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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1>

 

우선 사사로운 얘기부터 하자. 지난해 병상생활을 마치고 퇴원했을 때 내 신장은 위험한 지경에 처해 있었다. 80% 정도 손상되고, 기능이 20% 정도 남았다고 했다. 남은 20%도 완전히 망가져서 혈액투석 단계로 가는 건 시간문제라고 했다.

 

긴장과 불안, 걱정이 크지 않을 수 없었다. 신장에 대한 양방 치료의 한계를 들어서 알고 있었다. 현상유지가 최선이라는 것, 최악으로 가는 진행을 지연시킬 뿐이라는 말을 듣고 있었다. 한방 치료로 방향을 돌렸다. 병의 50%는 의사가 고치고 50%는 환자 본인이 고친다는 말을 우선 명심했다. 하루 세 번씩 먹어야 하는 약 복용을 한 번도 거르지 않는다. 좋아하던 술도 끊고, 금기식품과 제한식품과 허용식품을 온 가족이 숙지를 한 가운데서, 음식 가리는 일에 최선을 다한다.

 

이제 정상 회복에 대한 희망을 갖는다. 한때 2.5까지 올랐던 Creatinine 수치가 얼마 전에는 2.0으로 나오더니, 5월 들어서 다시 피검사를 해보니 1.8로 기록되었다. 의사는 2.5에서 1.8까지 내려온 수치만큼 더 내려가면 정상 회복이라고 했다(참고로, 3.0은 혈액투석 단계이고, 0.7에서 1.3까지가 정상 수치라고 한다).

 

지난 8일은 또 한번 피검사 '결과지'를 가지고 서울에 있는 신장치료 전문 한의원을 가는 날이었다. 약도 떨어져서 또 한 달 분의 약도 지어와야 했다. 전화로 요청해서 택배로 약을 받기도 하지만. 지난 1월 이후 석 달이나 가지를 못했으니, 이번에는 직접 가서 원장께 피검사 결과지도 보여 드리고, 또 그 한의원의 특수 컴퓨터로 검사도 받아볼 생각이었다.

 

 

내 신장 수치가 점점 낮아지는 현상을 반기시는 어머니는 내 등을 떠밀었다. 올해 대학 4학년인 딸아이가 요즘 '교생실습' 때문에 집에 와 있으므로, 서울 합정동의 자취방에는 대학 새내기인 아들녀석이 혼자 있는 상황이었다. 어머니는 그 손자녀석에 대한 걱정과 안쓰러움 때문에 며느리도 등도 함께 떠밀었다.

 

5월 8일은 '어버이날'이라는 이름을 가진 날이었다. 아내가 근무하는 학교는 8일 하루 휴무를 해서 아내도 동행을 하기로 했는데, 노친을 모시고 사는 처지에, 어버이날을 골라 부부가 함께 출타를 한다는 것은 아무래도 저어되는 일이었다. 게다가 지난 2005년 상처(喪妻)를 한 후로는 퇴근 후 형 집으로 와서 저녁을 먹는 동생, 금요일이나 토요일 오후에는 학교 기숙사에서 나오는 고교생 조카아이, 데리고 사는 초교생 조카아이 등 동생네 세 식구의 치다꺼리를 올해 86세이신 노친께 온통 쓸어 맡기고 출타를 한다는 것은 정말 죄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걱정 말고 다녀오라고 했다. "자취방에 혼자 있는 우리 애기 고생하지 않고 외롭지 않게 주말 이틀을 함께 지내고 오라"는 신신당부를 거듭거듭 하셨다. 나는 일이 잘된다 싶었다. 마음놓고 용산미사에도 참례하고, 오체투지 순례에도 또 한번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이 여간 다행이 아니었다. 8일 금요일 저녁에는 용산미사에 참례하고, 9일 오후에는 수원 땅을 벗어날 즈음의 오체투지 순례에 참여하기로 단단히 계획을 세웠다.

