jupiter, Zeus)에 의해서 추방당한 후 자신을 반성하면서 전 세계를 방황하게 된다. 새턴은 이탈리아에 오게 되었고 카피톨리노 언덕 위에 자리를 잡게 되었다.

 

  자신의 죄를 속죄 받고자 했던 새턴은 로마 땅에 살던 원주민들에게 대지의 경작법 등 농사법을 가르치고 로마의 도덕률을 세웠다. 그로 인해 로마 땅에는 평화롭고 풍요로운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로마 사람들은 여러 신들을 모시고 그 신들에게 신전을 지어 바치며 기원을 했다. 로마의 정치, 문화의 중심지였던 포로 로마노 안에는 가장 신성하게 여겨지던 신들에 대한 신전들이 들어섰다. 로마인들은 카피톨리노 언덕 아래 이곳에 새턴 신을 위한 신전을 건립하게 되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새턴 상이 사라졌지만 나는 새턴 상의 과거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추측컨대 새턴의 동상은 전면 지붕의 가장 높은 곳이나 신전 내부 중앙에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다. 대개 늙은이로 조각되는 새턴은 아마도 오른 손에 낫을 들고 있었을 것이다. 고대 로마에서는 낫이 농업을 상징하는 것이었으므로 농업의 신인 새턴이 낫을 들고 있었음은 충분히 상상이 가는 대목이다.

 

  학교 공부 중에서 유달리 과학과목을 좋아하는 나의 딸, 신영이가 말했다.

 

  "새턴? 아빠! '새턴'은 토성이잖아? 이 신전이 토성이나 토요일하고도 관련이 있어요?"

 

 "모든 이름에는 그 이름이 생긴 유래가 있어. 로마 사람들에게 새턴 신은 동작이 조금 굼뜬 늙은 신으로 생각되었나봐. 천문학이 발달하던 초창기에는 지구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천왕성과 해왕성은 관찰되지 않았기 때문에 토성은 하늘 위에서 가장 바깥쪽에 자리한다고 여겨졌었고, 그래서 당시 과학자들은 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에 이어 태양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토성에 '새턴(saturn)'이라는 이름을 붙였단다."

 

  나는 딸에게 나의 이야기를 더 이어갔다.

 

  "서양에서는'새턴'신의 이름을 따서 매주 마지막 날을'새터데이(Saturday)'라고 하게 되었지.'새턴'신은 현명하지만 차갑고 어두운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실제 현대의 '토요일'은 일주일 중 가장 즐거운 날이니, 이름을 붙이게 된 연유와 실제가 달라진 거지. "

 

  그때 지나가던 한국 여행객 중 한 사람이 새턴 신전에 대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드리 헵번 나오는 그 영화 있잖아, '로마의 휴일' 촬영할 때에 이 새턴 신전은 땅 속에 완전히 묻혀 있었대."

 

  그런가? 영화 속에서 새턴 신전의 8개 기둥을 보았던 내 기억이 틀렸나? 내가 확실하다고 생각했던 사실도 상대가 너무 자신 있게 이야기 하면 헷갈리기 마련이다.

 

  나는 한국에 돌아와서 '로마의 휴일' DVD를 다시 보았고 포로 로마노가 나오는 부분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영화 촬영 당시에도 진짜 새턴 신전은 땅 속에 묻혀있지 않고 8개의 기둥이 현재 모습같이 멀쩡하게 서 있었다.

 

  정확하지 않은 정보를 검증 없이 유포하면서 세상만사에 대한 이야기는 왜곡되기 마련이다. 나는 그 관광객의 부정확한 정보 유포가 답답했지만 우연찮게 '로마의 휴일' 속으로 다시 들어가게 되었다.

 

  지금과 달리, 영화 속에서는 로마시청 뒤쪽과 새턴 신전 사이로 길이 나 있고 그 길 위를 택시가 지나고 있었다. 흑백영화 속의 새턴신전이 참으로 운치 있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이미 세상을 떠난 그레고리 펙과 오드리 헵번은 영화 속에 빛나는 청춘으로 살아있었다. 나는 새턴신전 앞의 이 선남선녀가 로마 역사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가족들과 함께 발걸음을 옮기던 로마로 다시 돌아가고 싶었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로마, #포로 로마노, #새턴 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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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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