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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4월에 경주에서는 특별한 일이 있었다.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신라의 사자(獅子)'를 주제로 특별전이 열린 것이다. 사자를 통해 신라문화의 일면을 엿보는 기획전을 열 정도로 사자는 우리 문화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사자는 백수의 왕이라 불리만큼 두려움이 없고 가장 뛰어나 위엄을 가진 존재로 받아들여진다. 몸과 마음을 고르게 하여 여러 가지 악행을 굴복시키는 부처님을 인사자(人獅子)라 칭하고, 부처의 위엄 있는 설법을, 사자의 울부짖음에 모든 짐승이 두려워하여 굴복하는 것에 비유하여 사자후(獅子吼)라 한다. 부처는 인간 세계에서 존귀한 자리에 있으므로 모든 짐승의 왕인 사자에 비유하여 부처가 앉는 자리를 사자좌(獅子座)라 하여 부처가 사자와 같은 위세와 위엄을 가진 존재로 보았다.

우리가 관심을 갖지 않았을 뿐, 기억을 더듬어 보면 석탑, 부도, 석등 그리고 능에서 쉽게 사자를 볼 수 있었을 것이다. 불국사 다보탑에도 앉아 있고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에도 서 있다. 좀 자세히 봐야 알겠지만 송광사 관음전과 일주문 소맷돌에도 사자가 꼿꼿하게 서있다.

속리산 법주사 석등은 사자 두 마리가 일어서서 상대석을 받들고 있고 충주시 쌍룡사터에 있는 보각국사 사자석등은 엎드려 있는 사자가 하대석을 대신하고 있다. 화순 쌍봉사 칠감선사부도 하대석에는 엎드리거나 뒤를 돌아보거나 웅크리고 있는 여러 모습의 사자상을 조각해 놓았다.  

일주문의 돌사자는 꼿꼿이 서서 오는 이를 반기는 듯하고, 관음전 돌사자는 입을 벌리고 눈을 부릅뜬 채 앞으로 돌진하려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어 경계를 하는 모습이다
▲ 송광사 관음전 소맷돌 돌사자 일주문의 돌사자는 꼿꼿이 서서 오는 이를 반기는 듯하고, 관음전 돌사자는 입을 벌리고 눈을 부릅뜬 채 앞으로 돌진하려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어 경계를 하는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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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불교문화에서 사자의 상징성이 잘 드러난 조형물은 석탑이고 기단부에 사사자를 배치한 이형석탑이 그 중심에 있다 하겠다. 사자를 배치한 이형석탑은 한 시대에 나타난 유행은 아니었고 통일신라시대에 처음 등장한 후 고려시대에 많이 만들어졌으며 그 맥이 근대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역도 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고, 멀리 강원도 금강군과 홍천에서 충북 제천, 전남구례와 순천에까지 거의 전국에서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으로 뽑을  수 있는 이형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불국사 다보탑,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그리고 고려시대의 홍천 괘릉리 사사자석탑, 제천 사자빈신사터 사사자석탑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강원도 금강군 내장리에 고려시대의 금장암사자탑이 북한 국보급문화재로 남아 있다. 이 중 다보탑은 사자를 기단 위에 배치해 사자의 상징성을 강조하였고 나머지는 사사자가 기단의 역할을 하고 있다.

한국 제일의 이형석탑, 다보탑

다보탑은 사사자 이형석탑은 아니고 석탑 중에 일반형을 따르지 않은 이형석탑으로 분류된다. 기단 위에 4구(軀)의 석사자를 배치한 점이 특이하다. 보통 석탑을 보면 몇 층 탑인가 눈으로 보면 쉽게 알 수 있으나 다보탑은 그 층수를 알기 어렵다. 십(十)자 모양의 평면 기단에는 사방에 돌계단을 마련하고 8각형의 탑신과 그 주위에 네모난 난간을 돌렸다. 그리고 기단 위에는 4구의 석사자를 조형물로 배치하여 사자의 상징성을 나타냈다. 일제강점기에 3구는 도난당했고 외로이 1구의 사자만 남아 있다.