 

<2>

 

오후 1시쯤 서울 합정동 목적지에 도착한 우리 부부는 집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들녀석에게 점심부터 해 먹이고(아이는 할머니가 챙겨 보내주신 갈치조림과 꽃게무침, 엄마가 끓여준 육개장 국을 먹으며 맛이 '환상'이라고 했다), 3시쯤 동대문 용두동으로 갔다. 내가 신장 치료를 의탁하고 있는, 신장 치료 전문 한의원이 있는 동네였다.

 

그리고 4시쯤 용산으로 향했다. 용산미사에 거의 매일 참례하며 전례봉사를 하는 신자 자매가 알려준 대로 동대문 역에서 지하철 4호선으로 갈아타고 신용산 역에서 내려 2번 출구로 나가니 '용산참사' 현장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길가에 도열해 있는 여러 대의 경찰 버스들이 길 안내를 해준 셈이기도 했다.

 

나는 분향소 안으로 들어가서 문상부터 했다. 용산참사 희생자 다섯 분의 영정 앞에 꿇어 엎드려 큰절을 올리며 숨이 막히고 몸이 떨리는 현상을 경험했다. 이제야 찾아뵙는 소치를 부끄러워하며 용서를 빌었다. 2000년대 초반의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이 슬프고도 난해한 상황이 언제까지 현재진행형 상태를 유지하며 나아갈지, 절로 막막해지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암담함과 막막함 때문에 오늘도 용산참사 현장에서 미사가 거행되는 것이었다. 암담함과 막막함 속에서 하느님의 메시지를 접할 수 있고, 하느님께 더욱 절절히 기도할 수 있고, 거기에서 희망을 끈을 얻어내고 부여잡을 수 있기에 미사가 올려지는 것이었다.

 

암담함과 막막함이란 막힘과 그릇됨의 유형이다. 정의로움이 차단되었기에 생겨나는 현상이다. 그렇기에 암담함과 막막함 속에서는 오히려 그릇됨이 더 잘 인식된다. 무릇 정의로움의 가치들이 내면에서 더욱 힘차게 생동한다. 그런 역설은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도 줄기차게 약동한다. 그러므로 암담함과 막막함을 더욱 확실히 인식하는 일은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과제이고, 그 과제는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도 용산참사 현장에서 미사가 거행되고, 그것에 이끌려 나 또한 미사에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미사가 시작되기 두 시간 전인 5시경부터 용산참사 현장에는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여러 반가운 얼굴들을 뵐 수 있었다. 태안반도 '기름과의 전쟁'이 한창이던 때 해변에서 뵌 적이 있는 이강서 신부님(서울대교구 빈민사목 담당 사제)도 나를 기억해 주셨고, 지난해 10월 25일 논산시 상월면 오체투지 순례 현장에서 뵌 적이 있는 문정현 신부님도 나를 기억해 주셨다.

 

 

전에 태안성당에서 생활하셨던 한 분 수녀님도 뵙게 되어 더없이 반가웠고, 가톨릭 굿뉴스 게시판이 인연이 되어 친숙하게 알고 지내는 자매들도 뵐 수 있었다. 초면인 형제들 가운데는 내 이름을 익히 알고 있는 이들도 있어서 고마운 마음이 컸다.

 

미사가 시작되기 10분 전쯤에 아들녀석도 와 주었다. 음악동아리 합주 연습 때문에 학교에 갔던 아들녀석은 연습이 끝나자마자 달려와 주었다. 아빠와의 약속을 지킨 아들녀석이 고맙고 대견하면서도 친구들을 한 명도 데려오지 않고 혼자 온 것은 좀 섭섭한 일이었다.

 

이날의 미사는 다섯 분의 사제가 공동 집전을 하게 되었는데, 사제들은 먼저 분향실 안으로 들어가서 연도를 바쳤다. 어버이날이기에 자녀들의 아버지였던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해 연도의 일부를 바친 다음 제대 앞으로 이동해서 미사를 거행했다. 가운데 서서 미사를 주례하시는 예수고난회 이계호 신부님과 네 분의 신부님들 모습이 너무도 거룩하게 보이고 고맙게 느껴져서, 나는 처음 뵙는 세 분 신부님의 얼굴도 잘 기억해두고자 미사 시간 내내 거의 제대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다.

