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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주아문 가는 길에 뒤돌아본 설화산. 맹씨행단은 설화산 북동쪽 기슭에 있다.
 온주아문 가는 길에 뒤돌아본 설화산. 맹씨행단은 설화산 북동쪽 기슭에 있다.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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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단의 유래

설화산 고개에서 맹씨행단으로 난 숲길을 내려간다. 숲길 저편을 바라보자 산 능선을 두부처럼 절개해버린 채석장이 불쑥 모습을 드러낸다. 채석장은 흉물스런 몰골을 한 채 마을을 내려다보고 있다. 맹씨행단이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살림집이 있는 마을 풍경이 저렇게 생채기를 입은 채 버려져 있다는 게 안쓰럽다.

이윽고 산길이 끝나는 곳에 중리 마을이 모습을 드러낸다. 맹씨행단은 마을 중앙에서 약간 좌측으로 치우친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고택 앞에는 늙은 팽나무 한 그루가 마치 문지기처럼 버티고 섰다. 솟을대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서자 후손들이 사는 살림집이 가장 먼저 나그네를 맞는다. 꽃 진 자리가 선명한 모란 몇 그루가 뜨락을 지키고 있다. "모란꽃이 한창일 때 왔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여행지에 가면 늘상 되풀이되는 후회 한 자락이 가슴을 스친다. 

행단은 한층 더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돌계단을 오르자, 우측 마당가에 서 있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나그네를 반긴다. 고택의 주인이었던 맹사성이 아홉 살 때 직접 심었다고 하는 600여 년 된 은행나무다. 이 고택이 행단(杏壇)이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은 이 은행나무들에서 비롯했다. 행단이란 송나라 건흥 연간에 공자의 45대손 공도표가 공자의 묘를 보수할 적에 옛날 강당이 있던 자리에 돌을 쌓고 은행나무를 둘러 행단이라 한데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원래 이 행단이 은행나무를 가리키느냐 아니면 살구나무를 가리키느냐는 약간의 논란이 없지 않다. 조선시대 이수광은 저서 <지봉유설>. 제자(諸子) 편에서 중국에서 펴낸 고금의 여러 책에 나오는 요어(要語)·사실(事實)·시문(詩文)을 뽑아 실은 책 <사문유취>의 내용과 "단 위의 붉은 살구 꽃송이가 반은 떨어졌네(壇上杏花反落紅)"라고 한 강희맹의 시를 근거로 하여 행단의 나무가 은행나무가 아니라 살구나무일 것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논란과는 상관없이 이제 은행나무는 공자와 관련 있는 나무가 돼버렸다. 아마도 맹사성이 이곳에 은행나무를 심은 것도 공자의 행적과 사상을 늘 잊지 않고 기리고자 하는 뜻이었으리라.

부엌을 없애버린 까닭에 쓸모를 잃어버린 안채

맹씨행단 안채.
 맹씨행단 안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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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를 떠나 마당 안으로 몇 걸음 들어가자 사적 제109호 맹씨행단이 단출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 집이 조선 세종 때 청백리로 날렸던 고불 맹사성(古佛. 1360~1438)이 살았던 집이다. 원래 이 집은 고려 말 최영 장군의 집이었다고 한다. 이웃에 살던 맹사성의 사람됨을 눈여겨본 최영이 손녀사위로 삼고 집까지 물려주었다는 것. 하지만 전해지는 이야기를 온전히 믿을 수는 없다. 철원이 고향인 최영이 왜 이곳에다 집을 지었는지 아리송한 일이다.

현재 맹씨행단 본채는 'H'자형 건물이다. 건물 가운데 두 칸의 대청을 두고 좌우에 세 칸씩 온돌방을 배치했으며 반 칸 크기의 퇴칸을 앞으로 낸 구조다.

고려 말에 지어졌으니 여러 차례 중수를 거쳐 현재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다. 가장 큰 변화는 아마도 집 방향이 크게 바뀐 것이 아닌가 싶다. 현재 이 집은 정좌계향(丁坐癸向)을 하고 있다. 배방산을 바라보면서 북북동 쪽을 향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는 손좌건향(巽坐乾向, 북서향)이었던 것을 1482년 중수 때 이렇게 고쳤다고 한다. 집을 거의 새로 지은 셈이다. 어쩌면 이때의 중수는 조선 초에 비로소 도입된 온돌방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었을지. 

가장 최근에 보수한 것은 1964년이었다. 그러나 이때 매우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초창기 때의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건물 앞쪽에 붙어 있던 부엌을 철거해버렸던 것이다. 부엌이 없는 건물이 돼 버렸으니 자연히 사람이 살지 않게 되었다.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간다.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지만 집주인이 가로막지 않는 한 안으로 들어가 앉아보곤 한다. 밖에서만 바라보는 건 수십 번을 바라본다 치더라도 객(客)의 입장일 뿐이다. 안에 들어앉아서 밖을 내다봐야 이곳에 살았던 주인의 입장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고 왜 건물을 이렇게 지었는가를 알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종도리를 받치는소슬합장과 복화반.
 종도리를 받치는소슬합장과 복화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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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돌방의 눈꼽째기창.
 온돌방의 눈꼽째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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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으로 들어가서 먼저 가구(架構)를 올려다본다. 기둥에 들보를 엊어 지붕을 구성하는 가구법이 이 집만의 특이한 구조라고 한다. 종도리를 소슬합장과 대들보 가운데 놓여 종도리를 받는 마루대공의 아래쪽을 꽃을 엎어놓은 듯한 모양의 복화반으로 받혔다.

소슬합장이란 마루대공 양쪽에 ∧ 형태(소슬)로 나무를 덧대어 도리를 단단히 받치는 것을 말한다. 소슬합장은 조선 초에 반짝 유행했던 건축 기법이다.

