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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그리고 셋째 날 그리고 2주가 다지났다. 이제 대학교수진들과도 안면을 텄고 낯설지 않게 그들과 만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서로 익숙해지는 노력을 더해가는 일들이 앞으로의 생활을 위해서 중요하리란 생각을 한다. 나는 기관방문 기간 내내 학교를 찾았다. 그렇게 함으로서 일단 교무실에 내 자리를 확실히 틀자는 생각이었고 이제 그들과 같은 교무실을 쓰는 룸메이트가 되었다. 블론티어 그리고 낯선 대학 더구나 학과개설이 되어 있지 않은 대학이기에 나의 활동은 매순간 긴장을 잃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나의 활동 경과에 따라 학과개설이 가능해지리라는 것은 내게는 잘하면 본전 못하면 능력 부족이란 소리를 듣기 십상인 처지다.

 

평가에 연연해 일을 그르치고 싶지는 않다. 여러 차례 다짐한 바이기도 하지만 현재에 그리고 가능한 한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다짐이 앞으로 계속 유효한 나의 행동 방향이다. 학교 방문 둘째 날 10시 쯤 집 앞에 대기 중인 택시를 탔다. 난 영문을 모를 일이다. 버스를 타면 40분정도 거리다. 그리고 출발지에서 차를 타기 때문에 자리를 잡고 가는 것도 쉽다. 요금이야 비싸지는 않지만 버스에 10배도 더 넘는다. 이곳의 버스는 한국 돈으로 350원 전후면 시내 어느 곳이든 다 갈 수 있다. 그에 반해 택시는 한국 돈 4~5000원이다. 하지만 어쩌랴! 멋모르는 나그네 처지다. 그렇게 타샤가 불러놓은 택시를 타고 수호믈린스키 대학교에 내렸다.

 

 

학교에 도착해서 교무실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고 있는데 나탈리아가 다가왔다. 그리고 교무실로 들어섰다. 내 포지션을 정확히 알 수 없어 내가 교무실에 들어가도 되는지 어쩌는지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나탈리아가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로 들어온 것은 쉬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커피블랙이라고 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가 말하는 커피타임이다. 그러니까 정확히 표현하면 커피 브레이크였다. 나는 그러면 커피를 마셔야 되는 것 아닌가하고 농담을 하였다. 그녀는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나도 꼭 마시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권하는 커피를 마시겠다고 했다.

 

다시 수업이 시작되고 그녀가 강의실로 향했다. 나는 주임교수로 보이는 이리나 선생에게 모쥬너 컴퓨톄르(МОЖНО КОМПЬЮТЕР?)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렇다고 말하고 곧 교내 전산직원을 불러주었다. 그는 5분도 안되어서 교무실로 왔다. 이리나 선생은 나를 소개시킨 후 곧 옆 교실로 함께 향했다. 수업중인 교실에 문을 열고 양해를 구한 이리나 선생은 곧 전산실 직원에게 잘 도와드리라 말하고 교무실로 돌아갔다.

 

 

나는 수업중인 교실에 여러 대의 컴퓨터 중 한 곳을 선택하고 자리를 잡았다. 전산실 직원은 곧 내게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도록 대학교내 컴퓨터를 사용할 수 있는 아이디를 영문자로 KIM이라고 발급하고는 내게 비밀번호를 입력하라고 말했다. 그의 이름은 니꼴라이였다. 네팔에서 참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같은 것을 보고 놀랐는데 이곳 우크라이나도 마찬가지다. 처음 방문한 날 이리나 교수님이 소개한 교수진들 중에도 이리나라는 선생님이 셋, 율랴가 둘, 타샤 선생 등 겹치는 이름이 많아 혼란스럽다. 전산실 직원의 이름이 니꼴라이고 키예프의 코이카 차량 운전기사도 니꼴라이인 것을 보아도 그렇다. 아무튼 그는 참 선한 얼굴을 하고 성실히 일을 진행해주었다.

