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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하여 이 길은 나날이 절망으로 덮쳐

숨 막히게 하는가

그 끝이 어디인가

보고 싶다, 단 한번만이라도,

새쪽하늘 빛나는 희망 하나.

많이 보고 싶다

울 어매 품 속 같은

서럽게도 그리운 세상 하나. -103~104쪽, '많이 보고 싶다' 몇 토막

 

저 어두웠던 1980년대, 노동시인 박노해, 백무산과 더불어 '전쟁 같은 밤일'을 계속하고 있었던 현장노동자들 힘겨운 삶과 모순된 노동 현장을 고발하는 시를 써왔던 시인 정인화. 그가 시세계를 더욱 폭 넓혀 나가고 있다. 노동과 함께 분단, 통일, 반미를 주제로 삼았던 그가 이번에는 텃밭을 통해 대자연의 생명까지 품은 것이다.    

 

지난 달 중순께 우편으로 날아온 정인화 여섯 번째 시집 <서럽게도 그리운 세상 하나>에는 현기증이 노랗게 일도록 배고프고 가난했던 어린 날에 대한 시가 있는가 하면 요즈음 텃밭을 가꾸며 느끼는 대자연과 생명에 대한 시가 그가 자식처럼 애지중지 키우는 콩, 고추, 감자, 남새가 되어 빼곡히 자라고 있다.

 

그렇다고 이번 시집에서 현장 노동자 혹은 비정규직 노동자들 삶과 분단, 통일, 반미, 정치 모리배, 천민자본주의에 대한 시가 거의 없다는 것은 아니다. 늘상 짱돌로 마빡을 찍는 것처럼 치열했던 그의 시어가 이번 시집에서는 배추벌레, 지렁이, 참꽃, 찔레꽃, 어미소, 새끼 염소 등으로 거듭나 더욱 아픈 피멍으로 아로새겨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인화 시세계가 날이 갈수록 가로 세로 폭이 넓어지면서 더욱 깊어지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긴, 시력 30여 년에 가까운 시인이 이 세상을 홀로 걸어가면서 바라보는 삼라만상이 어찌 젊은 때 바라보는 삼라만상과 같을 수 있겠는가. '시가 내게로 왔다'는 김용택 시인 말처럼 이제 그에게도 시가 저절로 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비애의 생채기 물안개처럼 내 가슴에 젖는다

 

"나의 지지리도 가난하고 황량했던 유년의 기억이 결코 아름다운 추억이 될 수 없는 건, 정녕 돌이킬 수 없는 과거가 될 수 없는 건... / 빛이 바래 하얗게 잊혀졌으려니 했던 그 오랜 기억이 아직도 저잣거리의 많은 현실이고 켜켜이 먼지 뽀얗게 쌓인 그 당시 부산 전포동 변두리 산동네 삶의 억척스러움이 비애의 생채기가 되어 슬픔으로 물안개처럼 내 가슴에 젖어오기 때문이다."

 

울산과 양산 사이에 끼여 있는 한적한 시골마을 웅촌에서 텃밭을 가꾸며 시를 쓰고 있는 시인 정인화가 여섯 번째 시집 <서럽게도 그리운 세상 하나>(신생)를 펴냈다. 2006년 다섯 번째 시집 <열망>을 펴낸 뒤 3년 만에 내는 이번 시집에는 지배계급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착취당하는 계급에게 새로운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주고 있다.

 

"여보게, 친구들 나를 미쳤다고 했나" "에프 티 에이" 연작 2편 "참꽃" "나는 초식동물이다" "울 할무이" 연작 3편 "철을 잊은 과일에게" "베트남에서 온 어린 신부에게" "산이 뭐라시더냐" "이것도 추억인가" "미국 국적" "아무래도 그는 몸져 눕겠다" "오, 미합중국 코리아주여" "살아남기 위해" "길" 등 67편이 그것.

