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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남 가는 길>
<해남 가는 길> ⓒ 우리교육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 도보순례를 하겠다는 아들 앞에서 흔쾌히 "그래 한 번 해봐!"라며 격려해줄 아버지가 몇이나 될까. 나 역시 그런 상황을 맞게 된다면 동의가 어렵겠다는 생각이 든다.

 

초등학교 시절 "이 다음 네가 자란 후 할아버지 댁까지 함께 걸어보자"고 약속까지 했던 과거 들추어 녀석이 고집을 피운다면 어쩔까? 그래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을 거 같다. 고3이 코앞인데 공부가 먼저지 도보순례가 먼저냐며 설득하고, 설득하다 안 되면 강요하고, 강요하다 안 되면 얼굴 붉히며 화를 내지 않을까.

 

"부모가 이렇게 말리는데도 꼭 가야 하겠니!" 이 말이 아들 녀석의 결심에 더 불을 지폈다. "난 간다니까!"(책 속에서)

 

도보여행을 떠나기 전 저자와 아들이 주고받은 말이다. 같은 상황이 전개된다면 대부분의 가정에서 나타날 수 있는 대화. 고3이 주는 중압감에 주눅 들어 살기는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아이보다 먼저 고민하고 걱정하다 아이보다 먼저 흔들리는 부모들도 많다.

 

아들의 고집을 꺾지 못한 채 저자는 아들과 도보 여행을 떠난다. <해남 가는 길>은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책이다. 쉰 살 아버지와 고3을 눈앞에 둔 아들이 함께하는 서울에서 해남까지의 9일간의 여행. 옷깃을 파고드는 찬바람을 이겨내면서 걸어간 길이지만 그 어느 여행보다도 포근함이 물씬 느껴진다.

 

후일 이 여행을 아버지와 아들은 어떤 느낌으로 회상하고 있을까? 잠시 책 속의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

 

"이따금 나는 생각한다. 아들과 함께한 도보순례가 얼마나 소중한 추억이었던가를. 늙어 가는 아버지를 위해 아들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효도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아들과 함께한 도보순례는 세월이 갈수록 값지고 소중한 의미로 다가온다. 배낭을 짊어지고 아들과 함께 다시 한 번 훌훌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함께 떠나보면 알게 된다.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이 땅의 아버지와 아들에게 도보순례보다 더 행복한 여행은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아버지의 글, 책 속에서)

 

"언제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무 때도 할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처럼 고등학생 때여도 좋고, 더 일찍 중학생 때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이 땅의 많은 학생들에게 부모님이 건강하실 때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번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이자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아버지를 이해하는 일은 세상을 이해하는 지름길인지도 모른다."(아들의 글, 책 속에서)

 

늙어가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받은 최대한의 효도가 되었던 여행,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첫 걸음으로 아버지를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해준 여행.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아들이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갈수록, 중학교로 고등학교로 학력이 높아질수록 대화가 단절되고 벽이 쌓이는 요즘 세태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아들은 책 읽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고등학교 2학년 다니는 아들 녀석이 중간고사 끝나고 모처럼 여유가 있어 보인다. 늦은 아침 먹은 뒤 제 방 정리도 하고, 컴퓨터 게임도 하더니 친구들과 농구하기로 했다며 집을 나선다.

 

녀석이 내 앞을 지날 때마다 <해남 가는 길> 책 이야기 해주고 싶어 입이 근질댔다. 하지만 결국 얘기는 꺼내지도 못했다. 되돌아 생각해보면 이런 적이 꽤 있었다. 함께 마주앉아 도란도란 얘기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보니 하고 싶은 말도 꺼내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도 많았다. 아들 녀석도 비슷하게 지내오지 않았나 싶다. 어릴 때부터 아들의 행동을 통해 판박이처럼 되살아나는 내 모습을 많이 보아 왔으니까.

 

아들이 집을 나선 뒤 아들 책상 위에 <해남 가는 길>을 올려놓았다. 시험도 끝났으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읽어보라는 마음을 담아서.

 

책을 읽고 아들은 어떤 생각을 할까. 책 속의 아들처럼 아버지와 함께 도보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얘기를 하지는 않을까. 아니면 책 덮어 책꽂이에 꽂아두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학교와 독서실을 들락거리면서 살아갈까.

 

정말 궁금해진다. 궁금하지만 기다리기로 했다. 아들이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덧붙이는 글 | 송언 지음 / 김의규 그림 / 우리교육 / 2009.4 / 9000원


해남 가는 길 - 고3 아들과 쉰 살 아버지가 함께한 9일간의 도보여행

송언 지음, 김의규 그림, 우리교육(2009)


#아들과 걷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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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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