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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상암동에 새로 보금자리를 마련해 현존 최고(最古)의 한국 영화 <청춘의 십자로>와 일제시대 말기의 국책(國策)영화 <병정님(兵隊さん)> 등 귀중한 자료를 선보인 한국영상자료원이 1년만에 또 다른 일제시대 영화 화제작 한 편을 일본에서 입수해 공개했다. 개관 1주년 기획전의 일부로 5월 19일에 상영된 <그대와 나>이다.

1941년에 개봉한 <그대와 나>는 내선일체(內鮮一體)와 지원병 장려 등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국책영화로, 정식 제목도 실은 일본어로 표기된 <君と僕('기미토보쿠'라고 읽는다)>라고 하는 편이 맞다. 일반 영화사가 아닌 군 홍보기관, 즉 조선군(조선에 주둔한 일본군) 보도부(報道部)에서 제작을 맡았고, 대사도 모두 일본어로 되어 있다.

영화 <그대와 나>의 한 장면. 맨 왼쪽이 김소영.
 영화 <그대와 나>의 한 장면. 맨 왼쪽이 김소영.
ⓒ 한국영상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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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공개된 <그대와 나>는 아쉽게도 일부만 남은 불완전 판본으로, 원래 내용의 1/5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남아 있는 분량만으로도 개봉 당시 큰 화제가 되었던 초호화 캐스팅의 실제 면모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그야말로 전무후무하게 일본·조선·만주를 망라한 '대동아 올스타'의 향연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대와 나>에 출연한 일본 배우는 고스기 이사무(小杉勇), 오비나타 덴(大日方傳), 미야케 구니코(三宅邦子), 마루야마 사다오(丸山定夫), 가와즈 세이자부로(河津淸三郞), 아사기리 쿄코(朝舞鏡子) 등인데, 모두 당시 일본 영화계에서 일급 스타로 꼽히며 활동하던 이들이다. 만주국 배우로는 가수를 겸해 활동하며 동아시아의 슈퍼스타로 각광을 받은 리샹란(李香蘭)이 출연했다. 리샹란은 당시 일반적으로 중국인이라 알려져 있었지만, 실은 만주에서 나고 자란 일본인이었다.

조선인 출연자의 면면은 더욱 친숙하면서도 다채롭다. 남자 배우로는 황철, 심영, 서월영, 이금룡 등이 출연했고, 여자 배우로는 복혜숙, 문예봉, 김신재, 김소영 등이 배역을 맡았다. 모두 당대 조선 최고의 배우들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영화 <그대와 나>의 한 장면. 서 있는 뱃사공이 김정구, 그 왼쪽에 군인 복장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김영길, 그 앞에 양장 모자를 쓴 여자가 아사기리 쿄코, 그 왼쪽에 앉은 여자가 김소영. <한국가요사 1>(박찬호 지음, 안동림 옮김, 미지북스, 2009)에서 발췌.
 영화 <그대와 나>의 한 장면. 서 있는 뱃사공이 김정구, 그 왼쪽에 군인 복장으로 앉아 있는 남자가 김영길, 그 앞에 양장 모자를 쓴 여자가 아사기리 쿄코, 그 왼쪽에 앉은 여자가 김소영. <한국가요사 1>(박찬호 지음, 안동림 옮김, 미지북스, 2009)에서 발췌.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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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주인공 역을 맡은 김영길은 전문 배우가 아니라 일본에서 나가타 겐지로(永田絃次郞)라는 예명으로 활동한 오페라 가수이며, 단역 백마강 뱃사공으로 출연한 이는 <눈물 젖은 두만강>을 부른 가수 김정구이다. 그밖에 사정상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영화 기획 단계에서는 전통무용의 대가 한성준과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도 출연을 승낙했다고 한다.

지역과 분야를 아우른 스타들의 출연으로 <그대와 나>에는 흥미로운 볼거리가 적지 않다. 이번에 상영된 부분만 보아도 뱃사공 김정구가 노를 저으며 영화 주제가 <낙화삼천>을 부르는 장면, 아무래도 연기는 좀 어색한 김영길이 본업인 가수로서 장기를 살려 민요 <양산도>를 부르는 장면, 거기에 화답해 리샹란이 <양산도>를 한국어로 함께 부르는 장면 등이 이목을 집중시킨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부분에 있을 조선악극단 출연 장면도 상당히 기대가 되는 대목이다.

김정구가 부른 영화 <그대와 나> 주제가 <낙화삼천> 음반 딱지.
 김정구가 부른 영화 <그대와 나> 주제가 <낙화삼천> 음반 딱지.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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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일본 열도를 평정한 명테너 김영길의 달콤한 목소리로만 영화 <그대와 나>를 즐길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국책영화로서 지향하는 목적을 충실히 구현하기 위해 촬영된 장면들을 보고 있노라면, 아무래도 입이 쓸 수밖에 없다.

광복 이전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남자 배우로 꼽혔고 광복 이후 월북해 북한에서도 최고의 대우를 받은 황철이, '덴노헤이카 반자이(천황폐하 만세)'를 외치며 죽은 조선인 지원병 제1호 전사자 이인석 역을 열연하는 장면이나, 어색하기는커녕 충분히 아름답기만 한 김소영의 기모노 입은 모습 등을 보면, 권력의 필요에 부응하는 예술의 빛과 그림자를 여실히 보게 된다.

연기가 어색함에도 불구하고 배우도 아닌 오페라 가수 김영길을 남자 주인공으로 발탁한 것도 어떤 면에서는 일리 있는 선택이었다. 음악을 공부하기 위한 방편이기는 했지만 일본 군악대에 자원입대해 1930년부터 1934년까지 5년간 복무했고, 1939년에는 일본인 아내를 맞기까지 했으니, 김영길이야말로 '지원병'과 '내선통혼(通婚)'을 몸소 실천한 흔치 않은 실례였던 것이다.

거의 70년 전에 만들어진 작품이라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고, 그나마도 1/5 토막만 남아 있는 형편이기는 하나,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그대와 나>는 충분히 관심을 모으는 영화이다. 오는 29일 금요일 오후 5시에 상영 일정이 한 차례 더 잡혀 있으니, 달콤함이든 씁쓸함이든 직접 보고 느껴 보시라.

<너와 나>? <그대와 나>?

영화 <그대와 나> 주제가 <그대와 나> 음반 딱지.
 영화 <그대와 나> 주제가 <그대와 나> 음반 딱지.
ⓒ 이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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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영상자료원에서는 <君と僕>를 일단 <그대와 나>가 아닌 <너와 나>로 통일해 쓴다고 밝혔다. 그 이유는 KMDb, 즉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에 현재 <너와 나>로 올라 있으므로 거기에 근거한다는 것인데, '짜장면, 아니죠! 자장면, 맞습니다!'를 고수하고 있는 국립국어연구원의 논리만큼이나 좀 옹색해 보인다. KMDb라는 것도 사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구축해 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주제가 음반 표기를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당대 자료에서는 거의 대부분 <그대와 나>를 쓰고 있다. 이번 기회에 KMDb도 수정을 하면 깔끔하게 정리가 될 듯하다.



태그:#그대와 나, #한국영상자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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