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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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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번째 서평을 쓰기 위해 3년 전 재미있게 읽었던 여행기를 펼쳐들었다. 지난 3년간 여행기중독자는 많은 여행기들을 보았고, 몇 차례 여행을 다녀왔다. 나이도 3살이나 더 먹었다. 이런 이유로 이번에는 '예전에 느꼈던 감동을 다시 느낄 수만 있어도 다행'이라 생각하며 이 책을 들었다.

하지만 <가보기 전엔 죽지마라>를 다시 읽는 순간, 거침없이 밀려오는 감동에 또다시 휩싸였다. 감동은 3년 전보다 훨씬 강렬하면서 뜨거웠다. 그리고 나는 나를 여행기중독자로 만들어버린 책이 바로 이 책이었음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세계일주라는 로망의 시작

저자는 어릴 적 '쥘 베른'의 소설 <80일간의 세계일주>를 읽고는 "어쩐지 거대하게만 느껴지던 지구가 내 손아귀에 들어올 만큼 작고 가깝게 느껴졌다"고 회상한다. 재미있는 세계일주 여행기를 읽다 보면 가끔 이런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넓고 막막하게만 느껴지던 세계지도가 어느 순간 홍대 앞 맛집 지도보다 친숙하고 흥미진진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때부터 세계일주를 꿈꾸기 시작하는 것 같다. 지구가 만만하게 보이기 시작하는 그 순간부터. 잠자리에 누웠을 때 천장에 세계지도가 어른거리는 증상이야말로 '세계일주 로망'이라는 이름의 정신병을 임상적으로 진단할 수 있는 첫 번째 증상일 것이다. (나는 가끔 여행 중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피검사나 유전자 분석을 해보고 싶다. 아마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후천적 변이가 발견되지 않을까 하며)

여행은 목적은 단순한 것이 좋다

이제 세계일주라는 로망에 사로잡혀 여행을 떠난다고 생각해 보자. 세계일주는 전 세계 주요 대륙을 중간에 집으로 돌아오지 않고 한달음에 도는 것을 말한다. 복잡하게 생각하면 한도 끝도 없이 복잡한 여행이다. 힘들고 긴 여행일수록 목적은 단순한 것이 좋다. 단순한 생각은 다양한 체험과 만남을 위한 여백을 제공하고 여러 선택의 갈림길에서 재빨리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해준다.

잠시 한 가지 예를 들어 단순, 명확한 목적이 여행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해 보자. "만일 당신이 예정과 다르게 늦은 밤, 낮선 도시의 터미널에 던져졌다면?" 도착시간을 잘못 맞춘 스스로를 탓하거나, 혹은 제 시간에 도착하지 못한 버스 기사를 욕해봐야 이미 때는 늦었다. 이제 우리는 선택을 해야 한다.

가로등도 뜸한 어두컴컴한 도로 너머에는 어떤 일이, 어떤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른다. 스산하고 추운 터미널 대합실에서 동이 틀 때까지 첫 차를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비싼 돈을 주고 험상궂은 택시기사와 함께 시내로 향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택시를 타고 시내로 나간다고 하더라도 숙소를 찾아 으슥한 도시의 밤거리를 헤매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아니면 동승했던 승객 중에 아무나 잡고 따라가 보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뭘 믿고 당신을 데려갈 것이며, 또 당신은 그 사람을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여행을 하는 동안 가끔씩은 어느 쪽을 선택해도 곤란한 경우가 발생한다. 이 때 우리를 혼란으로부터 구출해주는 것은 다름 아닌 단순한 목적이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가야 할 곳, 우리가 그곳에 간 이유는 선택의 순간에 우왕좌왕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한 가지를 선택하게 만들어 준다.

위의 경우, 가난한 배낭 여행자라면 대합실에서 독하게 첫차를 기다리며 추억을 만들 것이고, 즐길 시간이 아쉬운 단기간의 여행자라면 비싼 택시를 타고서라도 누구나 아는 특급호텔로 달려갈 것이다. 단기여행에서의 대형 사고는 여행 전체를 회복불능의 상태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단순한 목적의 힘은 여행에서도, 인생에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이것을 보기 위해 내 두 발로 여기에 왔구나"

저자가 선택한 방법과 목표는 자전거로 세계일주를 하며 자신만의 세계 최고를 찾는 것이다. 저자는 '자전거'와 '세계 최고'를 목표로 삼은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오늘날 세계 어디에도 TV 카메라가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없다. 이제 더 이상 탐험이나 모험을 할 만한 장소는 남아 있지 않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세계는 아직도 미지의 공간이 넘치고 있다. 설령 그곳이 여행자들의 손때 묻은 관광지라 할지라도, 혹은 TV를 통해 몇 번이나 방영된 곳이라 할지라도 자기가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곳이라면 그곳이 바로 미개척지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자기 눈으로 보지 않는 한, 그곳은 영원히 미지의 세계인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자전거를 타고 처절한 과정을 거쳐 찾아간 세계최고의 장소는 더욱 특별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을 보기 위해 내 두 발로 여기에 왔구나"라는 생각은 감동도 두 배, 실망도 두 배일 것이므로.