 

시인 정인화는 "갈수록 도가 지나친 범죄적 자본주의의 인간과 자연생명에 대한 착취를 넘어선 만행을 보면서 나 자신 이 시대를 있게 한 공범임에 곤혹스럽다"고 말한다. 정 시인은 "마구 찢겨지고 너덜너덜 파헤쳐져 신음하는 자연 생명을 보면 인간으로 태어난 내 자신이 한없이 죄스러울 때가 가끔 있다"며 "독기 품은 사랑의 비수 몇 개쯤 더 품어 다시 쓰고 싶다"고 말했다. 

 

독설 새는 시인, 이 세상을 향해 똥바가지 들다

 

윗니 다 빠져 그래도 먹고 살아보겠다고 싸구려 틀니 가져다니며 그냥저냥 한 몇 년을 잘 버텼는데 아랫니 한 개 두 개 슬금슬금 빠지더니 어제 또 하나 덜커덩 나자빠져 집에서 흔들어 손으로 뽑아 새 이 줄 리 없는 지붕에 던졌네. 안 보던 거울 앞에 히이 입 벌려보니 우습기도 우습지만 이 하나 빠진 자리 너무 허전해 햐아아~ 한숨이 저로 나오네. -30쪽, '허어, 그것 참'  몇 토막

 

가는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시인 정인화도 이제 점점 늙어간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멀쩡하던 이도 마치 일터에서 쫓겨나는 비정규직 노동자처럼 하나둘 잇몸을 떠나기 시작한다. 이가 빠지고 나니 흉하기도 하지만 더욱 애가 타는 것은 평소 이 더럽고 아니꼬운 세상을 향해 마구 퍼붓던 독설마저도 샌다는 점이다.

 

여기에 아랫니마저 빠지니 그동안 바람막이처럼 썼던 틀니도 흔들거린다. 이제는 좋아하던 돼지갈비도 제대로 먹을 수 없다. 서글프다. 마치 자신이 이 세상과의 싸움에서 져버린 것만 같다. 아니, 어찌 보면 흘러가는 세월이 시인이 내뱉는 독설을 집어삼키며 이 세상 사는 법을 한 수 가르쳐주는 것만 같다.       

 

시인은 그렇게 "내 꼬라지가 우습네" 하며 힘없이 웃는데, 바깥 세상은 시끄럽기 그지없다. 들꽃축제니, 고래축제니, 주꾸미축제니, 빙어축제니, 불고기축제니 하며 온통 이 세상을 향해 '해찰'을 할 뿐이다. 시인은 대자연을 작살나게 하는 그런 세상을 향해 이제는 "똥을 한 바가지 퍼질러"(축제에 대하여) 뿌리고 싶다. 

 

시인의 이러한 깊은 슬픔과 세상을 향한 저항은 이 시집 곳곳에 흩어져 있다. "늘고 병들어 이젠 / 숨도 쉴 수 없게 되었구나"(들녘의 소리)라거나 ""만신창이가 되어 신음하는 / 저 들판의 마지막 숨통마저 끊으려 하는가"(에프 티 에이 1), "김탕질 낭자한 모텔, 호텔이 논밭을 갈아엎고 뭘하라는 것이냐"(뭘 하라는 것이냐), "잡식동물 인간들아 / 우리는 초, 식, 동, 물, 이란 말이다"(나는 초식동물이다) 등이 그러하다. 

 

 

시인 스스로 대자연을 착취하는 계급이라는 점에 놀라다

 

긴 밭 갈던 어미소

농부 쟁기 놓고

담배 한 대 피우면

얼른 지 새끼 챙겨

젖을 물린다

맛있는 풀내음 진동하는 밭에서

지 새끼 젖을 빨린다 -36쪽, '어미소' 몇 토막

 

텃밭을 가꾸고 있는 시인은 문득 긴 밭을 갈다가 잠시 쉬고 있는 농부와 어미소를 바라본다. 농부는 담배 한 대에 고된 노동을 삭이고, 어미소는 송아지에게 젖을 얼른 빨리는 것으로 다시 다가올 고된 노동을 되새김질한다. "단내 나는 가쁜 숨 몰아쉬며... / 담뱃불 끈 농부의 눈치 슬슬" 살피는 소가 마치 이 땅의 민초처럼 보인다.

