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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금은 개뿔,' '완주나 하면 다행이다'

어젯밤 늦은 시간 꼴찌로 들어와 운영 요원 텐트에서 잠을 잤다. 그런데 말이 텐트지 창고로 사용하는 곳이라 난로 상태가 안 좋았다. 역시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내가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모든 게 얼어 있는 얼음 창고였다. 유카꼬와 서로 살아 있음을 확인하고 안심이 됐다.

밖의 기온이 영하 30도인데 텐트 안은 아무리 따뜻해도 영하 10도 이하 같다. 잠자기 전 땀에 젖은 옷을 말리기 위해 텐트 여기저기에 널어 놨지만 아침에 보니 동태 같이 얼어 있었다. 그나마 영하 30도까지 견디는 침낭과 거위 털 자켓, 바지를 입고 잤으니 다행이었지 잘못했으면 동사할 뻔했다.

햇살이 눈부시도록 밝은 아침, 미호가 있는 텐트를 찾아 갔다. '어머나!' 그런데 여기는 완전 온실이다. 어두컴컴한 창고 텐트가 아닌 환한 돔 스타일의 따뜻한 텐트, 지상 낙원이 따로 없었다. 재빨리 동태로 변해버린 옷과 장비들을 가져와 말리기 시작했다.

여유를 찾은 우리는 서로 어제의 상황을 이야기하면서 놀라고 말았다. 미호의 도착 시간이 겨우 우리보다 1시간 빠른 것이다. 갑자기 편두통이 몰려온다. 사실 미호에게 내심 여자부 우승을 기대하고 있었다. 마라톤 기록도 좋고 장거리 산악 레이스 전문이라 치열한 선두경쟁을 펼칠 줄 알았는데 모든 기대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이번 대회 우승자에게는 약 700만 원 상당의 다이아몬드가 주어진다. 우리의 계획은 누군가 1등을 하면 그 상금으로 대회 후 거창한 여행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상금은 개뿔,' '완주나 하면 다행이다'라는 걱정만 쌓이고 있었다.

대회 2일재 아침 캠프 모습
 대회 2일재 아침 캠프 모습
ⓒ 유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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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출발도 어제와 동일한 9시. 어제 늦게 도착한 만큼 준비도 출발도 함께 늦어진다. 남들 다 출발하고 난 후 약 30분 후에 우리는 간신히 출발할 수 있었다.

코스 지도를 보니 어제보다 트레일 구간이 많은 것 같다. 초반의 트레일 지역을 벗어나 넓게 뚫린 호수에서부터 점점 추워진다. 처음 출발부터 어제보다 춥다는 걸 알았지만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얼마 후 미호가 추위를 못 이겨 운영 요원의 스노우 모빌로 달려간다. 스노우 모빌의 엔진에 손을 얻고 추위를 녹인다. 뒤로 처진 미호를 남겨두고 나와 유카꼬는 계속해서 전진한다.

생각보다는 빨리 첫 번째 체크포인트에 도착했다. 체크포인트에 도착했을 때 여러 선수들이 있었기에 지금까지의 페이스는 크게 문제 되지는 않았다. 운영요원들이 컨디션 좋아 보인다며 오늘은 걱정 안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쩌나, 결국 나중에 걱정하게 만들었다.

출발, 하지만 우리는 짐 싸고 있었다.
 출발, 하지만 우리는 짐 싸고 있었다.
ⓒ 유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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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두권의 달리는 모습
 선두권의 달리는 모습
ⓒ 유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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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크포인트에는 작은 에스키모 텐트가 하나 있었지만 별 다른 난방 장치는 없었다. 그래도 밖에 있는 것보다 따뜻하기에 텐트에서 간식을 먹었다. 그런데 왠지 추운 게 소화가 잘 안 되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따뜻한 물도 많이 마시고 스트레칭도 하고 몸을 풀었지만 괜히 찜찜한 느낌이다.

이어지는 트레일 지역에서 스노우 슈즈가 약간씩 돌아간다. 도저히 속도를 못 내겠다. 임시로 고정시켰기에 정상적인 킥을 못하고 있는데 언덕에서 자꾸만 미끄러지는 상황이 반복된다. 그래도 트레일 코스는 내리막도 있고 무엇보다 바람이 없다 보니 춥지 않아서 너무 좋다.