 

 

이 날의 미사에서 나는 영광스럽게도 '독서'를 봉독했다. 사도행전 13장 26절에서 33절까지의 말씀이었다. 용산참사가 상징하고 있는 이 시대의 질곡, 용산참사 현장을 가로막듯 길가에 도열해 있는 여러 대의 경찰 버스들에서 발산하는 70년대와 80년대의 풍경, 그 틈바구니 안에도 미사의 자리를 베풀어주시고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현존, 이 뜻깊은 미사에 가족과 함께 참례하는 슬픔 속의 기쁨, 미사를 함께 거행하시는 사제님들과 빈한하면서도 풍족한 미사 자리에 함께 하고 있는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한 형제 자매들에 대한 고마움, 희생자들의 영혼과 유족들 모두에게 위안이 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기원…. 내가 느끼고 생각할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이 내게 큰 감격을 안겨주었고, 나는 마치 기도를 하듯 명확하고 절절한 음조로 독서를 봉독했다.

 

영성체 후 공지사항 발표 시간에는 연세대 음악동아리가 나와서 자신들이 만든 노래를 들려주었다. 네 명의 학생들 중에서 한 명은 내 아들녀석이 잘 아는 1년 선배라고 했다. 오늘의 대학생들이 겪는 현실문제를 풍자와 해학을 섞어 들려주는 노래는 웃음을 유발하면서도 예리하게 와 닿는 메시지가 있었다.

 

 

미사를 마치고, 신부님들과 또 여러 형제 자매들과 인사를 나누고 헤어져 합정동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내내 묵주기도를 했다.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에도 내내 제대 뒤에 도열해 서 있던 어린 전경들의 모습이 눈앞에서 계속 어른거렸다. 내 아들녀석에게도 나와 있는 군 입대를 위한 신검통지서도 자꾸 떠올랐다.

 

유족들과 시비가 붙어 말싸움을 벌이던 젊은 경찰 간부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더욱 곤혹스러운 마음이 되곤 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참 불쌍하다는 생각도 절로 들곤 했다. 수많은 국민들을 적으로 만들고, 공권력을 사병처럼 부리면서, 정치를 꼭 그렇게 전투처럼 해야 하는지, 시야와 사고 능력이 그 정도밖에 안 되는지 정말 딱하고도 한심한 일이었다.

 

그렇게 덮어 누르고 밀어붙인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끝날 것으로 생각하는가? 저 70년대와 80년대 풍경을 재현시키며 오늘의 촛불집회를 원천봉쇄하고 진압한다고 해서 촛불이 영영 꺼질 줄로 생각하는가? 저 70년대와 80년대의 엄혹한 탄압에도 그 질긴 사슬을 끊고 민주주의를 진척시켜온 민중의 힘을 옛날의 방식으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남아 있는 3년여의 집권기간을 30년 정도로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의 경찰은 과연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경찰대학 출신 젊은 엘리트들도 다수 포진해 있는 오늘의 경찰이 왜 그처럼 쉽게 민주경찰을 포기하고 70년대와 80년대의 독재경찰로 되돌아가는가?

 

갖가지 수많은 의문들이 가슴을 아프게 짓누르지만, 사실은 그런 의문들 때문에 값진 삶의 지표도 명료해질 터였다. 무릇 발전과 진행에는 요철이 있게 마련이었다. 일시적인 반동이 있어야 확실한 발전도 있을 터였다. 이런저런 역사 경험이 축적되어야 우리는 더욱 슬기로운 국민이 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의 현상에서 희망을 보아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의 무지와 아집, 이상한 독선과 '토건파시즘'에 대한 집착, 그 모든 기현상과 역주행들 속에서 더욱 명료해지기 마련인 정방향의 길은 우리에게 점점 확실한 희망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서, 내일의 오체투지 순례 참여와 또 다음의 용산미사 참례를 스스로 다짐하면서, 나는 지하철 안 수많은 승객들 가운데서 묵주기도를 계속했다. 용산미사 참례에서 얻은 주님 은총의 여운으로….

 


태그:#용산참사, #용산미사, #토건파시즘, #독재경찰, #촛불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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