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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그날이 오고 있다. 살아가면서 잊지 말고 기려야 할 날들이 많다. 유월 십일도 그런 날 가운데 하루이다. 87년 고등학교 삼학년이었던 내게 그해 유월은 또렷한 기억을 남겨 주었다. 내가 살던 원주에도 수많은 이들이 시내 도로를 차지하고 시위를 벌였다. 버스도 다니지 못해 일찍 수업이 끝난 어느 날 시내를 가로질러 집에 오다가 집회를 지켜보았다. 빨갱이들이 나라를 말아 먹는다는 두려움을 불어 넣던 여러 사람들 말과 달리 시민들 차지가 된 도로는 알 수 없는 무엇인가로 가슴이 두근거리게 하였다. 지난 다음 생각해 보니 그것은 자유가 만드는 두근거림이었다. 도로 위에 계신 수녀님들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돌아가며 한 가운데 작은 단상 위로 올라서서 뜨거운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올라온 이는 우리학교 친구였다. 무슨 말을 했는지 기억할 수는 없지만 이제 다시 생각해봐도 놀라운 친구다. 그저 수학 문제나 풀며 시험공부만 생각하던 우리와는 다른 친구였다. 그 친구 때문이었는지 같이 있던 친구 때문이었는지 몰라도 밤이 깊도록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다. "전두환은 물러가라. 훌라 훌라"를 따라 부르며.

그날이 지난 다음부터 책을 찾아 읽었다. 조금씩 세상을 알게 되었다. 알면 알수록 부끄러운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였다. 그러나 대학에 들어가서 운동권이 되지는 못했다. 내게는 "절대로 데모하면 안 된다"를 당부하시는 어머니가 계셨고 중학생 때부터 학비를 걱정해야했고 대학에 합격하고도 돈이 없어 가지 못하는 가난이 있었다. 재수해서 들어간 대학에서 군대처럼 학번을 따지는 더러움도 싫었지만 무엇보다 난 용기가 없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 나를 던질 용기 말이다. 어느 날이던가, 돌 몇 개 던지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에게 붙잡혀 갔던 일이 있다. 파출소 구석에 무릎을 꿇고 앉아 말 한마디 못하는 내게 세상을 바꾸겠다고 나설 용기 따위는 없었다. 돈 안 드는 학교를 찾느라 들어간 사범대학이라 공부는 뒷전이고 그저 돈이 있으면 막걸리나 마시며 세상 이야기를 주절거리고 돈이 없으면 도서관 장서실에 틀어박혀 책이나 읽으며 세월이 흐르기만을 기다렸다.

군대 다녀와서 한 공부가 통했는지 운이 좋았는지 졸업하던 해 1996년에 선생이 되었다. 어쩌면 이제 난 세상일을 잊어도 된다. 그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수학문제나 풀어주며 그렇게 별 일 없이 살아도 된다. 아내와 아들 딸 넷이서 살기엔 넓기만 한 집도 있고 자동차도 있고 꼬박 꼬박 밀리지 않고 나오는 월급도 있고 나이가 들어 받을 연금도 퇴직금도 있다.
 
배에 기름이 끼면 보수가 된다고들 하지 않더냐? 그깟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더냐? 그러나 자꾸만 왼쪽으로 생각이 옮겨진다. 젊을 때도 없던 무슨 대단한 용기가 생긴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세상을 바꾸었으면 좋겠다. 아직도 돈이 없어 밥을 굶는 아이들이 있고 팍팍한 삶이 버거운 노동자들에게 문자로 해고통지서를 날리는 사장님이 있다. 용산에선 살 궁리를 할 수 있게 보상을 해달라는 사람들을 불태워 죽여 놓고 되레 큰소리치는 경찰이 있다. 온갖 지저분한 짓을 다해도 벌을 받기는커녕 아들에게 딸에게 고스란히 회사를 넘겨주는 재벌이 있고 꿈은 그저 돈 많이 버는 것 한 가지라 말하며 자라는 아이들이 있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

이제 그날이 다시 왔다. 오늘 다시 맞는 유월 십일 우리나라가 부끄러움을 벗어버리고 새롭게 태어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87년 그날처럼 역사가 한 걸음 크게 앞으로 나아가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세상을 바꾸기 위해 너무나 많은 힘을 쏟아 부은 모든 사람에게 고개 숙여 말하고 싶다. "고맙습니다." 모든 것을 걸고 전교조를 만들고 지켜낸 수많은 선생님들 고맙고요, 대학 다닐 때 맨 앞에서 화염병을 들고 쇠파이프를 들고 우리를 지켜준 친구들아 고맙다. 애꿎은 죽음을 맞은 수많은 열사들과 아직도 현장에 계시는 노동운동가들에게 갚기 어려운 빚을 졌다. 아니 어쩌면 이재오 김문수씨에게도 빚이 있다.

돌아가신 전우익 선생님이 세상 사람들에게 물으셨다.
 
"혼자만 잘 살면 무슨 재민겨?"

덧붙이는 글 | 이글은 제 블로그에도 썼습니다.


태그:#유월항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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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든 사람에겐 편안함을, 친구에게는 믿음을, 젊은이에겐 그리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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