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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소항 앞 바다.
 곰소항 앞 바다.
ⓒ 오승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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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문학 공원을 나와 공원내 야외공연장에서 미리 준비해 간 음식으로 회원간 정담과 함께 즐거운 간식시간을 가졌다. 광주김치대축제에서 상을 받은 김영임 부회장이 손수 담근 김치와 홍어무침, 삶은 돼지고기와 안주거리, 김현숙 사무국장이 마련한 한과와 각종 안주와 술, 음료, 두릅, 오이, 당근, 부침개 등이 푸짐한 먹을거리로 제공되었다.

먹는 즐거움은 곧 웃음의 향연으로 이어지고, 사람들을 정겨운 대화의 장으로 이끈다. 사람사는 것은 다 마찬가지. 평소 근엄하고 품위있는 예술인의 자세를 견지하며 사는 문인들도 이 날만은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열린 마음으로 건배를, 화이팅을 외치며, 순수의 여백을 동심의 시간으로 한껏 즐겼다.

공원을 나와 점심을 먹기 위해 40여 분을 달려 전북 부안의 곰소항에 도착했다. 이번에도 이동하는 버스 안에서는 변함없이 즐거움과 흥겨움의 향연이 펼쳐졌다.

매운탕 등 먹거리와 웃음이 한보따리인 점심시간.
 매운탕 등 먹거리와 웃음이 한보따리인 점심시간.
ⓒ 오승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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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 90이 다된 김재민 시인이 불러주는 <고향의 봄><반달><그네><보리밭><가고파><나물캐는 처녀><목포의 눈물> 등 구성진 가락으로 불려지는 정겨운 우리네 가곡과 가요 등이 듣는 이의 심금을 울린다. 차안의 모든 사람들이 하나의 마음으로 동참하면서, 차안은 온통 흥분의 도가니다. 술 맛도 이야기 맛도 최고다.

분위기 메이커 박춘임 시인의 술주정(?)과 가요 열창, 불쑥 불쑥 나서서 교훈적인 인생철학(?) 막 쏟아내는 조연탁 시인의 거침없는 입담, 박정식 동시인의 '떨어진 단추하나'라는 이준관 시인의 시를 중심으로 한 '문학작품의 소재와 주제의 문학강연', 손광은 전남대 명예교수의 '신석정 시인의 문학세계' 강의 등 보석같은 문학의 향기와 삶의 영양들이 강을 이루며, 동행의 기쁨을 한껏 키운다.

곰소항에 도착하여 정해진 식당에서 회와 전어, 매운탕 등으로 늦은 점심을 하였다. 바다가 한눈에 들어와 가슴을 쳤다. 고즈넉한 바다의 풍경은 그야말로 여유로움과 사색의 모정 그대로이다.

<신석정의 문학세계>에 대해 강의하고 있는 손광은 교수.
 <신석정의 문학세계>에 대해 강의하고 있는 손광은 교수.
ⓒ 오승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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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꽃은 점심시간에도 봇물을 이루었다. 문인들끼리 서로를 더 알려고 적극적인 교류를 하고, 문학의 향기와 사람냄새, 고향 냄새를 깊게 호흡하려는 몸짓과 정겨운 대화들이 풍요의 강을 이루면서, 문학기행의 분위기는 최고조에 이르렀다.

식사후 30여분을 달려 전북 부안의 선곡리에 신석정 시인의 고택에 도착했다. 신석정 시인의 고택은 골목길 한쪽에 평범한 시골 초가집 형태로 자리하고 있었다. 마당 한가운데 우물이 있었는데, 네모진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어 초가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신석정 시인의 고택 '청구원'
 신석정 시인의 고택 '청구원'
ⓒ 오승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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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가적인 정서를 음악적인 리듬에 담아 노래하는 서정시인 '신석정'

'푸른 산처럼 든든하게 지구를/디디고 사는 것은 얼마나 기쁜 일이냐/뼈에 결리도록 생활을 슬퍼도 좋다/저문 들길에서 푸른 별을 바라보자/하늘 아래 사는 거룩한 일(신석정의 시 '들길에 서서')

신석정 시인의 고택(청구원)은 원래는 초가 3칸의 집이었으나, 지금은 수리해서 4칸 규모로 돼 있다. 고택은 선생이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1931년 이후 낙향해 작품 활동에 전념한 곳으로 1952년 전주로 이사할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이곳은 시인이 <촛불>, <슬픈 목가> 등의 대표작을 집필한 산실이기도 하다.