다보탑에는 왜 네 마리의 돌사자를 배치하였을까? 다보여래의 사자좌와 관련있는 듯  하다
▲ 다보탑 돌사자 다보탑에는 왜 네 마리의 돌사자를 배치하였을까? 다보여래의 사자좌와 관련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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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다보탑에는 왜 돌사자를 배치하였을까? 다보탑의 정식 명칭은 다보여래상주증명탑으로 법화경에 석가여래의 진리를 다보여래가 늘 증명한다고 하는 데서 유래한다. 법화경 견보탑품에 따르면 '석가여래가 법화경의 진리를 말하자 칠보로 장식한 탑이 우뚝 솟아올라 허공에 머물렀는데 석가여래가 탑문을 여니 탑안에 다보여래가 사자좌에 앉아 있었다.'라고 하고 있다. 다보탑이 화려한 것은 이와 관련이 깊고 기단 위에 돌사자를 배치한 것은 다보여래의 사자좌와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다.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사자의 위치가 궁금하다

지리산 화엄사는 절의 규모가 너무 커서 접근하기가 어렵다. 한 번 들러서는 그 속을 들여다보기 어렵고 두서너 번 와야 웬만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두 번 정도 가야 보제루의 기둥이, 세 번 정도 가야 원통전 앞에 있는 사자탑이 눈에 들어온다. 게다가 사전 지식을 갖고 가지 않으면 좀처럼 각황전 뒤편 언덕, 효대(孝臺)에 있는 사사자삼층석탑을 놓치기 쉽다.

효대(孝臺)에는 스님상과 인물상을 세운 석탑과 석등이 배치되어 있어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하다
▲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과 석등 효대(孝臺)에는 스님상과 인물상을 세운 석탑과 석등이 배치되어 있어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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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자석탑은 탑신을 떠받치고 있는 네 마리의 사자상이 있고 탑 중앙에 합장한 스님상이 배치되어 있다. 탑 앞에는 세 개의 기둥 안에 한쪽 무릎을 꿇고 공양하는 모습의 인물상을 배치한 석등이 놓여 있어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 공간임을 암시하고 있다.

전하는 말로는 이 인물상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라 하고 탑안의 스님은 연기조사 어머니라 전한다. 효심이 깊었던 연기조사는 자신의 모습을 석등의 형태로 조각하였다는 것이다. 기록으로는 화엄사가 창건된 지 100년 뒤, 신라 선덕여왕 11년(642년)에 신라의 자장율사가 화엄사를 크게 중창할 때 연기조사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사사자석탑과 석등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연기조사가 세웠다는 말은 전혀 터무니없는 것으로 보이며 탑의 양식으로 볼 때 8세기 중엽 통일신라전성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화엄사가 그 당시 백제 땅이었는데 신라 고승인 자장율사가 백제에 들어가 탑을 세웠다는 사실은 이치에 맞지 않아 자장율사가 세웠다는 기록도 믿기 어렵다. 흔히 저지른 승자(勝者)의 역사기록으로 봐야할 것이다. 후대(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 중엽)에 연기조사의 효심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네 마리의 사자는 입을 벌린 정도가 각각 다르다. 왼쪽 사자가 입을 가장 크게 벌리고 있다. 가운데 있는 스님상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 어머니라 전한다
▲ 사사자석탑의 돌사자와 스님상(탑 앞) 네 마리의 사자는 입을 벌린 정도가 각각 다르다. 왼쪽 사자가 입을 가장 크게 벌리고 있다. 가운데 있는 스님상은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 어머니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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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탑은 기본적으로 이중기단을 갖춘 삼층석탑의 기본형을 따르고 있으나 상층기단에 해당하는 부분에 네 마리의 사자를 앉히고 중앙에 스님상을 배치하여 불국사 다보탑과 함께 최고의 이형탑으로 간주된다.