그가 정한 세계일주 코스도 단순하다. 그 여정을 요약하는 것만으로도 세계가 손아귀에 들어오는 느낌이다. 알래스카에서 남미 최남단 우슈아이아까지의 아메리카 대륙 종단,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스페인까지 유럽 종단, 스페인에서 모로코로 넘어가 희망봉까지 아프리카 종단, 다시 영국에서 유럽을 횡단하여 서남아시아와 인도, 중국으로 이어지고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돌아가는 것이 그것이다.

'자전거', '4대륙의 종단과 횡단', '세계 최고를 찾는 것'. 그에게 다른 목표는 없었다. 이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리 험난한 길을 만나더라도 끝까지 달려갈 의지와 체력뿐이다.

지목의 문을 넘으며

그는 결국 당초 예상했던 3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넘겨 7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87개국, 9만5000km를 달려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동안 매일같이 찾아간 새로운 곳과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한 권의 책으로 담았다. 그리 두껍지 않은 책에 가장 인상적인 이야기들만을 꾹꾹 눌러 담아서, 55개의 모든 국면이 쉬어갈 틈 없이 흥미진진하다. 이제 책 속으로, 그 여행 속으로 잠시 떠나보자.

그는 오랫동안 세계일주를 꿈꿔왔다. 세계일주를 위해 식품회사에 취직했고, 목표했던 금액을 모으자마자 회사를 그만두고는 여행 준비에 돌입했다. 그러나 출발 한 달을 앞두고 회사일과 여행 준비를 병행하며 무리를 한 탓에 신장기능이 악화되었다. 오줌에 피가 섞여 나오는 혈뇨증상이 나타난 것이다. 그 순간 "집에서 멀리 떠나지 마라. 돌아다니면 오래 못 산다"고 하던 점쟁이의 말도 떠올랐다. 출발도 하기 전에 체력과 의지의 시험대에 오른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모든 걱정과 두려움을 떨치고 3주간의 집중적인 약물치료를 받고 나서 여행을 떠난다.

미국 나바호 인디언의 성지인 '모뉴먼트 벨리'에서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신비한 기운에 매료되어 4일이나 그곳을 떠나지 못했고, 과테말라 '티칼 피라미드'에서는 밀림으로 된 지평선 위로 여기저기 뿔처럼 솟은 신전들의 풍경을 보고 털이 곤두설 정도로 소름이 돋았다.

페루의 우범구간에서는 3인조 권총 강도를 만났다. 다행히 동성 간의 강간은 면했지만 자전거를 제외한 모든 물건과 돈을 털렸으며, 남미의 끝 '파타고니아' 구간에서는 강풍 때문에 20미터마다 쓰러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지옥의 문을 통과했다.

쓰러진 기요타의 옆을 아무 말 없이 지나가다 채 20m도 전진하지 못하고 푹 쓰러졌다. 그러면 다시 기요타가 내 옆을 지나가고... 그렇게 반복하는 동안 나는 아주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폭풍 속에서 그렇게 발버둥을 치면서, 우리의 얼굴에는 어느새 히죽 히죽 웃음이 번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프리카에서는 말라리아에 걸려 환각과 사경 사이를 오가야 했고, 파키스탄 '훈자'로 넘어가는 길에서는 반군들을 피하느라 텐트 속에서 작은 소리 하나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기를 반복했다. 여행의 대미를 위해 돌입한 실크로드 횡단길에서는 4년 전 유럽여행 중 얻은 기관지염이 악화되었다. 너무도 힘든 나머지 자포자기 심정으로 그늘 한 점 없는 사막 한가운데 텐트를 치고 누워버렸지만, 아침에 정신을 차려 눈을 떠보니 다행히 죽지 않고 살아 있었다.

이 여행기에서 무엇보다 감동적인 이야기는 여행길에 만났던 사람들에 관한 추억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세이지'. 비슷한 시기에 자전거 세계일주를 하는 여행자들은 루트가 비슷하여 종종 만났다 헤어지기를 반복하게 되는데, 세이지는 그러한 자전거 여행자 중 한 명이다. 저자는 2년에 걸쳐 아메리카 종단을 하는 동안 미국 피닉스에서 세이지를 처음 만났었고, 안데스 산맥에서 극적으로 재회했었으며, 남미 대륙의 끝 우수아이아에서 만나서 아메리카 종단 성공의 희열을 같이 나누었다.