매창공원 안에 있는 기생 '이매창 의 묘'.
 매창공원 안에 있는 기생 '이매창 의 묘'.
ⓒ 오승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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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향리에서 문학의 꿈을 키우다 상경하여 석전(石顚) 박한영 스님의 문하에서 수학하면서 시문학 동인이 되어 본격적인 시작(詩作)활동을 하였다. 어머니 부음을 받고 귀향한 후 이 집을 마련하였으며, 스스로 이곳에 은행나무, 벽오동, 목련, 산수유, 시누대 등을 심고 청구원(靑丘園)이라고 이름하였다. 석정은 전주로 이사하기 전까지 이 집에 살면서 목가(牧歌)적인 시를 발표하여 전원시인이라는 호칭을 얻기도 하였다.

신석정(辛夕汀, 1907-1974)시인은 전라북도 부안(扶安) 출생으로 본명은 석정(錫正)이다. 시인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하여 중앙불교 전문강원에서 약 1년간 불전(佛典)을 연구하였다. 1931년 <시문학> 3호부터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작품 활동을 본격화하여 그해에 <선물> <그 꿈을 깨우면 어떻게 할까요> 등을 발표했고, 계속 <나의 꿈을 엿보시겠습니까> <봄의 유혹> <어느 작은 풍경> 등 목가적인 서정시를 발표하여 독보적인 위치를 굳혔다.

8·15광복 후에는 시작(詩作)과 후진양성에 전념했고, 저서로는 초기의 주옥같은 전원시가 주류를 이룬 제1시집 <촛불>(1939)과 역시 8·15광복 전의 작품을 묶은 제2시집 <슬픈 목가(牧歌)>(1947), 그 뒤 계속 <빙하(氷河)> <산의 서곡(序曲)> <대바람 소리> 등의 시집을 간행했다. 그의 시풍은 잔잔한 전원적인 정서를 음악적인 리듬에 담아 노래하는 데 특색이 있고, 그 맑은 시정(詩情)은 읽는 이의 마음까지 순화시키는 감동적인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전주시 노송동에서 살다가 69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매창공원에 있는 이매창의 시 '이화우'.
 매창공원에 있는 이매창의 시 '이화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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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정 고택을 나와, 5분 거리에 있는 매창 공원을 찾았다. 신석정 고택 주변에 활짝 피어있는 영산홍의 자태들이 선생의 고택을 둘러싸고 있어 보기가 더욱 좋았다. 고택을 나와 마지막으로 오분거리에 있는  매창 공원을 방문했다.

아쟁들이 400여년 동안 지켜온 조선명기 '이매창' 묘

"이화우 흩날리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 는 가/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시비에 새겨진 이매창의 시).

이매창은 본명은 향금(香今)이며, 자는 천향(天香), 호는 매창·계생(桂生)·계랑(桂娘)이다. 그녀는 선조 6년이던 1513년 부안현리 이양종(李陽從)의 서녀로 태어나 1550년 37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매창은 아버지에게서 한문을 배웠다고 하며, 시와 거문고에 뛰어나 김제군수를 지낸 이귀 (李貴) 같은 고관이라든가, 유희경(劉希慶), 허균(許筠) 같은 시인들이 그를 제대로 알아주고 깊이 사귀었다.

그녀는 신분이 기생이었지만 오직 나이 스물에 만난 유희경이라는 사람만 사랑하고 정절을 지킨 여인으로 이 지방에서 400여 년 동안 사랑을 받아오고 있다. 그녀는 시조와 한시를 비롯하여 가무와 탄금(거문고나 가야금을 탐)에 이르기까지 다재다능한 부안의 명기로서, 개성의 황진이와 더불어 조선 명기의 쌍벽을 이루었다.

매창은 평생 수백 편의 시를 남겼으나 거의 흩어져 없어지고 , 1668년에 부안의 아전들이 외어 전하던 시조와 한시 58편을 얻어 개암사에서 목판으로 「매창집」을 엮어냈다. 그 중에서 그의 대표적인 시는 「梨花雨」로 , 「가곡원류」에 실려 전해지고 있다.

매창공원에 설치된 이매창의 시 ' 어수대'.
 매창공원에 설치된 이매창의 시 ' 어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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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창의 묘소가 있는 곳을 "매창이뜸"이라 부르는데, 2001년 부안군에서 이 일대에 매창공원을 조성하였다. 이곳은 본래는 마을 공동묘지였다고 한다. 매창의 묘가 당시 사회에서는 천민계급이었던 아쟁 등 일반서민들에 의해 400여 년 동안 지켜져 왔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놀랐다.