상대적으로 편안한 트레일 코스
 상대적으로 편안한 트레일 코스
ⓒ 유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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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째 간이 체크포인트에 도착해서 대회 감독인 '스코트'를 만났다. 그런데 스코트가 심각한 이야기를 꺼낸다. 나와 유카꼬는 지금의 페이스를 봐서 골인까지 문제 없는데 뒤에 오는 미호가 너무 처져 있다는 것이다. 우리하고 거의 1시간 이상 차이가 나는데 아무래도 포기시켜야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보고 통역을 해달라고 한다.

"갑자기 뭐야! 우리도 포기하라고?"
"너 뭐니?" 유카꼬가 단칼에 거절한다.

미호는 절대로 그냥 포기할 사람이 아니니, 당신이 알아서 하라고 하며 우리는 계속 가던 길을 갔다. 그런데 얼마 안 가 호수지역에서 내 스노우 슈즈가 또 다시 두 동강이 났다. 사태는 어제보다 더 심각해 연결 부속조차 찾을 수 없는 상태다.

날씨는 더 더욱 추워져 나의 페이스에 맞춰서 유카꼬가 같이 간다면 둘 다 완주를 보장할 수 없다. 그리고 이미 나의 체력은 어제 바닥이 나서 정상이 아니다. 계속 가느냐 포기냐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설 수밖에 없었다. 이 추운데 생각이 너무 길어지면 안 된다. 현 시점에서 뒤에 오는 미호도 완주가 불투명한 상황이라 유카꼬만은 어떡하든 살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유카꼬 혼자 가!"
유카꼬는 놀라면서 안 된다고 날뛴다.

"난 어제 이후로 체력이 바닥났고 스노우 슈즈 고장으로 도저히 갈 수가 없다. 나와 미호는 오늘 완주가 불투명하니 너만이라도 완주를 해야 한다."

온갖 설득과 협박을 동원해 떠밀듯이 유카꼬를 보내 버렸다. 계속 뒤를 처다 보며 점점 멀어져 가는 유카꼬에게 손을 흔드는 여유를 보인다. 하지만 속은 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세상에 무슨 이런 대회가 다 있어?'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나?'
'하기야 나같이 운동신경 둔한 인간이 이 정도면 잘했지….'

마음 같아서야 당장이라도 뒤쫓아가고 싶지만 두 개로 나눠진 스노우 슈즈를 보고 있으면 어제의 악몽이 떠올라 도저히 엄두가 안 난다.

'아, 이렇게 13번째 오지 레이스가 날아가는구나….'

포기하기로 마음 먹고 운영 요원이 오면 바로 떠날 준비를 마쳤다. 그런데 30분이 지나도 아무도 안 오는 거다. 의욕을 상실한 상태라 날씨는 더욱 춥게 느껴지는데 아무도 안 오니 짜증을 넘어 괜한 오기가 생긴다. 갈까 말까 하며 혼자서 시체 놀이 하기 40분. 멀리서 스노우 모빌 두 대가 한꺼번에 나타난다.

망가진 스노우 슈즈을 보여주며 포기한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눈이 똥그래진 스코트가 뛰어오며 절대 안 된다고 난리다.

'이건 또 뭐야? 아까는 포기하라고 하더니….'

스코트는 나에게 포기해도 자기는 안 받아 준다고 한다. 그러면서 뒤에 미호가 오고 있다고 이야기를 해준다. 너희 3명은 절대로 포기하면 안 된다며 신신당부를 한다. 갑자기 머리가 복잡해진다.

스코트는 내 손에 있던 스노우 슈즈를 빼앗아 가더니 자기가 고쳐주겠다고 한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너 어떻게 이런 스노우 슈즈를 신고 여기까지 왔냐? 너희들 정말 독하다, 그래서 내가 감동 받았다.' '자식이 병 주고 약주고 있어… 어쨌든 고맙네….' 스코트 덕분에 하얀 눈 세상을 또 다시 질주할 수 있는 기회와 신발이 생겼다.

