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벨리즈 오렌지 워크에서 자전거 타고 지나가던 현지인.
▲ 강렬한 인상 벨리즈 오렌지 워크에서 자전거 타고 지나가던 현지인.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오, 이런. 미안해요."
"아뇨, 괜찮습니다."

한 여름 밤의 무더위를 덮어 씌워놓은 벨리즈 작은 마을의 중앙 공원은 더위를 식히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미 소방서에 하룻밤 잠자리를 허락받은 나는 허기를 달래려 길거리 간이 음식을 찾았다. 사람들에게는 그저 간식거리인 벨리즈판 튀김만두는 나에겐 하루 두 번 있는 일용할 양식이었다. 그런데 앞 손님이 빠지고 대열이 흐트러지면서 줄 서 있던 앞의 여자가 그만 실수로 내 발을 밟아 버렸다. 웃으며 눈을 마주치는 순간 우리 인연이 시작되었다.

"우린 댈러스에서 왔어요. 이 남자와 함께 휴가 중이에요."
"저도 작년에 자전거로 미국을 횡단했지 뭡니까? 댈러스는 가보지 않았지만 애리조나의 혹독한 더위는 아직도 기억이 나는군요."

"세상에나! 자기야, 이 친구가 자전거로 미국을 횡단했다는군요."
"다 듣고 있어. 스티븐입니다. 여기 벨리즈가 그녀의 고향이지요."

"그렇군요. 부부신가 봐요?"
"아뇨, 우린 올 8월에 결혼 예정이랍니다."

"정말요? 축하드려요! 난 외로움에 찌든 명품솔로(special solo) 미스터 문입니다."
"정말 반가워요. 기념으로 이 작은 간식은 저희가 부담하도록 할게요."

"대단히 감사합니다. 허기 좀 면해야겠네요."
"아니 그러지 말고요, 여기서 이럴게 아니라 그렇잖아도 우리 저녁 먹으려던 참이었는데 괜찮다면 놀러 오시겠어요? 저 밑에 사촌이 운영하는 레스토랑이 있거든요."
"맙소사, 미국인들이란! 정말 깊은 감동이 밀려오는 군요. 앞장서시죠."

미사를 드리는 가톨릭 신자들.
▲ 경건 미사를 드리는 가톨릭 신자들.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벨리즈의 오렌지 워크(Orange Walk)라는 내륙 도시에 왔다. 벨리즈에선 나름 큰 도시인데도 시골의 면 규모나 될까한 아주 작은 마을이다. 자전거를 타고 오다 보니 이 마을뿐이어서 하루 쉬어 갈 요량으로 멈췄다. 그리고 지금까지 가 본 곳 중 가장 규모가 작고 허름한 소방서 시멘트 바닥에 허락을 맡아 짐을 풀어 헤쳤다. 그저 누울 자리만 있는 것으로 감사가 되니 이것이 바람과 마주하고, 고독을 벗 삼는 나그네 간지.

저녁에 도착했을 땐 이곳이 그냥 그런 작은 도시인 줄 알았는데 스티븐의 차를 타고 살짝 들어가 보니 밀림으로 들어가는 강이 보였다. 냄새부터가 음산함을 자극하는 냄새. 또 내륙에서 재배된 사탕수수를 가공해 유일한 교통로인 강을 따라 물자를 수송하는 슈거 쉽(Sugar ship)이 중저음의 육중한 동력음을 내며 지나갔다. 물론 악어도 다닌단다.

예배당이 다 수용못할 정도의 인원이라 사람들이 밖에까지 나와 있다. 일요일엔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하루 세 차례 정도 미사가 드려진다.
▲ 주일 미사 예배당이 다 수용못할 정도의 인원이라 사람들이 밖에까지 나와 있다. 일요일엔 아침 7시부터 저녁 7시까지 하루 세 차례 정도 미사가 드려진다.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이곳은 알려진 관광지가 아니기에 밀림가의 아늑함을 느끼고 싶은 여행자들만 알음알음 정보를 듣고 찾아온다. 우리 테이블 말고도 조용한 곳을 찾아 온 아리따운 미국 아가씨 여행자 두 명과 독일 여행자 가족, 그리고 남자친구끼리 배낭여행 온 캐나다 느끼남들(유감스럽게도 매우 멋진 대학생이나 내 눈엔 그저 가시) 등이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캐나다 두 남자와 미국의 두 아가씨 여행자의 즉석 합석이 이루어지고, 마음속으로 저주를 내린 나의 바람은 캐나다 남자들을 향해 천사의 미소를 짓던 그녀들의 반응으로 인해 산산이 부서졌다. 아, 유일한 동질감이 서는 그 많던 일본인 여행자는 다 어디로 갔을까.