매창공원은 부안읍 서외리 567번지 약 3000평으로 군에서 1990년부터 착공하여 947기의 분묘를 보상하고, 다른 곳으로 이장하였으며, 인근 토지 2400평을 매수 합병하여 5400평의 문화공간을 18억원의 사업비를 투입하여 2001년 4월 28일 문화혁신 개조사업으로 완료한 곳이다.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이면 제일 먼저 찾는 곳 "이매창 묘". 이 묘역은 전라북도 기념물 제 65호로 지정되어 있다. 묘창의 묘는 토광원분묘형태이다. 묘 앞에는 높이 100㎝, 윗넓이 39㎝, 아래넓이 35㎝의 '명원이매창지묘(名媛李梅窓之墓)'라고 쓴 묘비가 서 있다. 평탄하게 조성된 무덤 주변은 잔디와 꽃이 뒤덮고 있다.

묘 앞으로 2기의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뒤쪽으로 둥근 원형으로 에워싸고 있어 아담한 느낌을 준다. 우리 일행이 방문하였을 때에는 마침 묘역 주변이 온통 울긋불긋한 영산홍 물결이었다. 회원들의 카메라 셔터가 수도없이 터졌다.

매창공원에서 한컷.
 매창공원에서 한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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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주변에는 다양한 시가 새겨진 시비가 자리잡고 있었다. 매창의 시인 "이화우" "취하신 님께" "어수대" "임생각" 등의 시비와 매창을 추모하는 여러 시인들의 시비가 세워져 있었다. 특히 허균의 시비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가 눈길을 끌었다. 여덟 줄로 된 짧은 시에 매창을 추모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복숭아를 훔쳐서 인간 세계로 내려오더니 불사약을 훔쳐서 인간 무리를 두고 떠났네" 하는 구절이 특히 인상적이다.

계량(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허균)

아름다운 글귀는 비단을 펴는 듯 하고/밝은 노래는 구름도 멈추게 하네/복숭아를 훔쳐서 인간 세계로 내려오더니/불사약을 훔쳐서 인간 무리를 두고 떠났네/부용꽃 수놓은 휘장엔 등불이 어둡고/비취색 치마엔 향내가 아직 남아 있는데/이듬해 작은 복사꽃 필 무렵/누가 설도의 무덤곁을 찾아 오려나.

허균의 이 시를 보더라도 매창과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매창은 비록 천한 기생이기는 하지만 남다른 시 재주를 지녔던 여자로 허균과 오랫동안 사귈 수 있었던 것이다. 허균이 두 차례나 계생에게 보낸 서신과 '학산초담', '성수시화'에서 계생의 시를 높이 평가한 것으로 보아도 짐작이 된다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허균의 시.
 매창의 죽음을 슬퍼하며 지은 허균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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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에서 유일하게 여자의 이름을 따 명명한 이곳 매창공원은 유일하게 두 여성 이매창 시인, 이중선 명창의 무덤이 있는 곳으로 부안인의 문화와 건강을 아우르는 문화체육 공간으로 태어나 새로운 관광명소로 부상하고 있다.

이곳에는 부사의 탑" 이라는 조형물을 비롯해, 광장, 야외무대, 어린이 놀이터 등의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운동장에는 농구대도 설치되어 있어 체육활동도 가능하다. 문화공간으로서 청소년과 어린이의 쉼터 역할을 하고 있어 가족들의 나들이 공간으로 손색이 없다.

부안의 율객(시조를 잘 짓거나 창을 잘 하는 사람) 모임인 부풍율회(扶風律會)에서는 해마다 음력 4월 5일 이곳에 모여 매창제를 지내고 있다.

매창공원을 나와 오던 길로 다시 되돌아갔다. 여행은 고단한 삶에서의 탈출이며, 자연과의 묵시적인 대화이며, 문화의 향기와의 만남이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기회이며,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강하게 밀려오는 고독과 노화란 놈을 사정없이 밀어내는 열정의 에너지이며, 보는 즐거움, 먹는 즐거움, 느끼는 즐거움을 한꺼번에 만나 볼 수 있는 하늘의 큰 축복이요, 특별한 선물이다는 생각...감사와 기쁨, 건강과 즐거움이 충만한 하루였다.

영산홍의 화려한 외출.
 영산홍의 화려한 외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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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앞의 기사와 연결됩니다.



태그:#문학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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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와 국민을 위한 봉사자인 공무원으로서, 또 문학을 사랑하는 시인과 불우한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것을 또 다른 삶의 즐거움으로 알고 사는 청소년선도위원으로서 지역발전과 이웃을 위한 사랑나눔과 아름다운 일들을 찾아 알리고 싶어 기자회원으로 가입했습니다. 우리 지역사회에서 일어나는 아기자기한 일, 시정소식, 미담사례, 자원봉사 활동, 체험사례 등 밝고 가치있는 기사들을 취재하여 올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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