시선은 아무래도 네 마리의 사자에 집중된다. 네 마리의 사자는 표정과 자세가 각기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이는 인간사 희로애락을 나타낸 것이라 하기도 하나 허균 한국민예미술연구소장은 입을 크게 벌린 사자, 보통 벌린 사자 그리고 작게 벌린 것, 아주 침묵한 놈이 있는데 입모양의 미세한 변화 속에 불법의 깊고 오묘한 진리가 숨어 있다 하고 있다. 이런 입모양은 사자빈신사터 사사자석탑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사자가 입을 벌린 정도가 탑을 보고 왼쪽에서 시계 방향으로 대-중-소-침묵으로 가야될 것으로 보이나 탑 뒤편 두 사자의 위치가 뒤바뀐 건 아닌지 미심쩍다.
▲ 사사자석탑의 돌사자(탑 뒤) 사자가 입을 벌린 정도가 탑을 보고 왼쪽에서 시계 방향으로 대-중-소-침묵으로 가야될 것으로 보이나 탑 뒤편 두 사자의 위치가 뒤바뀐 건 아닌지 미심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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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사자의 배치가 궁금하다. 사자의 위치가 입을 벌린 정도에 따라 탑 정면을 보았을 때 왼쪽부터 시계반대 방향으로 작아져야 할 것으로 보이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사자들은 모두 시계반대방향으로 왼쪽이 가장 크게 오른쪽이 그 다음, 그 다음이 침묵, 그 다음이 세 번째로 벌린 사자가 배치되어 입을 가장 크게 벌린 것과 침묵, 중간 정도 벌린 것과 약간 벌린 것이 대각선으로 균형을 이루고 있다. 사자빈신사터 사사자석탑과 위치가 서로 달라 화엄사 사사자탑과 사자빈신사터 사사자탑 둘 중 하나는 위치가 어긋나 있다.

월악산을 향해 포효하는 사자빈신사터 사사자석탑

월악산 송계계곡에도 사사자석탑이 남아 있다. 미륵리 절터에서 송계계곡을 따라 북쪽으로 10여리 내려와 골미마을로 접어들면 계곡 언덕 위에 사자빈신사터 사사자석탑이 있다. 송계계곡이야 말로 한여름이 최고라 하지만 계곡을 비집고 심어져 있는 복숭아꽃이 한창인 봄도 색다르다. 연분홍의 복사꽃과 이제 막 순이 돋아 연초록으로 변해가는 월악산이 참 잘 어울린다.

연분홍의 복숭아꽃과 이제 막 순이 터서 연초록으로 변해가는 월악산이 참 잘 어울린다.
▲ 복숭아꽃과 월악산 연분홍의 복숭아꽃과 이제 막 순이 터서 연초록으로 변해가는 월악산이 참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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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이 세워졌을 당시에는 외졌을 것이라 생각되던 이 곳에 이런 이형석탑이 어떻게 서있게 되었을까 의문시되지만 문경새재 길이 나기 전에 삼국시대부터 고려 말까지 남북을 이어 주던 주요교통로인 지릅재와 하늘재길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있다는 사실을 알면 그리 이상할 일도 아니다.

화엄사 사사자탑을 모방한 이형석탑이다. 이름만큼이나 독특하게 생겼다
▲ 사자빈신사터 사사자석탑 화엄사 사사자탑을 모방한 이형석탑이다. 이름만큼이나 독특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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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사자빈신사터란 이름은 어디서 유래했나? 사자는 사자이고 빈신은 무엇인가? 사자빈신은 사자빈신삼매에서 온 것으로 사자빈신은 '사자가 포효하면서 기운을 뻗는 상태'를 말한다. 사자빈신사터 탑은 두려움이 없는 존재인 사자와 같이 용맹스럽게 중생을 구제하려는 의지가 묻어 있는 탑으로 보면 된다.

