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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어머니 평생직업인 농사에 대해서 무관심했다. 부모님이 농사지어서 보내준 쌀과 고추, 배추 등을 여태껏 얻어먹으면서도 어떻게 자라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다. 반성하는 마음으로 농사일 체험기를 쓴다. -기자주-

농사를 한 해 더 짓기로 했다. 아버지 연세 올해로 여든 둘, 이제 쉴 만도 하건만 농사일을 손에서 놓기가 아쉬웠는지 "딱 한번만 더 해야 것다" 라고  던지듯이 말씀 하시고는 볍씨를 담갔다. 벼농사는 볍씨를 담그면서 시작된다.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그러셨다. 그 때도 "딱 한번만 더 해야 것다" 며 자식들 만류를 뿌리치고 농사를 지으셨다. 아버지가 농사를 한 해 더 짓는다는 말은 곧 내가 농사일을 한 해 더 거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올 해는 더 열심히 일해야 할 형편이다. 아버지 건강이 갑자기 나빠졌기 때문이다. 이름만 들어도 무시무시한 '뇌경색' 이다. 뇌경색은 뇌에 혈액을 보내는 동맥이 막혀 혈액이 흐르지 못하거나 방해를 받아 그 앞쪽의 뇌 조직이 괴사(壞死)하는 병이다.

'뇌경색' 증상이 있다는 의사 진단을 받은 이후 아버지는 부쩍  마음이 약해지셨다. 아마 의사 진단을 작년 겨울쯤 받았다면 "딱 한번만 더 해야 것다" 라는 말을 하지 못 했을지도 모른다. 덕분(?)에 '무늬만 농촌출신' 일손이 무척 바빠졌다. 지난 5월14일, 모내기 하러 고향집에 갔다. 고향은 충남 예산에 있는 작은 농촌 마을이다. 

"젊은 애 하나 불렀다. 둘이 부지런히 허면 금방 끝날겨"

모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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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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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 아배야, 이제 그만 자고 일어나라. 밥 먹고 시작 허자."

아버지 목소리를 듣고 눈을 떠 보니 새벽 5시, 평소 같으면 한창 꿈나라에 있을 시간이다. 어머니는 벌써 밥상까지 차려 놓고 막내아들을 기다리고 있다. 창밖을 보니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다. 모내기를 하려면 비닐하우스에서 키운 모를 일단 논으로 날라야 한다. 오늘 내 임무는 모판을 논에 나르는 것이다. 운반 수단은 경운기다.

"비 많이 오는데 괜찮을까요?"
"괜찮여... 기쟁(기정)이 헌티 일 맞춰놔서 그냥 해야 되여."

모 심는 기계를 가지고 있는 기정이 형과 약속이 돼 있기 때문에 비가 아무리 많이 와도 오늘 모를 심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기정이 형은 올해 쉰 셋 된 고향 마을 '젊은 피' 다. 단순한 젊은 피가 아니라 슈퍼 스타급 젊은 피다.

기정이 형이 없으면 고향 마을 농사는 거의 불가능하다. 노인들만 살기 때문이다. 기정이 형은 벼농사에 필요한 모든 장비를 갖추고 있다. 또 마을 일을 도맡아서 할 만큼 농사일에 익숙하고 부지런하다. 이 정도면 고향 마을에서는 '슈퍼스타' 다.

"젊은 애 하나 불렀다. 둘이 부지런히 허면 금방 끝날겨."
"누구를 부르셨어요"
"정연(가명) 이 아버지여."

아무리 생각해 봐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다. 어쨌든 누군가 온다니 기쁜 일이다. 농촌에서 일손 구하기는 하늘에 별 따기 만큼이나 어렵다. 더군다나 젊은 사람 구하기는. 잠시 후 아버지가 말씀하신 '젊은 애' 가 도착했다. 그 '젊은 분' 얼굴을 보고 하마터면 뒤로 넘어질 뻔 했다. 아버지가 말한 '젊은 애' 는 70대 노인이었다.

"아버지 경운기가 오래돼서 고장 났나 봐요. 왜 시동이 안 걸리죠?"
"얘 잠깐 나와 봐라, 내가 한번 해볼게."
"에이, 아버지 아무래도 힘쓰는 것은 제가 낫지요. 기다려 보세요. 한번만 더 해 볼게요."
"나와 봐, 힘만 가지고 하는 것이 아녀."

고향집에 있는 경운기는 서른 살이 넘은 골동품이다. 기계 나이로 치면 팔순이 넘은 할아버지다. 시동기가 경운기에 장착되기 전에 나온 탓에 시동을 걸려면 팔 힘만으로 엔진을 몇 바퀴 돌려 줘야 한다. 아직은 팔팔하고 체격까지 건장한 40대 초반인 내가 그 몇 바퀴를 돌리지 못해서 쩔쩔 맨 것이다. 

병색이 완연한 팔순 노인 팔 힘이 나보다 세다는 사실을 이때 처음 알았다. 아버지가 몇 바퀴 돌리자 "퉁 퉁 퉁 " 소리를 내며 경운기 시동이 걸린다. 머쓱해지는 순간이었다. '무늬만 농촌출신'이란 것이 또 한번 증명되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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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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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얘 이리 내려와, 그렇게 가다가는 해 다가것다."

건장한 40대가 또한번 머쓱해지는 순간이었다. 경운기를 너무 천천히 몬다며 팔순 노인이 운전석에서 내려오라며 고함을 쳤다. 생각해 보니 좀 느리기는 하다. 아버지가 손을 대니 느릿느릿 하던 경운기가 오토바이처럼 빨라진다. 난 경운기 기어가 3단까지만 있는 줄 알았다. 아버지는 6단에 놓고 경운기를 몰았다.

모판을 나르는 일은 아버지 말대로 금세 끝났다. 반나절도 채 걸리지 않았다. 비록 병색은 완연하지만 강단 있는 팔십대 아버지와 30대 같은 칠십대 아저씨 덕분이다. 70대 아저씨는 아직 어려서(?) 경로당에도 가지 않는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모판을 논에 뿌리자마자 고향마을 슈퍼스타 기정이 형이 이앙기를 트랙터에 싣고 나타났다. '슈퍼스타' 다운 늠름한 모습이다. 갯벌 같던 논바닥이 금세 푸른 들판으로 변한다. 여린 벼들이 바람을 타고 하늘거리는 모습이 귀엽다.

올해 농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80, 70대 노인들에게 허약하다는 놀림을 받으며. 그날 '무늬만 농촌 출신'은 70, 80대 노인들에게 완전히 '새' 됐다. 아버지가 '젊은 애' 라고 표현한 70대 아저씨는 이렇게 말하며 혀를 끌끌 찼다.

"요즘 애들 너무 약해서 큰일이여, 저래가지고 어따 써먹어! 증말 큰일이여."

덧붙이는 글 | 안양뉴스 유포터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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