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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원한 국물맛이 일품인 도토리 묵사발
 시원한 국물맛이 일품인 도토리 묵사발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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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도 덥고 속도 답답한데 시원한 묵사발 한 그릇 어때? 도토리묵 잘 하는 집 아는데, 도토리 묵사발 먹으러 가자."
"묵사발? 묵사발이 뭐야? 남편하고 싸웠어? 누굴 묵사발 만들겠다는 거야? 하하하."

날씨는 덥고 속은 답답하다며 묵사발이나 먹으러 가자는 친구의 전화를 받고 그만 웃음이 터져버렸습니다. '묵사발'이라는 단어가 주는 투박하고 토속적인 느낌 때문이지요.

청포묵, 도토리묵, 메밀묵, 우무묵…. 예전에는 구황식품으로 서민들의 주린 배를 채워주었던 묵들이 지나친 고기 섭취로 건강에 적신호가 켜진 현대인들에게는 다이어트 식품, 건강식품으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이어트를 걱정하는 저 같은 중년 아줌마들 사이에 하루 한 끼, 적어도 일주일에 몇 번은 식사대신 도토리묵을 먹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었답니다.

따끈한 장국에 말아먹는 도토리국수.
 따끈한 장국에 말아먹는 도토리국수.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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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묵들이 그렇듯 도토리묵 역시 묵 자체의 맛보다는 잘 버무린 양념이 맛을 좌우하게 되는 음식입니다. 도토리묵의 경우 도토리를 갈아 녹말 성분을 가라앉히는 과정이나 도토리 전분과 물을 배합하는 과정에 따라 씁쓸한 타닌 맛의 강도가 달라지는 하지만 요즘 사람들의 입맛으로는 도토리 가루만으로 만든 진짜묵과 도토리 맛과 색을 낸 혼합묵(100%도토리가루가 아닌)을 구분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랍니다.

어머니가 늦가을 산속을 더듬어 도토리를 주워다 만들어 주던 예전에야 순수 토종 도토리묵을 쉽게 맛볼 수 있었겠지만 마트나 슈퍼, 시장에서 두부나 콩나물처럼 도토리묵을 쉽게 구입 할 수 있는 지금은 오히려 풍미 진한 진짜 도토리묵을 먹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일까요? 사실 음식의 급으로 따지자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손두부이나 도토리묵을 맛 볼 수 있는 식당에 사람들이 몰리고 있습니다. 평소 패스트푸나 기름기 많은 음식들에 절어있다 보니 담백하고 순수한 어머니의 손맛이 그리워지는 때문이겠지요.

두부와 김치등으로 속을 채원 도토리전병.
 두부와 김치등으로 속을 채원 도토리전병.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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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도 재미있는 도토리 묵사발을 먹으러 가는 길. 분당을 출발 퇴촌을 지나 남종면에 이르는 국도는 녹음이 짙어지기 시작해 풀 내음, 산내음이 가득합니다. 달콤한 신록의 향기에 취해 달리다 보니 팔당호가 바라보이는 강가에 꽃들이 가득 피어난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음식점이 눈에 들어오겠지요.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것이 저의 특기라 친구를 따라 나서긴 했지만 사실 저는 묵을 그리 좋아하지도 않으며 묵을 대단한 음식이라 여기지도 않습니다. 그것은 묵을 좋아하셔서 직접 만들어 먹는 수고를 마다지 않는 친정엄마 덕분에 토종 도토리묵을 질리게 많이 먹어 본 경험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렇게 도착한 음식점에서 우리 보다 먼저 온 손님들이 밀려 한 시간 반이나 기다려야 점심을 먹을 수 있다고 합니다.

겨우 도토리묵 한그릇 먹기 위해 한시간 반을 기다려? 그러고보니 이 음식점의 아름다운 정원이 다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원도 없었다면 도토리묵 한  그릇 먹기 위해 기다려야 하는 시간이 너무 지루했을 테니 말입니다. 번호표를 들고 기다리기를 한 시간 반. 드디어 우리 번호가 불려집니다.

팔당호가 바라보이는 정원의 풍광이 일품이다
 팔당호가 바라보이는 정원의 풍광이 일품이다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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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바로 묵사발이야."

드디어 맛보게 된 묵사발. 그릇을 들어 그 시원한 국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니 개운하고 칼칼한 맛에 기다림의 지루함도 다 잊혀지는 듯 합니다. 

도토리가루의 짙은 풍미가 살아있는 도토리묵은 잘 배합 된 양념 맛이 더 해진 때문인지 입에 착착 감깁니다. 말린 도토리묵이 들어간 유자 샐러드와 도토리가루로 만든 도토리 전병, 도토리 해물전과 도토리 가루로 만든 도토리 국수까지 풀코스 도토리를 먹고 나니 동요 속에 등장하는 '산골짝에 다람쥐 아기 다람쥐'가 된 듯 정원을 뛰어 다니고 싶어지겠지요.

도토리 묵은 무공해식품으로 타닌 성분이 많아 소화가 잘 되는 음식입니다. 타닌은 주로 떫은 맛을 내지만 묵을 만드는 과정 중에 떫은 맛은 많이 사라지게 되지요. 동의보감에는 늘 배가 부글거리고 끓는 사람, 대소변이 불규칙한 사람, 몸이 자주 붓는 사람이 도토리묵을 먹으면 좋아지고 심한 설사에도 효능이 있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도토리 속에 들어있는 타닌 성분 때문이라고 합니다. 

꽃도 보고 묵도 먹고 강바람에 시름도 날리고
 꽃도 보고 묵도 먹고 강바람에 시름도 날리고
ⓒ 김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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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만감이 높고 칼로리는 낮은데다 지방흡수도 억제해 준다고 해서 이미 다이어트식품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도토리묵. 최근에는 아콘산이라는 성분이 중금속 해독에까지 탁월한 효능을 보인다고 해서 건강식품으로서의 가치를 더욱 인정받고 있기도 합니다.

도토리가 이렇게 귀하고 좋은 음식인 줄 진즉에 알았더라면 매년 가을마다 도토리를 주우러 산에 오르시는 엄마에게 '고덕동 다람쥐 할머니'라는 별명까지 붙여주며 "제발 좀 힘들게 그런 일 좀 하지 마세요"라며 공연한 싫은 소리는 하지 않았을텐데 하는 생각도 듭니다.

아니 어쩌면 올 가을엔 엄마 보다 먼저 제가 도토리를 주우러 산에 올라갈지도 모른겠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태그:#도토리, #도토리묵, #도토리국수, #강마을다람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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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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