이번에는 자리에 좌정한 채 열린 문 사이로 비치는 풍경을 바라본다. 대청 전면에는 모두 6개의 문짝이 달려 있다. 좌측 칸 3짝 문짝 중 가운데만이 여닫이문이고 나머지 5짝은 들어열개문이다. 왜 모두 들어열개를 하지 않은 것일까? 이것은 아마도 앞마루를 놓기 전에 설치했던 예전 문짝을 마루를 놓은 후에도 그대로 이용하였기 때문이 아닐는지.

대청 안에서 바라본 배방산 줄기.
 대청 안에서 바라본 배방산 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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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대청마루에 앉아 밝은 마당 풍경과 산줄기를 바라보노라니 마음이 아늑해지고 평화로운 느낌이 든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게 북향으로 집을 앉힌 이유 가운데 하나가 어쩌면 배방산 산줄기를 바라보고자 하는 고불의 마음을 담은 것은 아니었을까.

음악에 조예가 있어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서 즐겼다는 고불이다.  어두운 방안에 홀로 앉아 퉁소를 부는 모습을 상상하니 나 자신이 어느덧 고불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든다.  

건물 우측 측면과 굴뚝.
 건물 우측 측면과 굴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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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씨가의 사당인 세덕사.
 맹씨가의 사당인 세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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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을 나와 뒤꼍으로 돌아가서 건물의 뒤태를 살펴본다. 건물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다 층층이 기와를 쌓아올리고 연가를 얹은 굴뚝의 모양이 꽤나 아름답다. 이렇게 굴뚝을 건물에 바로 매달지 않고 조금 거리를 두고 설치해서 연기가 땅 밑을 통해 밖으로 빠지게 하는 방식은 경복궁 교태전 굴뚝 등에서도 사용했던 방식이다.

본채 뒤에 있는 사당인 세덕사(世德祠)로 간다. 이곳은 맹사성의 할아버지이신 맹유, 부친인 맹희도, 맹사성 3위(位)를 모신 사당이다. 사당 앞에는 전나무·감나무 등이 넓은 그늘을 이루고 있다.

길가엔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두꺼비 등 동물을 닮은 괴석들이 줄지어 놓여 있다. 수석은 옛부터 모든 사물 가운데 군더더기가 없고 가장 완성된 것 가운데 하나라 해서 선비들이 사랑을 받은 것이다.

사당 뒤편으로 돌아가자 노란 장미 한 그루가 꽃을 피우고 있다. 장미야, 장미야. 바라보는 이 없어도 홀로 꽃을 피우는 네 모습이 가상하긴 하다만 여긴 네가 있을 자리가 아는 듯 싶구나.

만약에 고불이 이 땅에 다시 살아온다면

세 정승이 어울려 국사를 논의 했다는 구괴정.
 세 정승이 어울려 국사를 논의 했다는 구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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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 좌측 담에 난 중문을 통해 밖으로 나간다. 맹사성과 황희 권진 등 세 정승이 어울려 국사를 논의했다는 삼상당이란 정자를 돌아보기 위해서이다. 이들이 아홉 그루 느티나무를 심고 세운 정자라 해서 구괴정이라고 불리던 정자다. 정자에 올라 앞을 바라보니 몇 길로 높이 자란 나무들에 가려서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본래는 이곳에 서면 배방면 들녘과 배방산이 환히 바라다보이는 탁 트인 구조였을 것이다. 아깝긴 하지만, 정자의 기능을 살리려면 앞의 나무 두어 그루는 베어내는 게 좋을 듯 싶다.

다시 행단으로 돌아와 마루턱에 걸터앉아 잠시 배방산을 바라보다 길을 나선다. 걸어서 30가량 걸릴 것으로 추정되는 온주아문으로 가는 길이다. 온주아문은 조선시대 온양군의 관아 건물이 있던 곳이다. 걸어가면서 고불과 그의 삶에 대해 생각한다.

그는 효성이 지극하고 청렴하여 청백리로 추앙을 받았던 인물이다. 벼슬이 좌의정에까지 올랐지만 그는 소탈하고 조용하며 엄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비록 벼슬이 낮은 사람이 찾아왔더라도 반드시 공복(公服)을 갖추고 대문 밖에까지 나아가서 맞아들여 윗자리에 앉혔다고 한다. 돌아갈 때에도 역시 공손하게 배웅하여 손님이 말을 탄 뒤에야 들어왔다.

또한 음악에 조예가 있어 스스로 악기를 만들어 즐겼으며, 집 밖을 나설 때는 소를 타고 다니는 등 남루한 행색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재상인 줄 알아채지 못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는 조선시대에선 매우 보기 드문 탈권위주의적인 사람이었다.(그러나 평소와는 달리 국사를 논할 때는 과단성이 있었다고 한다.)

강호(江湖)에 봄이 드니 미친 흥이 절로 난다
탁료계변에 금린어 안주로다
이 몸이 한가하옴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 - 맹사성 '강호사시가' 중 '춘사(春詞)'

벼슬에서 물러나 시냇가에서 쏘가리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시면서 한가하게 살아가는 고불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러나 논둑길로 걸어가면서 바라본다. 모내기에 바쁜 고불의 고향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오늘, 고불이 이 땅에 다시 살아온다면 옛날같이 한가하게 음풍농월하면서 한 시절을 보내진 못할 것이다. 내 의견에 동조한다는 것인지 멀리 바라다보이는 설화산이 살짝 고개를 끄덕인다.

덧붙이는 글 | 지난 5.23일(토요일)에 다녀왔습니다.



태그:#충남 아산 , #설화산 , #맹사성 , #맹씨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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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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