그 후 유럽으로 넘어간 저자는 영국에서 심리적 슬럼프에 빠져 장기 체류를 하다가 세이지가 지금쯤이면 집에 돌아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에게서 받은 번호로 일본에 전화를 건다. 전화를 받은 세이지의 어머니는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물은 뒤, 세이지는 티베트의 어느 산중에서 실종 되었다고 말한다.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시신을 찾으러 가지도 못하고 있다는 말과 함께.

몇 년 후, 저자는 파키스탄 국경을 넘으며 'Good Bye'라고 적힌 간판 앞에서 세이지의 사진을 꺼내 든다. 사진 속의 세이지가 서 있는 곳은 저자가 지금 서 있는 곳과 같은 곳이었다. 같은 풍경, 같은 간판 앞에 선 세이지는 사진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이 여행에는 세이지와 더불어 수많은 여행자와 현지인이 별처럼 빛난다. 우즈베키스탄의 영악한 소녀 '사비나'의 천진난만한 얼굴도 있고, 낡은 자전거를 타고 따라오던 아프리카 소년 '바오바오'의 수줍은 미소도 있고,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만난 일본어를 좋아하는 열여섯 소녀 '타이시아'와의 애틋한 사랑도 있다. 그리하여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세계 최고를 보고 싶어서, 그것을 직접 피부로 느끼고 싶어서 여행을 떠났다. 이제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세계 최고는 우리들 자신이라고, 지구촌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세계 최고라고...

<떠나라, 자전거 타고 지구 한바퀴> 3부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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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행기를 재미있게 읽었다면 저자가 쓴 두 권의 책도 읽을 것을 권하고 싶다. <가보기 전에 죽지마라>와 함께 출간 되었던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화장실 가장 멋진 별밤>은 그가 보았고, 겪었고, 느꼈고, 먹었던 세계 최고를 모아 놓은 책이다. 최고와 최악의 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1권을 통해 그의 여정을 따라가는 것 못지않게, 그가 뽑은 세계 최고를 한달음에 만나보는 것 또한 숨가쁠 정도로 즐겁다. 

두 권의 여행기에 대한 폭발적 반응에 힘입어 나중에 출간 된 <맛보기 전엔 죽지 마라>는 7년의 여행 동안 그가 먹은 다양한 음식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음식이야말로 각 나라 사람들이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을 가장 잘 보여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여행자의 몸이 가장 정확하게 반응하는 것도 음식임을 알게 된다. 한국에서 그가 기억하는 음식은 가격대비 엄청나게 풍성한 도시락이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 귀한 음식인 김치를 무한 리필해주는 넉넉한 인심에 감동했다고 한다.

세계일주 여행을 통해 얻은 가장 크고 귀한 교훈

찬란한 젊은 날의 7년을 고스란히 여행에 바친 '이시다 유스케'. 이 책은 한 젊고 낙천적인  영혼이 체험을 통해 계속적으로 새로 태어나는 모습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가장 무서운, 가장 기상천외한, 가장 맛있는 혹은 맛없는, 가장 친절한... 그의 목록을 따라가다 보면 체험이야말로 인간의 근본적인 감정을 불러오는 초인종임을 알게 된다. 일상생활 속에서 느끼지 못하는 근원적인 감정들이 온몸으로 직접 세상과 부딪치는 속에서 솟구친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에필로그에서까지 마음의 초인종을 꾹 누른다.

1999년이 저물어 가던 시간에 에이코가 어두운 하늘을 바라보며 읊조리던 말이 지금도 생생하다. 살아 있어서 행복해요... 7년여에 걸친 나의 자전거 여행은, 결국 살아 있어서 행복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한 대장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이제 남은 것은, 살아 있어서 행복하다는 사실을 더욱 확인하기 위해 내가 가진 것을 타인에게 나누어 주는 일일 것이다. 나는 앞으로 그렇게 살 예정이며, 사실은 이것이 세계일주 여행을 통해 얻은 가장 크고 귀한  교훈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여행기를 연재하고 계신 문종성 기자님도 자전거 세계여행을 건강히 완주하시길 바랍니다.



가보기 전엔 죽지마라 - 떠나라, 자전거 타고 지구 한바퀴 1

이시다 유스케 지음, 이성현 옮김, 홍익출판사(2005)


태그:#가보기 전에 죽지마라, #홍익출판사, #이시다 유스케, #세계일주, #자전거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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