 

그저 이런 저런 웹서핑을 하며 한국의 웹싸이트와 뉴스싸이트들을 둘러보고 이메일을 점검했다. 시간이 지나고 다시 나탈리아가 수업을 마치고 교무실에 왔고 난 내가 이 사무실을 함께 사용해도 되는가를 물었다. 그렇다고 말했다. 나는 곳 첫날 자리 잡았던 곳을 찾아 앉았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도 그 자리를 찾았다. 나는 그렇게 2주 동안 그 자리를 찾았다. 셋째 날에는 노트북을 소지하고 갔다. 안면을 익히고 전화번호를 받았던 나는 홀로 전원을 연결하고는 곧 전산실 직원 니꼴라이를 누구를 거치지 않고 직접 불렀다. 그는 곧 달려와 주었다. 그리고 노트북을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랜을 연결하지 않고도 무선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참 편한 일이다. 이제 인터넷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정말 한 걸음 확실한 둥지를 틀어가는 느낌이 든다. 그처럼 인터넷에 목메는 처지란 사실을 실감한다. 만약 인터넷이 우리를 배반하면 우리의 운명은 어찌될까? 참 암담하다. 문명의 이기 앞에 무기력한 인간의 모습을 다시 실감한다. 느리게 살자고 주장하면서 빠름에 길들여진 무기력이 어쩌면 인간의 비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무튼 나는 2주 동안의 근무기관 방문을 무사히 마쳤고 이제 연수는 모두 마쳤다. 이제 키예프로 돌아가 현지기관방문 경과에 대해 보고를 마친 후 다시 정식으로 임지배정을 받아 다시 니꼴라예프로 돌아와서 일을 시작하게 된다. 한국에서 한 달 이곳에서 두 달을 연수에 힘을 쏟았다. 그 동안 애쓴 다른 단원들과도 모두 밝은 얼굴로 볼 수 있으리라.

 

내가 머물게 될 니꼴라예프에서 나는 2주라는 짧은 기간 동안 조교 알라와도 친해졌다. 나는 러시아어 자막이 나온 영화 두 편을 DVD에 담아 건넸다. 그리고 한국의 전통음악 여러 곡도 함께 전했다. 학생 타샤와 비까 그리고 그녀의 친구들에게 보여주었던 러시아어 자막이 나오는 영화였는데 그들이 영화를 보며 활짝 웃음을 웃으며 흥미롭게 보던 모습에 자신감을 갖고 전한 것이다. 이제 우크라이나 니꼴라예프에도 작은 한류의 흐름이 시작된 것이다. 아무튼 나를 관심 깊게 바라보는 그들이 고맙다.

 

 

나는 그런 그들을 위해 1913년에 생겨서 지금까지 이어져오는 수호믈린스키 100주년 이내의 역사를 하나 만들어내고 싶다. 그것은 한국어교육이라는 신규 학과를 개설하는 영광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다. 욕심이 아니라 주어진 과제를 따라 살면서 그것이 스스로 이어지는 순리로 만들고자 하는 것이다. 그들이 원해서 그들이 이루는 것이 내가 이루는 것이니, 나는 그들이 원하도록 만들어가는 것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이라 믿는다. 나는 그런 방안들을 다방면에서 고려하고 있다. 매순간이 사색의 순간인 내게 우크라이나 니꼴라예프에 한국어를 전하고자 사색의 의지가 하나 추가된 것이다. 그것이 나의 삶에 또 다른 유전자가 되고 있다.

 

 

청정한 도시 니꼴라예프에 내륙의 항구와 바다를 잇는 항구가 있다. 그곳에 처음 정박했던 배처럼 어디로 얼마나 가게 될지 모르지만, 처음 그날의 왕성한 기운은 잊지 않아야 할 것이다. 다짐을 잃은 사람의 모습은 처량한 패자의 모습이다. 패자라도 다짐을 기억하는 패자라면 다른 미래에는 그 순간의 패배가 약이 되리란 사실을 나는 믿는다. 눈물이 뒤범벅이 된 패자의 얼굴에는 회한이 서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그에게 다짐을 잃지 않은 것이 남아 있다면 그 눈물은 머지않아 영광과 환희의 눈물이 되어 그를 피어나게 하리라 믿는 것이다. 도전이 누군가를 상처 내는 것이 아니라면, 누군가를 유익하게 하고 자신에게도 보람을 이루는 도전이라면, 누구에게든 적극 권할 일이고 그것을 즐겁게 맞이할 것이다. 그것은 나의 좌표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해피수원뉴스에도 게재 됩니다.


태그:#우크라이나 니꼴라예프 한국어 교육, #우크라이나 한국어 교육 시인 김형효, #니꼴라예프 수호믈린스키 국립대학교 한국어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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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사람의 사막에서" 이후 세권의 시집, 2007년<히말라야,안나푸르나를 걷다>, 네팔어린이동화<무나마단의 하늘>, <길 위의 순례자>출간, 전도서출판 문화발전소대표, 격월간시와혁명발행인, 대자보편집위원 현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홈페이지sisarang.com, nekonews.com운영자, 전우크라이나 예빠토리야한글학교교사, 현재 네팔한국문화센타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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