망가진 스노우슈즈
 망가진 스노우슈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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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코스를 멀리서 보면 건포도 가득한 순백의 백설기 떡이 생각난다. 지평선 끝이 어딘지 모르게 펼쳐진 새하얀 호수 지역은 하얀 떡, 가끔 나타나는 자작 나무 숲은 건포도. 그리고 그 위로 쏟아지는 눈부신 태양. 생각만하면 낭만적이고 달콤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하지만 현실은 반대로 춥고 배고프기만 하다.

추운 곳에서 음식을 먹고 떨었더니 아무래도 체한 것 같다. 속이 계속 거북하고 답답하다. 나의 경우, 레이스 중에 컨디션이 안 좋아지면 체하고 구토를 한다. 어느 순간부터 구토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노우 슈즈 또한 계속해서 문제가 발생했다. 트레일 코스는 오르막, 내리막이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보니 수시로 변하는 무게 중심을 견디지 못하고 수리한 부위가 계속 끊어지기를 반복한다.

할 수 없이 코스 안내용 핑크색 깃발의 철사로 '칭칭' 감아 고정 시키지만 역부족이다. 아무도 없는 캄캄하고 추운 오지에서 속 뒤집어지고 장비 불량인 상태로 힘들게 혼자 가려니 벌 생각이 다 들며 눈물샘이 터진다. 첫 번째 사막 대회에 혼자 갔을 때 초보자다 보니 무척이나 힘들었다. 지금은 그 이상이다. 개인적으로 그 동안 참가한 대회 중 가장 힘들다는 느낌이다

운영요원들이 철수해 흔적만 남아 있는 3번째 체크 포인트를 지나서 밤을 맞이했다. 어쩌다 만나는 운영요원들 이외에 생물의 존재를 알 수 없는 자연 속이다. 바람은 심하게 불지만 다행히 눈은 안 내렸다. 날씨는 더욱 추워져서 손과 발의 감각을 못 느끼겠다. 특히 손가락은 스틱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얼어 버렸다.

혼자 남겨진 서글픔
 혼자 남겨진 서글픔
ⓒ 유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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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를 5km 남기고 한 명의 운영요원이 나를 전담하며 코스를 인도한다. 그 친구 말로는 현재 기온이 영하 36도라고 한다. 그리고 나의 모습은 온통 얼음을 뒤집어 쓴 모양 같다고 했다. 자세히 보니 머리부터 발끝까지 엷은 얼음이 나를 뒤덮고 있었다.

오늘도 하늘의 오로라는 환상적인 자태를 뽐내고 있다. 색깔은 어제와 다르게 보라색이다. 그리고 보다 넓게 퍼져서 하늘에 커튼을 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세계 여기저기의 오지를 다니다 보면 조물주가 만든 대자연이 얼마나 신비롭고 위대한지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인간들의 욕심이 위대한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두면 안되겠니?

43km를 14시간 44분만에 골인하여 텐트로 갔더니, 동공이 풀려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의 유카꼬가 멍하게 앉아 있다. 나의 얼굴을 한참 쳐다 보더니 정신이 돌아 왔는지 놀라면서 울려고 한다. 당연히 포기한 줄 알고 있었는데 지금 살아서 돌아오니 반가움에 어찌할 줄 모른다. 이런 오지에서 함께 걱정하고 함께 즐거워해줄 수 있는 사람이 있어 너무나 행복하다. 그나저나 미호는 언제 도착할지 걱정이 된다.

매일 오로라를 볼수 있다.
 매일 오로라를 볼수 있다.
ⓒ 유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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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덧붙이는 글 | 사막의 아들 유지성 / www.runxrun.com
사막, 트레일 레이스 및 오지 레이스 전문가. 칼럼니스트, 사하라, 고비, 아타카마 사막, 남극 레이스, 히말라야, 아마존 정글 마라톤, Rock and Ice 울트라 등의 한국 에이전트이며, 국내 유일의 어드벤처 레이스 기획자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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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사는 월간 마운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옐로우나이프, #캐나다, #유지성, #다이아몬드 울트라, #마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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