 

시인은 농부와 어미소가 다시 밭을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신도 다시 호미를 들고 "어머니 대지의 가슴" 같은 텃밭을 매기 시작한다. 하지만 호미로 텃밭을 매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 텃밭에는 짧고 가는 지렁이와 길고 굵은 지렁이뿐만 아니라 여러 풀벌레들이 더불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은 밭을 매면서 가끔 섬찟거린다. 호미를 잘못 쓰면 어느새 지렁이 한 마리가 호미에 찍혀 피를 흘리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호미의 무자비한 파헤침에 / 풀벌레들 놀라 정신 잃어 / 숨을 곳 찾지" 못해 이리저리 마구 정신 없이 뛰어다니고 있다. 시인은 그때마다 "내가 섬찟하여" 스스로 무섭기까지 하다.

 

정인화 시세계가 예전에 비해 수직과 수평으로 넓어지고 깊어졌다는 말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사실, 시인 자신은 그동안 착취당하는 계급이었다. 시인 조부모님도, 부모님도, 주변 동료들도 그랬다. 근데, 텃밭을 가꾸면서 시인 스스로가 대자연을 착취하는 계급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까닭에 시인은 호미를 든 자신조차 이제는 무서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꼬부랑옷"이 활개치는, 미국의 한 주 같은 나라

 

미국 핵은 쏙 빼놓고

북한 핵 이야기하면서

당신, 뭐라고 했던가

전쟁, 그놈의 전쟁 날 테면 나라지

이 땅에서 단물 쪽쪽 빨다가

훌쩍 미국 품으로 떠나면 그만이라 했는가 -92쪽, '미국 국적' 몇 토막

 

시인은 미국을 지구촌 최대 범죄자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자신들은 핵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북한 핵에 대해 왜 미국이 이러쿵 저러쿵 안티를 거느냐 이 말이다. 이라크 아이들도 미군의 무자비한 폭격에 살점 떨어지며 울부짖었다. 아프가니스탄 애비 에미들도 미국이란 나라가 주는 죽음의 공포에 벌벌 떨었다.

 

우리나라가 지구촌 유일한 분단국이 되어 있는 것도 미국 때문이었다. 시인에게 분단된 우리나라는 "오, 아메리카보다 / 더 자유롭고 / 내 고향 미네소타보다 / 더 포근한 / 코리아, 코리아 나의 코리아주"(오, 미합중국 코리아주여!)다. "거리마다 정겨운 모국어 간판"과 "걸어다닌 꼬부랑옷"이 활개치는, 미국의 한 주 같은 나라가 우리나라이다.

 

 

시인 정인화 여섯 번째 시집 <서럽게도 그리운 세상 하나>는 착취계급이 없는, 누구나 평등하게 더불어 잘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으로 가기 위한 몸부림이다. 그 짙은 몸부림은 때론 어미소나 새끼 염소, 참새 등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때론 제비꽃이나 참꽃, 산딸기 등이 되어 읽는 이들 가슴을 아프게 툭툭 친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 맹문재는 "인간 역사의 한 축은 지배와 억압과 착취와 배제 같은 비인간적인 면이 적층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라며 "시인 정인화는 그 착취당하는 대상들을 품으며 지배계급에 대항하고 있다. 시인은 낮은 위치에 있는 그들과 함께 하는 행동이야말로 지배계급에 대항하는 연대성을 띠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고 평했다.  

 

시인 정인화는 경북 경주에서 태어나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기관지, <마산문화> 등에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강이 되어 간다> <우리들의 밥그릇> <소금꽃 안개꽃> <나팔수에게> <열망>이 있다.

 

지금은 울산과 양산 경계에 있는 웅촌에서 100여 평 남짓한 텃밭에 콩, 고추, 오이, 가지, 호박, 감자 등속과 무, 배추, 상추 등 이런 저런 남새를 자식처럼 키우며 살고 있다. 1988년 제1회 전태일문학상 받음.

덧붙이는 글 | <유포터>에도 보냅니다


서럽게도 그리운 세상 하나

정인화 지음, 신생(전망)(2009)


#시인 정인화#서럽게도 그리운 세상 하나#웅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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