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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를 굽히고 다가오는 사람에게만 자신의 예쁜 자태를 보여주는 '괭이밥' 잎을 씹어 먹으면 신맛이 난다고 해서 '시금초' 혹은 '신검'이라고도 불린다.
▲ 괭이밥 허리를 굽히고 다가오는 사람에게만 자신의 예쁜 자태를 보여주는 '괭이밥' 잎을 씹어 먹으면 신맛이 난다고 해서 '시금초' 혹은 '신검'이라고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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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길을 가다가 걸음을 멈출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는 고개를 땅 아래로 숙이거나 아니면, 아예 무릎 자세로 잠시(혹은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다가 일어나기도 합니다. 대개는 그냥 스쳐지나가기에는 너무도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눈에 띤 까닭이기도 하지만, 그걸 핑계 삼아 그곳에 쪼그려 앉아 마음의 휴식을 취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마음의 휴식이란 말 그대로 잠시 마음을 내려놓는 것을 말합니다. 혹은, 제 마음이 정신없이 달려가고 있는 곳을 잠시 우두커니 바라보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런 행위는 마치 하루의 일과를 모두 마치고 양치질을 하면서 거울에 비친 제 못생긴 눈을 찬찬히 뜯어보는 일과도 흡사합니다. 못생긴 눈 대신 못생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이 다르겠지요.

자신을 뒤돌아본다는 것, 그것은 너무도 소중한 일이긴 하지만 가끔은 허망한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아무리 못생긴 마음을 반성하고 또 반성해도 다음날 제 마음의 거울에 비친  모습은 여전하기 때문입니다. 못생긴 눈이 늘 화장실 거울에 그대로 있듯이 말이지요. 물론 이 비유는 심정적으로만 타당합니다만.

수업시간마다 눈이 빨갛게 충혈 되어 있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런 저런 정황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데 인터넷 중독에 걸린 아이 같았습니다. 저는 아이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편이지만 그렇다고 수업시간에 잠을 자는 것을 허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그 아이는 교실 뒤편에 서서 수업을 받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것이 조금은 미안하기도 하고, 한 편으로는 아이의 장래가 걱정되기도 해서 하루는 쉬는 시간에 그 아이를 밖으로 불러냈습니다. 막상 불러내긴 했지만 저는 막막한 기분이었습니다. 이 아이에게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이미 습관으로 자리 잡은 것이 한 마디의 사랑의 언어로 문제가 해결 될까? 저는 떨리는 마음으로 이렇게 입을 열었습니다.

"널 혼내려고 부른 것은 아니고... 선생님 얘기를 좀 해주고 싶어서 그런 건데... 난 말이야...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말 문제가 많거든. 무슨 문제냐면... 좀 창피한 말이지만 내 마음에 더러운 똥 덩어리 같은 것이 가득 차 있는 것 같아. 그것을 아무리 깨끗하게 비워내고 싶어도 잘 안 돼. 인간이란 다 그런 가봐. 노력해도 잘 고쳐지지 않는 그런 것이 있는데 노력하지 않으면 더 심해지겠지?"

저게 뭐지? 세상에는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다. 알고보면 우리는 모두 닮은 꼴이다.
▲ 괭이밥 저게 뭐지? 세상에는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들여다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많다. 알고보면 우리는 모두 닮은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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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한 마디의 말이 그 아이의 삶을 전적으로 바꾸어 놓을 수는 없었겠지만, 그날 이후 아이가 교실 뒤편에서 수업 받는 일이 조금씩 줄어든 것은 사실입니다. 웃자고 하는 말이지만 그날만큼 제 마음에 가득 찬 똥 덩어리들이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습니다. 어쩌면 제가 지닌 문제로 인해 아이의 문제를 깊이 이해하고 안아줄 수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지난 금요일(22일), 영어로 영어를 가르치는 TEE(Teaching English in English) 수업시연이 있었습니다. 다섯 명의 교사가 한 팀이 되어 이른바 팀 티칭(Team teaching)으로 이루어지는 이 수업시연에서 저는 학생들로 하여금 수업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갖도록 동기부여를 해주는 첫 번째 역을 맡았습니다. 수업에서 다룰 주제를 사진이나 그림 자료 등을 통해 추측하거나 예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도 제가 맡은 임무 중 하나였습니다.

그날 수업 주제는 '백신(Vaccine)과 자폐증(Autism)'이었습니다. 저는 원어민 교사의 지도와 동료교사들과의 협조체제 속에서 수업에 필요한 정보나 사진 등을 인터넷에서 다운 받거나 직접 제작하여 수업에 이용하고자 했습니다. 그런 준비가 거의 끝나갈 즈음, 저녁을 먹고 운동 겸 산책 삼아 연수원 뒷산에 올라갔다가 구멍이 숭숭 뚫린 볼품없는 낙엽을 몇 장 주어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저는 해마다 가을수업이라는 것을 합니다. 종이에 낙엽을 몇 장 붙여놓고 이런 저런 글을 써보게 하는 것인데, 그때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낙엽을 손에 들고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때 일을 떠올리며 학생 역을 해주신 동료교사들 앞에서 이렇게 입을 열었습니다. 물론 영어로. 

"이게 뭐지요? 나뭇잎이네요. 이 나뭇잎이 예쁜가요? 이 나뭇잎에는 많은 구멍과 상처 자국들이 있어요. 그래서 여러분들은 이 나뭇잎이 아름답지 않다고 생각할 지도 몰라요. 하지만  선생님 생각은 달라요. 그것은 이 구멍과 흉터들을 통해서 여러분을 볼 수 있고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에요. 아, 다 보이네요. 만약 이 하얀 종이처럼 구멍이나 상처자국이 없었다면 난 여러분을 볼 수 없을 거예요. 이처럼 완벽한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니지요.

그리고 이 구멍과 상처는 누군가의 먹이가 된 흔적일 수도 있어요. 누구의 먹이일까요? 벌레와 새, 그리고 많은 동물들의 먹이가 되었겠지요. 그러니 얼마나 아름다운가요? 그런데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거지요? 맞아요. 이것이 오늘 수업 주제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럼 이제 수업 주제로 들어가 볼까요?"

이렇게 약 2분이 지나고 수업주제와 연관된 자료와 사진 몇 장을 학생들(동료교사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중 마지막 사진은 영화 '말아톤' 포스터였습니다.

학생들에게 수업 주제에 대한 접근과 동기부여를 위해 마련한 영화 '말아톤' 포스터(우)
▲ 영어심화연수 학생들에게 수업 주제에 대한 접근과 동기부여를 위해 마련한 영화 '말아톤' 포스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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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아톤 영화 보셨나요? 이 영화에서 배우 조승우가 자폐증 환자인 초원이 역을 맡았지요. 아마도 그는 이 나뭇잎을 닮았는지도 몰라요. 그의 뇌 속에는 많은 구멍과 상처자국들이 나 있을 지도 모르고요. 하지만 그는 완벽해요. 그는 아름다워요. 왜냐하면, 이 나뭇잎이 아름답듯이."

수업을 끝내고 뭔가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영어가 유창하지 못한 저로서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지만, 그래도 수업 시간 내내 학교 아이들이 머리에 떠올랐던 것은 제게 작은 위안이 되기도 했습니다. 더러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마음의 상처로 이미 구멍이 숭숭 뚫려버린 아이들.

그들을 이해하고 보듬어 안을 수 있는 것은 제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제 가슴에도 크고 작은 구멍이 숭숭 뚫려 있기 때문입니다. 그 구멍과 흉터를 통해서 아이들의 상처와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많이 보고 싶습니다.


태그:#영어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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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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