"그래, 문(Moon)은 뭐 먹을 거야? 여기 치킨구이가 괜찮은데 한 번 먹어볼래?"
"좋죠."
"맥주? 칵테일? 아니면 와인도 있고."
"콜라!"

스티븐의 도움을 받아 음식을 주문한 나는 심각한 허기로 웃음기가 거의 사라진 상태였다. 오더를 받던 스티븐 여자친구의 동생이 내 주문을 주방에 알리려 할 때였다. 눈치 없던 난 순간의 용기가 이 밤의 행복을 가져다 줄 거란 판단에 확신이 차 그의 뒤통수에 대고 소리쳤다.

"미안한데 나 많이(Muchacho) 주세요."
"뭐라고요?"
"나 많이 원한다고요(Yo Querer Muchacho)."

어눌한 스페인어로 답하자 갑자기 직원들과 손님들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그리고 다들 배꼽 잡으며 포복절도 하는 것이었다.

스티븐 여자친구 사촌이 경영하는 레스토랑.
 스티븐 여자친구 사촌이 경영하는 레스토랑.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그래? 주방! 여기 한국에서 온 친구가 오늘 뜨거운 밤을 원하나 봐. 어디 예쁘장하게 생긴 어린 남자 없어?"

그는 주방 뿐만 아니라 야외에 있는 손님들까지 다 들으라는 듯 일부러 크게 소리쳤다. 손님들은 너무 재밌다는 듯 동양에서 온 나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내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하니 그걸 보고 또 폭소를 터뜨리는 것이다. 영문을 모른 난 스티븐에게 물었다.

"대관절 무슨 소리에요?"
"너 게이니?"
"네? 당연히 아니죠!"
"문, 네가 방금 남자를 원한다고 했잖아."
"……?"
"네가 원했던 무차쵸(Muchacho)는 바로 남자란 뜻이야. '많다'는 뜻의 무쵸(Mucho)와 착각했나 봐."
"아차!"

그 때서야 분위기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멋쩍게 웃고 말았다. 졸지에 남자를 원하는 게이로 낙인찍힌 것이다.

"여기 어린 남자를 그리워하는 손님에게 누구 짝 소개시켜줄 사람 없나요? 여행하는 이 친구를 위해 보디가드로도 쓸 수 있으면 금상첨화죠."

익살스러우면서도 장난기 많은 웨이터는 잘 익은 치킨구이를 내놓으며 한 번 더 골탕을 먹였다. 사람들은 연신 즐거워하며 내 실수를 해프닝으로 받아들였다. 어쩔 수 없는 노릇. 붕 뜬 분위기 속에서 스페인어를 제대로 구사하지 못한 나의 실수다.

햇살 가득 담은 밀림 강 가에서.
▲ 아침 햇살 가득 담은 밀림 강 가에서.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그렇게 즐거운 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길 떠나기 전 인사를 하기 위해 스티븐을 다시 찾았다. 강 위로 포개 앉은 안개는 새소리에 부서지고, 빛에 출렁이는 물결 사이로 악어가 유유히 지나간다. 그런데 다가가서 자세히 보니 선박장에 묶어놓은 모형 악어다. 어젯밤 그들의 농담에 완전히 속은 것이다.

아직 잠에서 덜 깬 스티븐과 그의 여자 친구와 헤어짐의 인사를 하며 짧은 인연 속에 숨겨진 소중한 추억의 장면을 담아냈다. 우린 이제 헤어지지만 각자의 삶에 추억의 한 편린으로 다시 만나리라. 그는 나에게 벨리즈의 유쾌한 친구로, 난 그에게 절절하게 남자를 원한 엉뚱한 자전거 여행자로.

오렌지 워크에서 만난 스티븐 커플.
▲ 인연 오렌지 워크에서 만난 스티븐 커플.
ⓒ 문종성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태그:#벨리즈, #세계일주, #자전거여행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