이와 관련하여 기록으로 남아있다. 하층기단 정면에 고려 현종 13년(1022년)이라고 연대를 분명히 밝히면서 '몹쓸 적들이 영원히 물러갈 것을 기원하며 월악산 사자빈신사에 구층석탑을 세운다'고 탑의 내력을 남겨 놓았다. 이 때는 거란족의 잦은 침입이 있을 때였음으로 불력으로 침입을 막아 백성이 안심하고 편히 살도록 기원하고자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불상과 두 사자 모두 뚱뚱해 보인다. 두 사자는 경계를 하듯 좌우를 살피고 있다
▲ 사사자석탑의 돌사자와 비로자나불상 불상과 두 사자 모두 뚱뚱해 보인다. 두 사자는 경계를 하듯 좌우를 살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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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처럼 상층 기단부에 네 마리의 사자상과 가운데에 비로자나불을 배치한 이형사사자석탑이다. 입을 크게 벌린 사자, 덜 벌린 사자, 거의 벌리지 않은 사자, 입을 굳게 다문 사자로 다양하여 화엄사의 사자들처럼 각자 다른 입모양을 하고 있다. 뒤편의 두 사자는 다소곳하게 북쪽을 향하여 똑바로 서 있는 반면 앞에 두 사자는 경계근무를 서듯 각각 좌우를 주시하며 입을 크게 벌리고 서있다. 사자와 비로나자불 모두 아담하며 몸집이 좀 뚱뚱하게 보인다.

친근한 홍천 괘석리 사사자석탑

홍천 괘석리 사사자석탑도 우리 나라에서 흔히 볼 수없는 이형석탑으로 화엄사 사사자석탑의 맥을 잇고 있다. 원래 두촌면 괘석리 절터에 있던 것을 69년에 읍사무소안에 옮겨 온 것이다. 괘석리에는 절터와 탑거리(탑동)라 불리는 마을이 있고 근방에 쌍계사터가 있으며 좀 떨어진 곳에 물걸리 절터가 있어 괘석리가 문화적으로 예사 마을이 아니었음을 짐작케한다.

사자의 모양이 익살스럽고 앞에 달고 있는 방울이 두드러져 사자라기보다는 개처럼 보여 친숙한 느낌이 든다
▲ 괘석리 사사자석탑 사자의 모양이 익살스럽고 앞에 달고 있는 방울이 두드러져 사자라기보다는 개처럼 보여 친숙한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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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사자석탑은 희망리 삼층석탑과 함께 읍사무소 정원의 장식 역할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네 마리 사자도 힘이 없어 보이고 집안에서 기르는 가축을 보는 느낌이 든다. 문화재는 가급적 원래 있던 곳에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사사자 석탑도 괘석리에 옮겨다 놓는 것이 좋겠다.

이 탑은 조각이 다른 사사자탑과 비교해 세련되지 않고 사자의 기운도 많이 빠져 있다. 표정은 사자의 기개가 나타나기보다는 익살스러워 보인다. 앞가슴에 방울을 달고 있어 무섭거나 위엄이 있어 보이기보다는 사람과 친숙한 가축과 같아 친근한 기분이 든다. 사실 방울은 불전 수호를 목적으로 달아놓은 것인데 무당이 굿할 때 방울을 흔드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사자도 방울을 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도 온갖 흉내는 다 내어 정성을 다한 탑이다.

1928년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어 화엄사 사사자탑의 맥이 이어진다고 생각하니 즐겁고 기쁘다
▲ 선암사 화산대사 부도 1928년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어 화엄사 사사자탑의 맥이 이어진다고 생각하니 즐겁고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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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형석탑은 석탑에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선암사 입구에는 이형부도가 있다. 1928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사자 네 마리가 비석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 앞서 살펴본 이형 사사자석탑과 닮았다. 화엄사의 사사자삼층석탑이 부도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이런 이형 석탑은 석탑에 그치지 않고 부도탑에도 나타나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사사자형 석탑을 중심으로 하는 이형석탑은 나름의 이야기가 있고 공력(功力)을 과시하여 공덕(功德)을 쌓으려 한건 아닐는지 모르겠다. 


태그:#사사자석탑, #이형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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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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