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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만물상이다. 삼라만상을 대한민국 서울에 우겨 넣은 마냥 없는 게 없다. 하늘을 찌르는 고층빌딩, 빌딩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세계 각국의 자동차, 성냥갑을 수십 개 쌓아 놓은 것 같은 아파트까지. 사람도 많다.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갓난 애기부터, 똥오줌 못 가리는 치매노인까지. 이들은 남녀노소 구분 없이 서울시민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서울이란 곳은 어떤 이는 꿈을 꿀 때 다른 이는 악몽을 꾸는 곳이다. 웃음도 많고 눈물도 많아, 서울에는 이야기도 많다.

동시대를 대표하는 9명의 여성 소설가 9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작가들의 이름만 듣고도 가슴 설레일 독자들도 있을 터. <서울, 어느 날 소설이 되다>는 이혜경, 하성란, 권여선, 김숨, 강영숙, 이신조, 윤성희, 편혜영, 김애란이 각자 서울을 배경으로 쓴 단편을 모았다. 작가들의 연령대가 40대에서 20대까지고, 일부는 서울이 고향이고 일부는 서울이 타향이라는 점이 인상적이다. 작가마다 세대가 다르고, 살아온 환경이 저마다 달라 서울을 바라보는 관점도 다르다. 각기 다른 9편의 이야기가 모인 이 책은, 전체적으로 팔색조처럼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적어도 이 소설에서 서울은 안락한 공간이 아니다. 오히려 죽음의 문턱에 가깝다. 강영숙의 <죽음의 도로>는 강변북로에서 자살을 기도하는 한 여인의 이야기다. 이 여인의 자살 동기는 뚜렷하지 않지만 소설에서 뿜어져 나오는 죽음의 기운만큼은 분명하고 또 거칠다. 한편 병상에 누운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옮긴 하성란의 <1968년의 만우절>는 삶의 무기력함을 잘 표현한 소설이다. 평소 몸가짐이 단정했던 아버지는 병에 걸리자 기저귀를 찬 채 다리를 훤히 드러내고 만다. 아버지는 민망해도 눈만 끔뻑일 뿐이다. 그걸 바라보는 딸의 가슴은 미어진다. 혀끝에 맴도는 쓴맛처럼 오랫동안 여운이 남는 작품이다.

책 곳곳에는 공포와 불안이 있다. 특히나 편혜영과 김애란의 작품이 인상적이다. 편혜영의 <크림색 소파>는 낙향해 소도시에 살던 젊은 부부가 다시 서울로 이사를 오는 하루 동안의 일을 그리고 있다. 편혜영의 전작이 그러하듯이 서울 변두리는 공포의 도가니다. 그들은 이사를 앞두고 크림색 소파를 새로 장만했다. 부부는 새로 이사한 집에 소파를 들여놓을 생각에 한껏 들떠 있다. 그러나 곳곳에서 사고가 터진다. 불량청소년을 만나고 빗길에 자동차가 고장 난다. 카프카의 <성>처럼 목적지가 손에 잡히지 않고, 부조리한 상황들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이 소설은 서울에 대한 막연한 꿈과 욕망 그리고 현실적으로 어마어마한 서울의 진입장벽을 묘사하고 있다.

김애란의 <벌레들>은 재개발 아파트촌이 배경이다. 내 집 마련이 꿈인 한 부부가 비교적 전세 값이 싼 아파트에 입주한다. 허나 싼 게 비지떡이라고, 새 집에는 벌레가 득실거린다. 집안에는 딱정벌레만한 바퀴벌레가, 집 밖에는 금방이라도 방충망을 뚫어버릴 것 같은 벌레 투성이다. 모골이 송연해지는 공포가 순간순간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둔중한 맛이 있다.

한편 시대상황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작품도 있다. 김숨의 <내 비밀스런 이웃들>은 다세대 주택에서 벌어지는 이웃들의 범상치 않은 관계를 스케치 한다. 주인집 할머니는 "조심해"라고 주술처럼 연신 소리를 지르고, 이웃집 여자와 아래층 남자는 사소한 일로 주인공의 신경을 긁는다. 소설은 서울에서 살아가는 건 하루하루 짜증이 쌓이는 삶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소설은 단순히 이웃 간의 관계를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들이 오늘밤에도 그곳으로 갈 거라더군"라고 말하는 남편의 말에 뼈가 있다. 아내는 그들이 누구인지, 그들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한 건, 이 소설은 2008년 서울을 뜨겁게 달구었던 촛불정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책의 매력은 모든 작가들이 개인적인 회고나 감상에 젖지 않고, 서울이라는 도시를 형상화 하고 있다는 점이다. 각 소설 속에는 공통적으로 사람들간의 관계가 전제되어 있다. 친구, 친척, 아버지와 딸, 아내와 남편 등. 뿐만 아니라 익명의 사람들의 관계를 다루는 부분에서는 도시의 특성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다. <서울, 어느 날 소설이 되다>에는 사랑, 그리움, 추억에서부터 불신, 짜증, 공포까지 천만가지의 감정이 오고간다. 이처럼 이 책은 다양한 삶의 맛을 음미하기에 좋은 소설이다.


서울, 어느 날 소설이 되다

하성란.권여선.윤성희.편혜영.김애란 외 지음, 강(2009)


태그:#서울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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