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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도대체 누가 어버이날을 만들었어?

"어이? 큰 딸, 어버이날이네."
"으악!!! 도대체 누가 어버이날을 만들었어?"

"그러게. 너무 감사하네. 그 어버이날을 만들어 준 사람 누군지 몰라도 상주고 잡네~"
"엄마, 꼭 선물을 해야 어버이에게 감사하는 건 아니잖아. 나 엄마한테 마음으로 무지 감사하고 있어."

"감사는 당연한 거고, 선물은 선물인 거고. 니 어머니라는 사람은 꼭 선물을 받고 싶네."
"엄마, 엄마가 그렇게 세속적인 사람은 아니잖아. "

"아냐. 니 엄마, 세속적이야. 선물 꼭 줘. 너 매년 기냥 입 닦더라. 나이도 어린 것이  인생을 그렇게 살지 마라." 

 작년 어버이날, 큰딸이 선물로 준 <수제작 편지북>
 작년 어버이날, 큰딸이 선물로 준 <수제작 편지북>
ⓒ 권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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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저는 어버이날마다 입닦는 큰 딸에게 이번에야 말로 기필코 선물을 받으리라 각오를 하고, 기숙사로 몇 번의 전화를 넣었습니다. 또 평상시 친정부모님께 용돈을 드릴 때도 꼭 딸들을 불러서 "잘 봐라. 부모님 용돈을 이렇게 꼭 따로따로 봉투를 마련해서 줘야 하는거야. 봉투 하나에 주면 니 아빠가 삥땅치고 엄마는 안줘"라고 구체적으로 용돈주는 요령까지 알려줬습니다.

이렇게 매년 기숙사에 전화를 걸어 큰 딸에게 어버이 날에 밑줄을 긋고, 강조에 강조를 하지만 돌아오는 것이 별로 없어 작년에도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큰 딸은 해주와 달리 무척 알뜰을 넘어선 짠순이여서 어버이 날이라고 돈을 쓸 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기대를 한다면 돈 안드는 편지 한 통 정도는 보내 오지 않을까, 했습니다. 

딸이 준 어버이날 선물, <수제작 편지북>

"엄마, 어버이날 선물."
"어머? 진짜 선물주는거야? 근데 선물이 공책이야?"

"그래!!! 그렇게 딸한테 받고 싶어서 난리를 치시는데 줘야지, 그거 그냥 공책 아니거든. 내가 그거 쓰면서 팔 부러지는 줄 알았어"
"이게 뭔데?"

"내가 한달 동안 엄마한테 쓴 [수제작 편지북]이라고 할 수 있지. 아빠 따로, 엄마 따로 매일 쓰는데 죽는 줄 알았어. 그렇다고 아빠한테 쓴 내용을 그대로 엄마한테 베낄 수도 없고. 또 내 일기는 일기대로 써야 하고, 샘하고 교환일기도 써야 하고. 대박으로 힘들었어."
"너 설마 수업시간에 공부는 안하고 죽어라 이것만 쓴 거 아냐?"

"아니거든. 묵학시간에 썼거든. 에이, 도로 내놔."

 딸의 일기식 편지.
 딸의 일기식 편지.
ⓒ 권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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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제작 편지북
 수제작 편지북
ⓒ 권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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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연애, 독후감, 진로문제까지 '어버이날 선물'에 다 들어있다.

큰딸은 5월 5일부터 한달간 저와 남편에게 따로 따로 매일 편지를 썼습니다. 어떤 날은 짜증이 묻어나는 대로, 어떤 날은 흥분돼서, 또 어떤 날은 읽은 책에 대해 느낀 점을, 딸이 준 편지는 매우 다양한 내용이었습니다.

딸에게 사귀자고 고백한 아이의 이야기도 있고,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딸의 답답함도 있습니다. 편지를 다 읽은 저는 진지하게 고백한 그 아이와 사귀라고 조언을 했습니다. 사귀라는 이유가 뭐냐고 묻는 딸에게 "니 나이에 연애를 안하면 언제 할래?"라고 했습니다. 딸은 자기가 남자를 사귀기에 너무 이르답니다. 중3 이면 하나도 이르지 않다고 입에 거품을 무는 제게 "그런데 엄마가 연애를 알긴 알아?"하면서 저를 무시합니다. 아니, 아무려면 마흔을 넘긴 엄마가 십대인 딸보다 연애를 모르겠습니까, 열 명의 남자를 사귀고 니 아빠랑 결혼했다고 아무리 강조해도 딸은 귓등으로 듣습니다. 엄마의 연애실력이 검증되지 않는 것은 다 남편 탓입니다^^ 

어쨌든 딸의 편지 북을 읽으면서 제가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어도 아이는 빛을 향해 나무가 뻗듯 잘 자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한길아, 너무 고맙다. 이런 선물 처음이야."
"그럼 고마워야지. 그리고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응, 그래 다음엔 팔도 아플 텐데 기냥 니 용돈으로 비싼 지갑 같은 거 사줘."
"헐? 엄마!!!!! 진짜 엄마 맞아? 다른 집 엄마들은 그렇게 말 안해."

"나 실은 너희 엄마 아니야. 옆집 아줌마야~"

이렇게 해서 한바탕 딸들과 웃습니다.

난 가식적이지 않아서 고맙다는 편지는 안 쓴다는 해주

올해 어버이날은 어떨까요? 큰딸은 작년에 하도 디었는지 아직 전화도 없습니다. 둘째 해주는 아침에 편지를 주면서 말합니다. "엄마, **는 편지를 쓰면서 부모한테 고맙다는 말을 하는 자신이 너무 가식적이래. 근데 난 진심이야. 엄마, 아빠한테 정말 고마워. 딴 집은 한번 말해서 안 들으면 바로 아웃인데 그래도 엄마는 세 번까지는 봐주잖아"
                         
 어버이날, 해주 선물
 어버이날, 해주 선물
ⓒ 권영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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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말이 칭찬인지, 비난인지 분간이 가지 않습니다만 표정이 진지한 걸로 봐서 진심인 것 같습니다. 가식의 말을 안 쓴다는 해주 편지에는 진짜 고맙다는 말이 전혀 없습니다. 좀 가식적이어도 되는데^^

어버이날, 자식인 동시에 저도 어버이가 됐습니다. 이 다음에 내 아이가 커서 부모인 나를 어떻게 기억하면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부모 생각에 콧등이 시큰해 지는 것도, 가슴이 약간 에린 것도 좋겠지만 그보다는 킥킥거리고 웃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10년 전 돌아가신 시어머님을 그리며 빙긋이 웃듯이 제 딸들도 부모의 경쾌함을 기억해 웃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지금 행복합니다. 당신도 행복하십시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다음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어버이날#선물#편지북#대안학교#간디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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