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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인선 전철의 시발점인 인천역에서 내리면 길 사이를 두고 그 유명한 차이나타운이 눈에 들어온다. 인천 차이나타운(http://www.ichinatown.or.kr)은 중구 북성동-선린동 일대를 말하는데, 과거 1884년(고종 21년) 청나라와 조계를 맺은 지역으로 청나라 영사가 있다하여 '청관거리'라 불렸다.

당시 화교(중국인)들은 이곳에 소매잡화 점포와 주택을 짓고 조계를 확장하는 등 상권을 본격적으로 형성하였고 지역적으로 산둥반도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중국에서 가져온 식료잡화, 소금, 곡물을 팔고 조선의 사금 등을 중국으로 보내며 세력을 넓혔다.

 인천역을 나오면 맞은편에 차이나타운 패루가 보인다.
 인천역을 나오면 맞은편에 차이나타운 패루가 보인다.
ⓒ 이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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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패루
 제1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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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강정으로 유명한 인천 신포시장도 그 전신이 19세기말 중국인 푸성귀전(채소)이다. 차이나타운과 인접한 신포시장 옛 푸성귀전에서는 화농들이 산둥성 일대에서 채소 씨앗을 가져와 배추, 무, 양파, 토마토, 당근, 피망, 우엉, 마, 연근 등을 재배해 시장에 내다 팔았다. 이들의 주요 고객은 일본인이었다. 현재 신포시장에서는 중국식 산둥만두와 화교들이 운영하는 가게들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중일전쟁으로 청관의 상권이 거의 마비되고 젊은 화교층들이 대만이나 미국, 동남아시아로 떠난 뒤, 일부 요리집과 잡화상들만 남았고 일부는 축항의 부두근로자로 전락했다 한다. 1920년대부터 한국전쟁 전까지는 청요리로 이름을 날렸는데, 지금도 그 이름을 자랑하는 공화춘, 중화루, 동홍루 등 유명한 요리집이 있었다.

 차이나타운 안내도, 자장면거리가 눈에 띈다.
 차이나타운 안내도, 자장면거리가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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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적한 자장면거리
 한적한 자장면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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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이후 한국정부가 수립되면서 화교들에게 시련이 닥치기도 했다. 각종 제도적 제한과 차별대우로 화교사회는 더욱 위축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화교들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화교협회에서 학교를 만들어 유지해왔다. 중국과의 수교 후에도 화교학교는 대만정부의 청천백일만지홍기를 달았다 한다.

이승만, 박정희 정권하에서는 외환거래규제, 무역규제법, 거주자격 심사강화 등 각종 규제로 인천 청관의 화교들은 돈이 있어도 영업장은 50평 이상 일반 토지는 200평 이상 소유가 불가능했었다 한다. 이 때문에 7-90년대 많은 중국인들이 청관을 떠나 쇠퇴를 거듭하다, 한중 수교의 영향으로 중국인 거리가 다시 활력을 찾기 시작했다 한다.

 곳곳에 중국색을 입힌 그림과 잡화점이 늘어섰다.
 곳곳에 중국색을 입힌 그림과 잡화점이 늘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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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한 공화춘
 유명한 공화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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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등이 사람들을 반긴다.
 홍등이 사람들을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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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화교 2.3세대들이 170여 가구 500명이 살고 있는데, 중국의 맛을 이어가는 요리점을 운영중이다. 이들이 살고 있는 차이나타운을 땅거미가 진 뒤 걷다보면, 울긋불긋한 홍등과 옛중국식 주택, 해안성당, 집집마다 복을 비는 글과 중국식 정원도 만날 수 있다.

그런데 인천시의 구도심개발사업으로 문화-관광특구인 차이나타운 북성동 일대도 개발 위협을 받고 있다. 자장면으로 유명한 차이나타운이 또다시 위기에 처했다는 말이다.

 중국인 주택으로 사용되었다는 해안성당을 지나면 중국식 정원에서 쉬어갈 수 있다.
 중국인 주택으로 사용되었다는 해안성당을 지나면 중국식 정원에서 쉬어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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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성동 재개발로 차이나타운도 어찌될지 모른다.
 북성동 재개발로 차이나타운도 어찌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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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U포터뉴스와 블로거뉴스에도 송고합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차이나타운#자장면#화교#중국인#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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